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진(陳)나라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吾黨의 小子들이 뜻은 크나 소략하여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었을 뿐이요, 그것을 마름질할 줄을 모르는구나.”
이번 장의 내용은 공자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시기와 상황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애공 3년(B.C. 492년) 공자가 그렇게 비판에 마지않던 노(魯)나라의 정치를 전횡하던 계환자(季桓子)가 죽고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계강자(季康子)가 정권을 잡게 된다. 그리고 애공 11년이 되던 해, 계강자가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를 초빙하게 된다. 당시 제나라가 노나라를 토벌하러 침략했을 때, 염구의 활약으로 공을 인정받아 실권을 확실하게 잡고 염구의 권고로 공자에게 귀국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자 당시 진(陳)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이상을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전수하여 나라의 기강부터 제대로 갖추도록 하겠다고 작정한다. 그때 제대로 된 스승과 교육이 없어 공부와 수양이 필요한 당시 노나라의 상황을 언급하며, 조국의 동량(棟樑)을 키워내겠다는 일종의 결의에 찬 대사가 바로 이 장의 내용이다. 그때 마침내 10여 년에 걸친 공자의 유랑 생활이 끝나고 공자는 고국,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은 공자가 사방(四方)을 돌아다니셨으나 道가 행해지지 않자, 돌아갈 것을 생각하시며 하신 탄식이다. 吾黨의 小子는 노나라에 있는 문인을 가리킨 것이다. 夫子의 처음 마음에는 그 道를 천하에 펴보려 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끝내 쓰여지지 못할 줄을 아셨다. 이에 비로소 후학을 성취시켜 도를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또 中行의 선비를 얻지 못하여 그다음 사람을 생각하셨으니, 狂士는 뜻이 고원하여 혹 그와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었다. 단, 狂士들은 中道를 벗어나고 正道를 잃어 혹 이단(異端)에 빠질까 염려하셨다. 그러므로 돌아가 바로잡고자 하신 것이다.”
주자는 그래도 공자의 뜻을 잇는 자였던 터라, 상당히 완곡하게 공자의 처지를 가능한 한 이해하고자 하는 해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바꿔보려고 천하를 주유하였으나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을 알게 되자, 고국의 후학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도를 전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평균 연령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나이로 생각해도 이 장의 한탄을 하던 시기의 공자 나이 이미 68세. 그 나이에도 영향력이 강한 나라의 임금에게 크게 쓰여 천하에 자신의 도를 펼치는 꿈은 포기하더라도,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된 공부를 가르쳐 자신의 도를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이미 여기저기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공자를 중용하지 않았고, 결국 나이가 먹을 대로 먹어 겨우 고국에서 큰 자리를 하는 제자가 자신을 불러주었으니, 그 대의명분으로 지금 고국의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공부를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 기본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자신이 돌아가 그 역할을 해야 하겠다고 자조 섞인,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긴 유랑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가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위 주자의 주석에 보이는, ‘中道의 선비’로 해석한 ‘中行’이나 ‘狂士’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후에 공부하게 될 <<孟子>> <盡心下> 37장에 “공자께서 중도의 선비를 얻어 더불지 못할진댄 반드시 狂子와 獧子와 하겠다. ... 공자께서 어찌 中道의 인물을 얻기를 원하지 않으셨겠는가마는 반드시 얻을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그다음을 생각하신 것이다”라는 구절에 원용되어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구체화한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이 장에서 공자의 조금은 초라하고 측은한 당시의 처지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노나라 젊은이들에 대한 지적에 조금 더 주목하게 된다. 결국 이 지적은 공자의 고국 노나라의 젊은이들에 대한 것이 아닌, 당시 젊은이들에 대한 칠순을 앞에 둔 대가의 분석이자, 앞으로 그가 지향해야 할 교육의 방향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뒷 문장의 ‘뜻은 크나 소략하여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었을 뿐이요, 그것을 마름질할 줄을 모르는구나.’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처음부터 뜻이 작다고 보지도 않았고, 공부가 부족하여 문장이 부족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마름질할 줄 모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름질이란 제대로 옷을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즉,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기본적인 자질은 갖추었지만, 정작 그 공부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시대는,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은 공자가 한탄하던 그 시대에 비해 많이 달라졌나? 컴퓨터라는 것이 발명되고, 인터넷이라는 것이 발명되면서 전 세계가 바로 이웃처럼 연결되고 첨단 과학으로 달에, 화성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지구의 바깥으로 나가 파란 공 같은 지구를 보는 시대임에도 그들이 과연 그 엄청난 지식과 과학으로 제대로 마름질된 옷을 만들어 찬란한 완성을 이루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한참 멀었다, 아니, 삐뚤어져 문제가 여기저기 터지기 시작한 봇물을 보는 듯 위태로울 뿐이다. 과학은, 기술은 발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생활의 편리와 눈에 보이는 진보는 가져왔을지 몰라도 사람의 인성을 다스리는 법을 매뉴얼에 탑재하지 못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게 생기는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문제를 어떻게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감안하여 설계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소설가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은 SF소설에서부터 SF영화들 속에 그것에서 오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예언이라도 하듯 그저 과학과 기술과 지식의 발전만으로 그것을 어떻게 마름질하여 제대로 된 옷을 만들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부작용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그 내용이 뭐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인문학 열풍이 불어왔다. 정작, 마케팅의 상품으로 내용이 아무것도 없는 허접한 서적부터, 방송가에서 적당히 지식을 포장이나 하는 전공자도 아닌 ‘강연’이라는 연기에 익숙한 꼭두각시들을 불러 시청률 장사를 하지 않나,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외부활동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 어떻게 정치 쪽이나 엔터 쪽으로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연기형 교수라는 자들을 불러댄다.
그렇게 해서 그 프로그램을 보고, 그들의 재미있고 화려한 연기를 본 사람들이 인문학에 눈을 뜨고 그렇게 해서 세상이 많이 나아졌나? 정말 그러한가?
곡학아세(曲學阿世)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만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아니고?
한 사회, 그리고 그 시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뒷받침해줘야 한다. 그중에서도 동양적 관점의 인문학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윗세대의 경험과 노하우가 아랫세대에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앞서 ‘위정편’에서 배웠다. 바로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 옛 것을 배워 새 것을 안다)’이 그것이다.
이것을 시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장로(長老)’라는 존재이다.
여기서 ‘장로(長老)’라 함은, 공자 같은 훌륭한 스승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평생에 걸친 경험과 노하우를 일깨워줄 수 있는 사회적 어른을 의미한다.
회사에서 명퇴를 당했거나 그저 공부와 수양 없이 나이만 채운 이들이 착각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장로(長老)’는 그저 나이 먹은 선배 뻘의 어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공부하고 수양하지도 않고 그저 나이만 먹어 자리만 채우다가 회사에 비참하게 짤려 오도 갈데없는 이는 나이만 먹었을 뿐이지, 위에 공자가 걱정했던 노나라의 젊은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니, 노나라의 젊은이들은 공부라도 해서 지식이라도 갖춘 기본 소양이라도 있었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먹고살려고 생각 없이 세월을 보내버린 나이 먹은 젊은이는 어디에 쓸만한 소양조차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젊디 젊은 생각 없고 꿈 없는 생계형 늙은이를 양산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 이야기까지 지금 이 장에 담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장로(長老)’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
대표적으로 정치계에는 ‘장로(長老)’라고 하여 나름 윗세대의 정치인들을 존경하는 냥(?) 큰일이 있을 때, 기자들을 잔뜩 불러 찾아뵙거나 하는 식의 요식행위를 하고는 한다. 3김시대에 이어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무리에서 일컫는 윗세대 어른들이 그러하였고, 최근까지도 무슨 일만 있으면 비상위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만들어 위원장 격으로 얼굴마담을 시키는 여든이 넘은 이가 그러한 것이라고 정계에서는 부른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장로(長老)’인가?
나는 그들이 정말로 우리 정계의,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 불릴만한 ‘장로(長老)’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이 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자가 칠순을 바라보며 고국에 돌아와 자신의 여생을 제대로 된 젊은이들의 방향을 제시하는 교육을 펼치겠다고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통해 정권에 뭔가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사리사욕이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른 소리를 듣는 그들의 행보를 보면, 끊임없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존재가 홀대받거나 지워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비상위 위원장직은 여당과 야당 폴짝폴짝 뛰어가며 경박하게 1회용으로 쓰이는 자의 행보를 보면, 과연 그가 그렇게 적지 않은 세월 양쪽을 오가면서 정작 제대로 된 방향 제시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해 놓고서는 자신을 부르면 그 당이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둥, 망령 들린 마케팅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참으로 한심스럽고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과연 그가 제시하는 것이 도박의 승률을 높여주는 도박사 역할인 것인지, 사회를 악화에서 양화로 구축하기 위한 시대가 나아갈 바를 비춰주는 ‘장로(長老)’의 역할인지를 누가 헷갈려한단 말인가?
크게 볼 필요도 없다. 당신 주변을 보라.
‘꼰대’는 말은 정작 윗세대가 만든 것이 아니다. 아랫세대가 자신들에게 거슬리는 말을 해대는, 전혀 관심도 없는 가르침을 내놓겠다는 윗 세대에 대한 비아냥을 섞은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나이를 먹을 텐데, 그들은 꼰대의 위치가 되어 버리면 그렇지 않게 되나? 아니다. 묘하게 그것은 다시 반복되고 계승되는 모양새를 보였다.
왜 그리 되었는가?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누군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바른 어르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꼰대라고 욕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고개를 돌리고 따르기 마련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사람은 똑같다. 특히나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고, 제대로 된 어른을 만나본 적 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장로(長老)’의 등장과 만남은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을 흔들기 마련이다.
그런 존재가, 그런 가르침이, 그런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다. 부모 자식 간에도 귀찮은 잔소리에 맨날 하는 소리 또 한다고 손사래를 치고 위에 이어폰을 꽂아버리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인가?
그저 과외비 대주고, 용돈 쥐어주는 것이 부모의 노릇이라면, 내 아이가 무슨 음악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고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입고 먹을 돈만 대주는 부모라면, 좋은 사료 먹이고 똥 잘 치워 깨끗한 우리를 조성해주는 짐승을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나마 돼지와 소는 사료를 가져다주면 좋다고 꼬리를 흔들고 주인과 눈을 마주치면 사랑의 시선을 보내온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이 벌어온 돈으로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그 돈으로 전자담배를 사서 피우며 당신에게 사랑의 시선을 보내오던가?
결혼한답시고 너무도 당연히 부모가 전세자금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는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게 과연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식이라고 당신이 어디에 나가서 말할 수 있겠는가?
맞다. 모두 당신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워서 이리 만든 일이다.
부모가 빨리 재산을 안 물려준다고, 형이나 언니만 예뻐하고 자신에게 덜 물려준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칼부림하는 자식이 생기는 것은, 그들의 인성이 삐뚤어졌기 때문이 맞지만 그것은 그렇게 큰 그들의 잘못 이전에, 말도 배우기 전부터 당연히 가르쳤어야 할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의 탓인 것이다.
왜 그것을 정규 교육장인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헛소리를 할 것인가?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당신이, 바로 당신이 시작해야 하고, 당신이 시작하고 나면, 제대로 그렇게 배운 자식은 당신의 가르침에 눈을 떠, 당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더 제대로 된 선생님을 찾으려 들 것이다. 그렇게까지 바탕을 만드는 것이야말로,부모의 역할이고 책무인 것이다.
그것이 공자가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친, 당신이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 추상적인,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실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