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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1. 2021

의지할 것인가? 의지해줄 것인가?

후회하지 않는 삶은 어떤 삶인가?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가 말하였다.

"약속을 의리에 가깝게 하면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고,

공손함을 예(禮)에 가깝게 하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그 사람을

끝까지 존숭(尊崇) 받는 이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논어(論語)> '학이(學而)' 13장에 나오는 말이다.


청탁과 약속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약속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가볍게 친구사이에서 하는 약속이 아닌, 공무를 집행하는 자의 위치에서 하는 약속은 단순한 약속이 아닌 경우가 많다.

거절을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고 그것을 피해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 일 것이다.


예컨대, 지금도 너무도 당연히(?)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아 비리를 저지르는 경찰이나 검사들, 공무원들이 널려 있다.

법으로 엄격히 처벌한다고 하지만 법정까지 끌고 가면 일반인들에게 엄격하고 서슬 시퍼런 법이 그들에게는 뭉그러진 연필만도 못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법꾸라지라고 비난하고 넘어가기엔 그런 일들이 너무도 많다.

정의를 바로잡아달라고 하소연을 하다가 갑자기 그들이 이상한 언행을 보이며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려고 할 때, 왜 이런 식의 행동을 하냐고, 혹시나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받고 이러는 거냐고 쿡 찌르면, 대번에 펄쩍 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짓을 한답니까? 이런 일 정도에 내가 옷을 벗을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코미디이다.

   그가 펄쩍 뛰며 정색을 하는 것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고, 그의 말은 반은 자신의 고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말단 비리 경찰부터 지자체 공무원, 검사, 고위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결코 덜컥 내미는 돈봉투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어떤 독이 될 줄 알고 덥석 받아 물고 꿀꺽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신뢰할만한 거리에 있는 자를 통해서만 청탁을 받고,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는다. 뒤탈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리가 폭로되는 것은 그것들끼리의 불화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돈을 처먹였는데 제대로 일을 끝까지 봐주지 않았거나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여 끝까지 신뢰관계가 유지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낮말은 핸드폰 녹취가 듣고, 밤말은 cctv가 듣는다.

  핸드폰의 일상화와 몰카 천국의 다변화로 인해 이제 일반 대화는 물론이고 전화통화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에 이르기까지 증거수집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추잡한 일을 하느냐고는 묻지 마라.

  그들은 그 자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부수 이익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렵게 노력해서 차지한 그 자리를 통해 얻어내고자 했던 궁극적인 젖과 꿀이라고 흐르는 화수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뜬금없는 뇌물 청탁 이야기로 시작하였는지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논어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가에 대해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만 이해하더라도 일반 독자에서 한 칸 업그레이드된 독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의 말은 공자가 한 말이 아니다. 제자인 유약의 말이다.

  공자가 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논어에 적혀 있는 글들이 제법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글의 경우에는, 이른바 공자의 뜻에 가깝다고 인정받아 간택된 문구라 하겠다.

  방점은, 한자 고문의 특징이 모두 그러하고, 논어 독법이 그러하듯이 위 그림에 나와있는 문단의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종(宗)'에 있다.

  일의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가서도 누군가에게 존숭 받을만한 이로 남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서울대에서 스승이라고 불렸던 이들부터, 정계와 학계의 정점이라고 일컬어지던 자들이 어떻게 그 본색을 드러내 끝이 지저분해지는가를 너무도 숱하게 지근거리에서 지켜봐 왔다.

  위 글은 그 가장 기본이 되는 것에서 궁극적인 목표점까지를 공자에게 배운 유약이 정리한 것이다.

  약속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완곡하고 공손하게 거절하는 것이 결코 나댐을 넘지 않는 것이 체화되면, 그것이 차곡히 쌓이면 결국 그것이 그의 삶이 된다.

  너무나 아쉽지만 내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그것을 체화한 자를 나는 아직 단 한 명도 보지 못하였다.

 지금의 내 관심사는, '그런 이가 과연 있을까?' 이거나, '그런 이를 만나고 싶다.'가 아닌,

 '내가 과연 그런 삶을 이뤄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남을 헐뜯고 욕하기는 쉽다, 너무 쉽다.

 하지만...

 내가 비난의 대안을 제시하것은 너무도 어렵다.

 정의를 아는 것과 정의를 몸소 행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간극이 있다.

 그런 노력을 경주하는 이들이 나를 포함하여 주변에 많아질수록 사회는 맑아질 것이고

 지저분 너저분한 자들은 자멸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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