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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0.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33

성희롱 누명 무고사건의 전례 판결이 나오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369


성희롱 누명을 씌우려던 여자가 무고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건이 터지다.


                                2017년 9월 6일 오전 7시 50분

 

아이들을 학교 보내기 위해 아침을 먹으러 들른 학교 앞 샌드위치 점에서 아침부터 틀어놓은 뉴스의 볼륨이 유난히 큰 날이었다. 짜증스럽게 화면을 보던 박교수의 눈이 갑작스레 눈이 번쩍 뜨였다.

“왜 그래요?”

남편이 마치 비디오 잠시 중지 버튼을 누른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고 화면을 응시하는 모습에 아이들을 챙기던 박 교수의 아내가 물었다.

“저거 좀 봐봐.”

“어차피 내가 당신도 아니고 대만 뉴스를 보면 뭐 알아요? 뭐라는 건데요?”

아내의 말에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며 박 교수가 화면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내를 중국어 중심에 올려 보내고 인터넷을 뒤졌다. 예상했던 것처럼 찌라시 옐로 페이퍼 대만 뉴스는 아까 봤던 뉴스와 동일한 정보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온갖 인터넷을 도배를 해두었다.

2017년 9월 6일 뉴스 보도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27살밖에 안 되는 唐少萱(당소훤)이라는 여자 배우가 2016년 7월에 촬영했던 「戲說台灣」이라는 드라마에서 남편 역할로 출연했던 40살이나 먹은 馬幼興(마유흥)이라는 남자 배우를 성추행으로 고소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그녀가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서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서 남자 배우는 불기소 처분이 되었고, 거짓말로 고소를 했다는 이유로 여배우는 무고죄로 기소된 끝에, 법정에서 자신이 거짓말로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사건이 1년이 훨씬 지나서야 밝혀진 것이었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16년 7월이었는데 1년이 훨씬 지나서야 법원에서 唐少萱이라는 여자 배우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처분을 내리면서 동시에 민사소송으로 남자 배우에게 2천만 대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를 한 남자 배우와의 화해조정을 통해 200만 대만달러를 배상금으로 내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가 되면서 자신의 누명을 밝히는 남자 배우의 기자회견이 있었던 것이다.

남자 배우는 그 일이 터지고 나서 1년간이나 방송국에서 일을 얻을 수 없었고, 전혀 수입이 없었고, 부모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며 그를 믿어주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의 어린 딸이 학교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지내며,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어서 자살까지 생각했었다는 심경토로를 방송에서 눈물 콧물 흘려가며 항변하는 기자회견이었다.

박 교수는 여러 가지면에서 이 사건의 놀랍기 그지없었다.

첫 번째는 실제로 이런 일이 타이완에서는 정말로 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묘하게 사건이 닮아 있어, 그가 도대체 검찰에서 어떻게 그 누명을 벗을 수 있었는가 하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의문점이었다. 연구실에 앉아 이것저것 관련 인터넷 기사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1년 전 사건이 언론에 도배를 했을 때부터 최근, 그가 어떻게 누명을 벗었는지 간략하나마 정리되어 언급이 되어 있는 기사가 딸랑 하나 보였다.

기사에는 그가 누명을 벗기 위해 검찰에 제출한 증거로 두 사람의 통화내용과 라인 대화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봤던 장면에서 마치 예능 오락에서 봤던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를 연출한 장면을 봤던 것이 기억났다. 그녀가 고소한 내용에 따라 재구성된 날짜에 비춰보았을 때, 남자 배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 당일 이후에도 그들이 멀쩡하게 함께 식사를 하고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라인 대화만으로 밝혔고, 그 친밀한 정도가 성추행을 당한 후의 일반 여성들이 보이는 행동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밝혀 검찰의 조사과정에서 상식적으로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인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거봐! 당연한 거지. 됐다. 이거라구!”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혼자 미친 사람처럼 그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가 어떻게 누명을 벗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정리된 기사를 보는 순간 박 교수는 울컥하는 무언가가 뜨거운 것이 속 안에서 솟아오르는 듯하면서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면,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어. 이 사건의 판례를 들이밀면 분명히 받아들여질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수업이 끝나고 연구실로 돌아온 아내에게 기쁜 마음으로 설명하고 대책을 준비하려고 작성한 문건을 보여줬지만, 아내의 얼굴을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왜 그래? 뭐가 불안해?”

“사실, 불안한 게 아니구요. 지금까지 한 행동들만 보더라도 상식적인 게 하나도 없었잖아요. 학교만 해도 그래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희롱이 있다고 얘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있는데도, 최첨단 CCTV로 최근에 교체되어서 증거자료가 있다고 반대 증거가 나왔는데도 그걸 덮고서 없는 것처럼 밀어붙이고 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검찰은...”

“여기가 삼류대학도 아니고 총리까지 나온 명문 국립대랍시고 하는 꼴이 이런데, 이런 대학 출신들끼리 이 코딱지만 한 나라 같지도 않은 땅에 있는 것들이 뭐가 그렇게 다를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검찰이 정상적일 거라는 생각도 별루 안 들고요. 후우”

아내의 말, 어디 하나 틀린 곳이 없어 딱히 뭐라 위로의 말 같은 것도 넣을 틈이 안보였다.

일단 그 자료를 장 변호사가 들어있는 단체 라인방에 링크와 함께 보냈다.

바쁜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미 수임료를 모두 받았기 때문인지 장 변호사에게서의 답변은 하루가 지나서 딱 한 마디가 왔다.

 

- 한번 찾아보고 준비할게요. 그나저나 검찰관이 아직 부르질 않으니 자료를 준비하더라도 가서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니, 날짜 통지가 오면 그때 다시 회의를 하도록 합시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8월 초에 통역도 없이 불러놓고 잘못했다고 해놓고서는 검찰에서는 부를 생각을 하지 않는지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시간이 흘렀다.

장 변호사의 설명에 따르면, 대만 형사사건의 기소 여부는, 일단 검찰관 개인의 전권에 의해 결정이 되는데, 변호의 여지를 두기 때문에, 재판처럼 이루어진다고 했다. 즉, 기소가 되어 유무죄를 따지는 재판이 아니라, 고소를 한 입장의 당사자 혹은 변호인과 고소를 당한 입장의 당사자 혹은 변호인이 재판처럼 검사 앞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의 증거나 증인까지 데려와 정식 재판처럼 시비를 가리는 과정을 가진 이후에 검사가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뉴스에서 봤던 그 남자 배우도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제출한 증거들이 검찰관에게 인정을 받아 불기소 처분이 되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여자 배우가 무고를 했다는 사실이 역으로 증명되어 기소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이론대로라면, 현재 명예훼손으로 페이스북에 처음 글을 올려 홍위병 역할을 했던 일면식도 없는 남학생과 주영희의 명예훼손 사건이 병합되어 있기 때문에, 본래는 별개의 사건으로 접수되었지만, 실제로는 성희롱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는 것이 입장이 되면, 그들의 명예훼손이 성립하고 여학생의 무고가 성립되어 그들이 자동으로 고소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대학 성평회에서 했던 것처럼 모든 성희롱이 성립된다는 식으로 우겨버리는 결과가 나오면 기소가 되어 재판으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학이 개강하고 9월이 다 지나갈 동안 피말리던 하루하루는 점점 박 교수와 그를 보는 가족들의 피를 말려갔다. 박 교수의 초췌해져 가는 몰골을 보며 연구실을 찾아 응원하던 판판과 병선의 발걸음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들 역시 개강을 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매번 교수의 연구실에 들락거리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판판은 자신이 여학생이라서 더 주변 학생이나 입을 놀리기 좋아하는 한국어학과의 교수들에게 타깃이 될 확률이 높다며 라인으로 매일같이 박 교수에게 안부를 전하며 중국어로 된 기도문을 보내주는 것으로 응원을 보냈다. 10월 첫째 주 추석 연휴가 한국에서는 일주일이나 잡혀 있었다.

대만에 가족과 함께 와서 처음 맞는 추석을 앞두고 판판의 소개로 외교대학교 기독교 교수모임의 총무 교수를 소개받은 것이 9월 마지막 주의 일이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차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던 교회를 다니던 그 늙은 여자 교수는, 남편이 외교대학교 경영대 교수로 부총장까지 지내다가 정년퇴임을 한 사람이라며 판판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고, 워낙 학교에서 교수들끼리 떠드는 문제라 자신도 대강은 알고 있다며 기도를 해주겠다며 과일을 들고 박 교수의 사택을 찾았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아무도 박 교수 가족에게 반가운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기에 그녀의 방문과 그녀의 선물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오랜만의 즐거운 손님맞이였다. 늙은 여교수는 가정학과 출신이었고, 그녀 역시 정년퇴임은 했지만, 교회에서도 총무를 맡고 있고, 기독교도가 얼마 되지 않는 대만에서 그것도 외교대학교 기독교 교수 모임에서도 총무를 맡고서 교회 모임으로 여가를 모두 보내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중국으로 기도문을 외우며 박 교수와 박 교수 가정에 편안함을 기원하는 기도를 해주는 동안에도 박 교수는 도저히 이런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노에 속이 꽉 차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녀의 남편과 연결해주겠다고 하고는 워낙 바쁘다면서 야밤에 전화통화를 연결해준 그녀의 남편은, 상당히 거들먹거리는 듯했지만, 두 가지를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일단, 외교대에서 지금 하는 행동은 나 역시 조금 이해가 안돼요. 뭔가 평상시에 일처리 하는 방식과 달라요.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갈 경우, 대만 사람들은 이 일의 중간에 누군가가 끼어 있어서 정상적으로 흐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거라고 말해요. 그런데 지금은 그걸 찾아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도 못되요. 왜냐하면 당신은 대만 사람들이 싫어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최소한 이번 연도 정식 학기가 끝나는 1월까지는 당신의 교수 신분을 그들 멋대로 박탈할 수 없을 거예요. 설사 검찰에서 기소의견이 나온다고 하더라두요. 왜냐하면 대만의 학교 행정은 굉장히 느리고 절차가 엄청나게 많아요. 그래서 실제로 문제를 일으킨 교수들도 그 시간을 시간대로 다 쓰다가 월급은 다 챙기고 그저 퇴직하는 형태로 일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단 강의를 못한다는 것 빼고는, 사택도 어차피 그들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박 교수님이 돈을 내면서 있는 거니까 학교 입장에서는 멋대로 내쫓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강제절차를 밟는다고 해도 그 시간이 이번 학기에 이루어질 확률도 거의 없으니까 조금 답답하더라도 차분하게 준비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교수님의 사택에서 한 정거장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무짜 예배당이 우리 교회예요. 그러니까 이번 주에 꼭 한번 오세요. 예배가 부담스럽다면, 그냥 가족 소모임이 있으니까 기독교와 상관없이 그저 가족들 간의 모임이니까 대만 가족들과 교류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오세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던 박 교수나, 본래 성당을 다니던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와 아이들이 교회를 가는 것에 마음이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이렇게 힘들 때 종교에 독실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주의 금요일 저녁에 있다는 가족모임에 박 교수의 가족은 참석하기로 약속을 했다.

 

교회는 일반 건물의 두 층을 전세 내서 사용하는 한국의 교회당이 없는 도심 속의 교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형태였다. 사무실 공간처럼 되어 있는 교회 공간에 찾아가자, 늙은 여자 교수가 그들 가족을 맞았다. 설명했던 것처럼 가족단위로 온 이들이 많았는지 어린아이들이 외국인 가족이 온 것이 신기하다며 박 교수의 아이들과 어울렸다. 로컬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고 친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있는 공간으로 가고, 어른들이 있는 공간이라며 가족 소모임의 공간이 마련된 사무실로 박 교수와 그의 아내가 들어갔다. 어른들이 예닐곱 명 있는 둥근 테이블에서는 이미 그들끼리는 친한 사이인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아, 말씀드렸던 한국 교수 분들이세요. 외교대 교수님이세요.”

늙은 여자 교수의 소개에 모두들 일어나 자기소개를 나눴다. 나이가 가장 지긋해 보이는 부부는 남편이 증권사 간부로 일하고 아내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제법 좌장 행세를 하는 사람이었다. 대개 가족단위였는데, 한 사람의 여자만 빼고 모두 부부단위로 온 이들이었다. 남편이 오지 않은 여자는 고등학교 사회과목 교사였는데, 근처가 집이고 남편이 중국 본토로 물류 유통업을 하고 있어 워낙 출장이 잦아 가족 소모임에 오지 않는 일이 많다고 했다. 또 나이 차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남자가 대뜸 악수를 하려는 박 교수를 끌어안으며 허그를 했다.

“환영합니다. 나는 제임스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버젓이 있는 중국어 이름을 놔두고 영어 이름을 불렀다. 영어 이름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대만의 유행과 특성상 그들은 외국인을 만나면 으레 자신의 영어 이름을 소개하는 것이 익숙하다고 했다. 가족들과 소개하면서 가족 소모임의 정례 코스를 소개받았다. 그중에 있었던 힘든 일이나 어려웠던 일, 좋았던 일을 이야기하고 그 아픔이나 기쁨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모임이 그 모임의 특성이라고 했다.

서로를 소개하는 동안, 나이가 가장 많은 좌장 격인 증권사 간부라는 사람이 서툰 영어와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정말로 환영한다는 카드 같은 종이를 박 교수 가족에게 주었다. 사실 뭔가 말하긴 해야 한다고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어차피 아내가 중국어로 원활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준이 되지 않으니 자신이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만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그들의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간의 힘겨운 일을 그대로 토로하기로 하였다. 그간의 긴 얘기까지는 할 것도 아니었지만 찬찬히 숨을 들이쉬고 박 교수가 자신의 차례에 입을 떼었다.

“저는 사실 올해 2월 18일에 외교대학교에 부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 나라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오긴 했지만 사실 많은 정보도 없었고,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진심으로 열심히 하고 자기 본분을 다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아이들도 중국어를 하나도 못하는데 대학 부설 소학교에 넣고,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지냈습니다. 대만의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려고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묶어놓고 한국인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연구실에 오게 해서 언어교환을 하도록 해 주고 제 나름대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지난여름 6월에 터진 여자 국회의원 기자회견의 성희롱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습니다. 조교를 하던 여학생이 내내 자신이 아무래도 저를 사랑하는 것 같다며 장난질을 치더니 이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이 성희롱을 당했다며 주변의 학생들까지 선동하여 일을 크게 벌이고 만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 실망하는 정도를 지나 저는 물론이고 제 아내와 아이들까지 여름 내내 너무도 힘겹게 지냈습니다. 그나마 아까 좌장께서 다음 주 중추절 바비큐 파티에 초대까지 해주시는 환대에 저희 가족이 타이완에 그렇게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기억을 갖게 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폭탄을 던진 것처럼 좌중이 멍한 얼굴로 서로를 뻘쭘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려운 사회학 용어를 섞어가며 설명하는 박 교수의 중국어도 중국어였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이 뉴스를 통해 보았던 그 사건의 주인공이 자신들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어이없다는 상황이었던 것이 더 맞는 설명이었을 것이다.

좌장은 애써 목소리를 환하게 띠우며 일어나서 갑자기 박 교수를 안아주며 말했다.

“모두 다 괜찮아질 것입니다.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한 것도 하나님이 다 예정하신 계획이 있으셔서 그럴 겁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이 그런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두 기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어색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모임이라는 것을 찾은 박 교수 가족은 자신들을 환대해주는 타이완 사람들을 뒤로하고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왔다.

 

중국 본토의 중추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국가명절에 해당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추절과 춘제(설날)는 전통 명절이고 쉬는 날만도 일주일이 넘었다. 한국 역시 연휴가 설과 추석이 가장 긴 것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타이완은 달랐다. 그저 중추절 당일 하루만 쉬고 큰 행사도 없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80년대 즈음에 타이완의 한 고기 업체에서 특별한 전통이 없는 타이완에서 중추절에 가족끼리 바비큐나 구워 먹자는 TV광고가 히트를 친 것이 계기가 되어, 마치 중추절이 바비큐를 먹는 것이 행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일주일 뒤 꽤 유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권사 간부였던 좌장이 초대한 바비큐 파티에 갈 생각에 박 교수의 막내아들은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그 집은 어디예요? 몇 시까지 오래요? 우리는 무슨 선물을 사 가지고 가요?”

“글세. 하나씩 물어봐야지. 한국 김치를 가져갈까? 케이크도 하나 살까? 생각중이야.”

오랜만에 들떠있는 기분 좋아 보이는 막내를 보면서 박 교수도 오랜만에 마음이 좋았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왠지 모르게 주눅 들어 생활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비큐 파티를 연다고 알려주었던 그날을 이틀 앞둔 저녁 늙은 여자 교수에게서 라인 전화가 왔다.

“네. 그렇지 않아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난번 소모임의 좌장이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했는데, 교수님 통해서 연락을 준다고 해서요.”

“아네. 그게요.”

“네.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게요. 그분께서 저에게 연락이 오긴 왔는데요.”

“네.”

“그분 사촌이 우리 학교 일본어학과 교수예요.”

“아 그래요? 잘 되었네요. 서로 알만도 하겠네요. 물어물어.”

“그게요. 아! 그냥 솔직히 드릴게요. 그분이 이번 바비큐 모임에 안 와줬으면 좋겠다고 저에게 부탁을 하셨어요. 그리고 저희 교회 소모임에도 더 이상 오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네?”

“그분이 여기저기 알아보셨나 봐요. 그런데 피해자가 한 명도 아니고 8~9명이라고 들었다고 하면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랬나 봐요. 아, 물론, 저와 저의 남편은 생각이 달라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됐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바비큐 파티에 뭘 입고 갈지 엄마에게 물어보는 막내의 모습을 보면서 박 교수는 아랫입술을 꽉 물어 피가 흐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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