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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8.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41

교평회, 그 마지막 회의가 열리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397


      교평회, 그 마지막 회의가 열리다.

                                       2017년 11월 8일 오후 3시

 

3단계 교평회의 수순은 그들의 의도대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 물론 8월 말에 다시 변호사의 조력을 받게 되면서 그들이 그렇게 내놓지 않으려던 성평회의 조사보고서라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긴 했지만, 그들의 획책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이 만든 정보 공유 카페에 스승이 남긴 메시지는 짧고 명료했다.

 

- 일단 수요일 회의에는 참석하되,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 족속들이 워낙 자기 콤플렉스가 있는 이들일 테니 변호사를 통해 법적 절차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도록 해라. 그리고 자네는 그 뒤에 한 마디 정도만 하면 된다. 너희 나라는 원래 이런 식으로 날림으로 처리하냐고. 공식적으로 말한 것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들릴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거면 회의 자체가 술렁거리고 무너지게 될 거다.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자네의 멘털이 무너지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항시 날이 바짝 서 있는 검이어야 한다.

 

글을 읽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 툭 하고 흘러내렸다.

‘아니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얼른 연구실에 누가 들어올까 싶어 눈물을 훔치고 변호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장 변호사는 여전히 직접 연락을 하지 않고 황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전에 재판이 있었어요. 연락이 늦어 죄송합니다. 학교 회의 시간에 늦지 않도록 법원에서 바로 택시 타고 넘어갈 겁니다. 교수님 계신 연구대루 1층 로비에서 만나서 함께 가는 것으로 하죠.”

“문건 잘 검토했습니다. 일단 오늘은 그들이 1차 학과 회의와 2차 단과대학 회의에서 절차상 위반한 사항에 대해 공격을 집중하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어떻게 판이 돌아갈지 몰라, 우리 측 입장을 정리한 문건도 A4 한 장정도로 준비했습니다.”

“네. 그럼 내려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직도 후덥지근한 타이완의 11월 오후, 이번에 대학본부가 있는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회의실 공간에는 제법 많은 교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회의실 앞에 도착하자 마치 대단한 행사를 진행하는 양 조교인지 직원인지 하는 젊은 남자가 황 변호사와 박 교수의 앞을 막았다.

“박 교수님 되십니까?”

“네. 그리고 이 분은 제 변호사입니다.”

황 변호사가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밀며 기계적인 자기소개를 하자, 남자가 회의실 앞쪽으로 안내를 했다. 확실히 2차까지의 단과대학 회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3차 교평회는 말 그대로 최종단계의 회의였다. 구성원들이 모두 교수들은 것은 같았으나 그 나라는 대표하는 국립대의 그것도 메인이 되는 법대와 경영대 등을 대표하는 정치권력에 진심인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박 교수의 성평회 안건뿐만이 아닌, 다분히 그들 사이의 정치적인 성향이 부대끼는 작은 국회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했다.

마이크 앞쪽으로 소형 녹음기까지 켜져 있는 상태였다. 즉, 회의록을 만들고 작은 국회답게 자신들이 국회의원만큼이나 국정회의를 제대로 코스프레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자아, 다음 안건을 위해 관련된 교수님이 오셨으니 다음 안건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그 뉴스에 나왔던 성희롱 건 맞지요?”

사회자로 보이는 교수의 말과 상관없이 멀찍이 인상이 강해 보이는 스킨헤드의 한 교수가 거의 드러누운 자세로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다들 아까 전해드렸던 성평회의 조사보고서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먼저, 변호사와 동석하셨기 때문에 당사자 측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 변호사가 박 교수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듯하다가 사회를 보는 교수가 먼저 손을 내밀며 제시하자 목을 가다듬고 준비해둔 종이를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여기 법대 교수님들도 적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건은 지금 검찰에서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기소를 결정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기소를 하게 된 공소장을 오늘 저희 사무실에서 받았는데요. 그 내용이 그다지 길지도 않습니다. 외교대학교 성평회에서 제출한 조사보고서에 의거하여 기소를 결정한다.”

갑자기 교수들 사이에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소장을 아직 받지 못했던 박 교수 역시 눈이 뒤둥그레져서 황 변호사를 응시했다. 황 변호사는 괜찮다는 제스처를 써가며 손바닥을 들었다가 내려 보였다.

“어떤 형사 기소 절차에서도 자신들이 조사를 하지 않고 대학 성평회의 조사보고서에 의거하여 기소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어떻게 학교의 3차 교평회 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그 기밀문건에 해당하는 조사보고서가 검찰에 제공되었는지도 오늘 알아보았습니다.”

“누굽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 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거친 목소리로 질문이 터져 나왔다. 박 교수는 이미 자신이 당황해 있어 그게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아마도 법대 교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황 변호사가 들고 있는 문건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국어 학과의 실질적인 보스라고 하는 곽 모 교수였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 학과 보스에 해당하는 여자가 직접 기밀 문건을 밖으로 유출하는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아직 우리 승인도 안 난 문건을요?”

“맞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도 부족해서 그걸 근거로 기소까지 결정이 되었습니다. 심각한 상황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제 의뢰인이신 박 교수님은 3단계 교평회 중에서 한국어학과 교평회에서는 그런 조사보고서가 있는지 조차 고지받지 못했습니다.”

“뭐야! 지금 학교 망신 한국어학과 것들이 다 시키고 있다는 거야?”

박 교수도 나중에 알았지만 3차 교평회의 경우, 정족수가 정해져 있기도 하지만 학교 규정상 해당 학과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해당 학과의 교수는 절대 참석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규정이었지만, 정작 2차 단과대학 교평회에 버젓이 학과장과 한국말도 제대로 안 되는 부산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부인이 한국인인 그 교수가 참석한 것을 봤었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나, 3차 교평회에서는 학교의 권력싸움의 중심에 있는 경영대와 법대 교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규정에 따라서도 그렇지만, 어문계열의 교수 따위가 발을 들이밀 수 있는 상황이 안되었다. 심지어 사범대학교는 단과대학장조차 들어오지 못한다는 얘기도 나중에 들었다.

“게다가, 그 문제를 지적하자, 2차 단과대학 교평회에서는 저희에게 조사보고서를 카피도 못하고 사진을 찍어도 안된다며 감시하면서 단 10분간만 보게 허락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외교대학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뭐야? 단과대학장 안 왔어?”

거칠게 깡패들이 뒷골목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거 뭐 안건이고 뭐고 절차 다 어겨서 올려놓고 나중에 무슨 소리 들으려고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해? 성평회 위원이라고 한 여자 어디 있어?”

그들의 거친 소리를 들으며, 아까 언뜻 보였던 성평회의 여직원의 모습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슬그머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부총장님 직속 산하의 성평회에서 구성된 성평위원들이 이미 결론을 낸 조사보고서가 있고...”

사회자가 험악해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조사보고서를 내밀려고 했지만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더 커져 나왔다. 박 교수가 앞에 있던 마이크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황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원래 타이완의 국립대는 이런 식으로 날림 처리를 하나 보죠?”

뜬금없이 자신을 보며 말하는 박 교수에게 뭐라고 황변호사가 말할 틈도 없이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안건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상황 아니요? 부총장 측은 오늘 참석 안 했어?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학교 명예를 내동댕이칠 수가 있어!”

“우리가 한국인한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겠어?”

“다시 1차 교평회로 보내서 절차 다 밟아서 다시 오라고 해!”

도저히 안 되겠는지 사회를 보던 교수가 땀을 닦으며 박 교수와 황 변호사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청했다.

밖으로 나오며 박 교수가 황 변호사에게 물었다.

“왜 공소장을 받았다는 말을 안 했어요?”

“저도 아까 택시에서 오다가 받았어요. 장 변호사님이 이제사 확인했다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아니, 황변호사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그럼 아까 말한 것처럼 검찰에서 학교 성평회 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기소를 결정했다구요?”

“네. 지금 장 변호사님이 보내주신 공소장 박 교수님 라인으로 공유해서 보내드렸어요.”

정말로 한 장 짜리 기소장이라고 적힌 문서에는 두 줄 정도로 간략하게 적힌 것이 전부였다.

“원래 검찰에서 조사도 없이 이런 근거로 한다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종종 그렇게 외부의 압력이나 결탁으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저도 타이완 사람이지만 창피한 부분이죠.”

“그럼 아까 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1차 교평회부터 다시 하는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1차는 제가 참석하지 않았었지만, 2차의 분위기를 보건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저와 장 변호사님 생각입니다.”

“그럼 의미가 없잖아요.”

“아니죠. 지금 이미 기소를 결정했기 때문에 검찰 측은 학교처럼 절차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법절차를 취소하거나 다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검찰과의 일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사보고서도 원본을 카피하던가 해서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서 그들을 공격할 포인트를 찾아야 하구요.”

“조사보고서를 준대요, 학교에서? 순순히?”

“아마 오늘 이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는 것은, 바로 한국어학과에 통지가 갈 겁니다.”

“그래서요?”

“그러면 조사보고서를 우리에게 내주지 않고서는 안될 겁니다. 그러면 그 과정으로 시간을 벌고 조사보고서 원본을 받아서 분석하고 그렇게 재판에 대비하는 예비단계로 학교를 활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에서 지금처럼 3차 교평회에 허가가 안 나오면 나를 해임하겠다는 한국어학과의 의도는 실패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다시 절차를 밟아봐야 하겠지만, 아직 그 내용을 가지고 뭔가 싸움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지켜봐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기소장도 그렇고, 검찰과의 재판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또 서로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대로 연락하기로 하죠.”

지난번처럼 박 교수에게 붙잡혀 다시 성평회를 쳐들어가던가 하는 일이 생길까 봐서였는지 황 변호사가 급하게 도망치듯 자리를 비웠다.


기운이 쑥 빠져 연구실로 돌아와 커피 포트에 물을 담고 막 버튼을 누르고 돌아서는데 연구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시죠?”

대답이 없었다. 연구실 문을 열자, 웬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 두 명이 뭔가를 들고 박 교수에게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시죠?”

“한국어학과 박 교수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만.”

“여기 한국어학과와 단과대학에서 서류를 전달하고 사인을 받아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네? 이게 뭔데요?”

“교평회 회의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네? 이봐요. 3차 교평회 끝내고 지금 막 내려오는 길인데, 무슨 재회의 날짜가 지금 정해졌다는 거예요? 이럴 줄 알았다는 거예요?”

박 교수의 다소 격한 반응과 높아진 고성에 젊은 남자 직원이 뒤로 주춤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곁에 있던 독해 보이는 나이 든 여자가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저희는 학교 행정 직원일 뿐입니다. 시켜서 보내는 것이지 저희가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거나 한 것이 아니니까요.”

박 교수가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며 종이를 넘겼다.

다음 주 화요일로 이미 지정되어 싸인란에 사인만 하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3일 후 바로 2차 교평회 회의였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1차 교평회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면 2차 교평회를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것임에도 이미 1차가 통과된 것을 전제로 한 2차 교평회 날짜까지 가져온 것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 직원이 온 것을 보면, 단과대학 학장실에서 한꺼번에 보내서 한국어학과 조교가 왔다가 괜한 욕을 먹을까 봐 대신시켰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아, 다 사인했습니다. 됐지요?”

“이 서류는 교수님이 가지고 계시고 다음 주에 이쪽에 시간에 그 장소로 오시면 됩니다.”

대놓고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는 이들보다 내내 박 교수의 귀에는 한국어과의 실질적인 보스였던 여자 교수가 직접 그 서류를 들고 검찰에 제출했다는 황 변호사의 설명이 내내 거슬렸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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