사서를 읽고 공부하며 처음 접했던 <논어>의 해석 범위와, 그것을 가르치고 곱씹을 때의 <논어>가 다른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면서 천년도 훨씬 전의 중국에서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작금의 시대에 적용된다는 것이 말도 안 되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논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을 포함해서)
사람이 사는 모양이 뭐가 그리 다를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저 유명한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만화에서 수백 년 만에 깨어난 귀신이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걷는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기괴한 기계들이 바퀴로 달려 저절로 움직이고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고 하고 과학이 발전했다고 하면서도 결국 비가 오면 우산을 쓰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군요.
참 공감가는 말이다.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이들이 고전을 읽고 그것을 통해 뭔가 배울 수 있는 이유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고 세상이 눈이 뱅그르르 돌아갈 지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하여, 사람까지 크게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고, 결국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범위가 넓다고 생각하지만 다람쥐 첵 바퀴 돌듯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논어>를 비롯한 <사서>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크다 할 만하다.
그래서 오늘 이 글부터, <논어>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읽어 재해석한 이야기를 풀어내보고자 한다.
'법고창신'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더라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後生可畏
<논어(論語)>의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후생을 두려워할 것이니라. 어찌 오는 사람이 지금과 같지 못할 줄을 알겠는가. 그렇지만 만일 그들이 나이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어도 그 이름이 들려오지 않으면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느니라.」
좀 옛스런 내용이라 이해하기 애매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뭐 엄청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다른 논어의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미래에 오는 후학들이 훨씬 더 나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는 반면, 지금까지 나온 이들 중에서 나이 먹어서도 결국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자들은 더 볼 것도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하다.
그런데 4,50이 되어도 이름을 날리지 못한다고 그를 무시해도 된다는 신랄한 비판적 해석에는 괜시리 뾰루퉁한 의문이 생긴다.
정작 자신은 중용되어 쓰이지 못하고, 자신의 제자들이 한 나라의 재상으로 중용되는 상황에서도 크게 쓰이지 못했던 공자의 입장에서 과연 40, 50이 되어도 그 이름이 들려오지 않는 자라면 별 볼 일 없는 자이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디스 하는 말을 했을까?
자신은 중용되지 않아도 왠만한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스타니까?
그럴리가 없다.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한다.
자신이 지금 유명해지지 못하고,
그렇다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지도 못하고
소위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4,50대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원하는 삶이 지금의 오늘 같은 삶이었는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지금 사는 것은 재미있는가?
나부터 그 대답에 조금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도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나올 정도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가? 아니면 장안의 지가를 올리며, 유명세를 날리고 있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면 갑자기 우울해진다.
내가 도대체 이제까지 무엇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자위하고 싶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다.
이러자고 살았던 삶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의 여구를 빌자면,꾸역꾸역 버티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 힘겨운 날을 즐거운 추억이었다며 맥주잔을 기울일 날이 올 것이다.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이 너무도 한심스럽고
이제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하나도 없이 50을 바라보거나 넘겼다는 당신들에게....
내가 뼈 때리는 위로의 말을 전한다.
당신의 삶이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꾸준히, 절대 굴하지 말고 버티고 버텨라.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날도 추억의 한 장으로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나보다 못했던 혹은 나와 동일선상에 있었던 이들이 지금 잘 나가는 위치에 있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그들의 삶은 그저 그들의 삶이고
당신의 소중한 삶은 당신에게 오롯이 있다.
당신에게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당신의 삶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당신의 가치가,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현실도 무시할 수는 없기에 그것까지 꾸며주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당신의 삶이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40, 50까지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이 주변에서 두려워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내가 보장해주마.
당신이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면,
당신이 잘되길 바라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면,
당신이 아프고 쓰러지면 눈물 흘릴 이들이 있다면....
당신은 아직 좌절해서도 안되고
쓰러져 한탄하고 있어서도 안된다.
살아가라.
당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 아쉽고 쓰린 마음을 부여잡고서라도 살아가라.
곧 당신에게 찾아올 행복한 날을 반드시 내가 보장하마.
100세 시대에서, 50이라면 이제 겨우 절반 왔다.
당신은 마라톤을 보며 맨 앞의 선두그룹만 화면을 통해 봐왔겠지만....
마라톤의 절반을 달리고 남은 절반의 거리를 두고볼 때, 선두그룹에 끼지 못했으니 이미 망했다고 끝까지 뛰지않겠다는 선수들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기 만족을 느끼려고
올림픽 정신에 입각해서 완주를 목표로 참가하는 이들도 아니다.
그들 역시 금메달을 목표로 끝까지 달린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다.
그들은 그 날을 위해, 숱한 나날 아픔을 손아귀에 꼬옥 움켜쥐고 매일같이 달려왔다.
단 하루만에 결과가 바로 나오는 그 3시간이 채 안되는 시합이우리의 라이브한 인생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