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顔回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막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顔回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顔回여!”
저 유명한 ‘단사표음(簞食瓢飮)’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게 된 장, 되시겠다. 이번 장의 주인공 안회(顔回)는 앞에서도 몇 번이나 등장했던 공자의 인정을 받은 최애 제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앞서 위정자였던 계강자(季康子)나 맹무백(孟武伯), 노애공(魯哀公)이 사람을 쓰기 위해 그 자질을 물어보는 대상에 안회(顔回)는 등장하지 않는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는 안회가 이미 죽은 이후였기 때문이다.
안회(顔回)
앞서 몇 번이나 설명한 바와 같이, 안회(顔回)는 공자보다 30살이 적었으며, 29세에 머리가 희어졌고 32세에 죽었다고 전한다. 공자가 59세에 안연은 머리가 희어지고 62세에 죽었다는 사실관계가 확인된다. 공자가 56세에 대사구(大司寇)가 되었고 계환자의 견제를 받아 노(魯) 나라를 떠났으며, 66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러면 안회가 저잣거리에서 단사표음(簞食瓢飮)했다고 추정되는 시기는 공자와 같이 진(陳) 나라와 채(蔡) 나라에 머물렀던 시기라고 추정된다.
주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顔子의 가난함이 이와 같았으나, 처하기를 태연히 하여 그 즐거움을 해치지 않았으므로, 부자께서, “어질다, 顔回여!”라고 거듭 말씀하여 깊이 감탄하고 아름답게 여기신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이제까지 당신이 알고 있던 내용과 현대의 학자들이 숱하게 언급된 ‘가난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겼다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내용은 다음 정자(伊川)의 주석에서 조금씩 이 장에서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안자(顔子)의 즐거움은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음료 및 누추한 시골을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가난으로 그 마음을 얽매어 그 즐거움을 변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그 어짊을 칭찬하신 것이다.”
인간의 본성상 어느 누구도 일부러 가난한 생활을 선호하진 않는다. 그래서 단사표음은 현대의 곡학아세 하는, 유학을, 그리고 공자를 일반인의 생각과 유리된 특별하고 범인(凡人)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저 먼 곳의 형태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시골에 내려가서 아무도 없는 산에 자가 격리의 형태로 자연인이 되는 것이 좋아서 한다는, 청빈한 생활을 강조하는 것으로 포장되고 만 것이다.
아니다.
부러 가난한 생활을 즐겨하고, 누추하게 지내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생활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안회(顔回)는 무엇을 즐겼다는 것인가? 그래서 정자의 추가 설명은 계속된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 및 누추한 시골이 즐거워할 만한 것이 아니요, 별도로 그 즐거움이 있는 것이니, ‘其’ 자를 마땅히 완미 하여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깊은 뜻이 있다.”
드디어 실마리가 나왔다. 정자는 원문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글자, 너무도 흔해서 그저 스쳐 지났던, ‘그 즐거움’에서 ‘그’라고 해석된 ‘其’ 자에 주목해서 그 뜻을 온전히 새겨야 한다고 콕 집어준다. 그렇다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정자의 설명은 이어진다.
“옛날 周茂叔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에, 매양 공자와 안자(顔子)의 즐거워한 것을 찾게 하셨으니, 그 즐거워함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앗! 여기서 정자의 주석이 끝나버린다. 그 즐거움이 뭐냐는 질문으로 끝난다. 원문도 아닌, 주석이다.
주석은 해설이다. 그런데 해설이 화두만 던져주고(물론 앞에 힌트는 다 줬다.) 설명이 없이 끝나버린다. 현대적 기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파격이다.
아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현대에 새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방식은 파격도 아니고 공식화된 배우는 자들의 가르침의 방식에 다름 아니다. 못 믿겠는가? 그래서 이 주석의 말미에 주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생각을 해설로 덧붙인다.
내가 생각건대, 정자(程子)의 말씀은 활시위를 당기기만 하고(문제만 제기해 주고) 쏘지 않았으니, 이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지금 나 역시 감히 함부로 설명할 수 없다. 배우는 사람들이 다만 博文·約禮의 가르침에 종사하여, 그만두고자 하여도 그만둘 수 없어 자신의 재능을 다하는 데 이른다면, 거의 터득함이 있을 것이다.
모두 말해주는 것이 결코 좋은 가르침이 아니며, 그렇게 다 건네준다고 한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천 년 전에 이미 다양한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을 통해 선현들은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공부하여 마지막을 스스로 깨치지 않고서는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공부한 이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나 역시 모두 풀어 설명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편이니 요즘 말로 약간의 스포를 풀자면, ‘그 즐거움’은 가난하여 풍족하게 쓸 돈이 없고, 번듯하게 살 집이 없어도 그저 배 주리지 않고,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해칠 수 없는 지극하게 순수한 즐거움으로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세속적인 즐거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돈이 풍족해야 ‘살 수 있는’ 즐거움이다.
돈이 넉넉해서 풍광이 좋은 별장이나 리조트에 묵고, 그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 레스토랑에 가서 산지의 맛을 즐기려면 넉넉한 돈이 필요하다.
그곳까지 갈 때도 기차를 타고나 버스를 타는 것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내가 운전하지 않고 기사가 최고급 외제차에 운전을 해주거나 비행기를 타고 그 근처 공항에 내리면 또 차를 가지고 현지의 기사가 나를 배웅하려면 더더욱 그러하다.
1945년산 로마네-콩띠, 한 병에 6억원.
서민들이 먹는 에탄올 맛 나는 소주는 인간이 먹을 것이 못된다며 유럽에서 건너온 몇 년 산인지를 따져가며 먹는 술이 필요하고, 그 술에 맞는 수준 있는 안주도 모두 돈이 상당히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머니머니 해도 머니가 최고여~”
이런 세속적인 즐거움이 즐거움이 아니라고,
구토가 나온다고 비난만 할 것은 아니다.
공자를 비롯하여 공부하는 이들이 이 즐거움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구도자나 종교 수행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 세속적인 즐거움을 능가하는, 심지어 물질적인 돈으로 사지 않아도 되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으로는 결코 살 수가 없는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 지극한 즐거움에 빠지게 되면 차원이 다른, 한 단계 아니 수십 단계 낮은 인간의 세속적인 즐거움은 까맣게 잊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 즐거움에 빠지게 되면 안회가 보였던 것처럼, 적당히 배고픔만 해결하고 적당히 누울 수 있는 공간만 있다면, 굳이 그것이 ‘그 즐거움’을 누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바로 이 장의 온전한 해석이고, 가르침이다.
오래지 않은 옛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외국에 나왔던 미국 종교인 친구를 사귀게 된 일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치던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미국 본부에 속해 있던 친구였다. 아내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왔던 그는, 아주 우연히 내가 글을 쓰고 있는데 곁에서 짧지 않은 시간 나를 관찰했다며 말을 걸어왔었다.
가벼운 사교적인 대화 끝에 그가 자신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밝혔을 때, 나는 한국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본 적이 없고, 그거 그 ‘악명’만을 들어왔던 터라, 그가 그 흔한 선교활동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생각했었다. 물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저 선입견만으로 그들을 폄하하는 짓은 공부하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기에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그가 그 나라에 체류하는 짧지 않은 시간, 그와 상당히 많은 대화와 친분을 나눴더랬다. 그는 내가 사는 곳에 살만큼 자신에게는 돈이 없지만, 본부에서 지원을 해줘서 비싼 숙소에 올 수 있었다면서 나와 만난 것을 운명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매일 글을 읽고 쓰던 내게, 자기네 미국 본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거의 같은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는 동양인은 처음 본다는 말을 했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 그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먹는 건 에너지가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먹긴 하지만, 그닥 먹는 것에 식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한창 공부하던 10대 말부터는 먹지 않고 살면 안 되나를 고민했을 정도로 먹는 행위가 굳이 필요한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뉴욕 브룩클린에 있는 본부, watchtower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의 본부에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거나 할 수 있었던 이들이 침대와 책상만 있는 공간에서 본부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먹으며 재능봉사에 해당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선발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질이 그 어느 집단의 것보다 높다는 연구결과를 언뜻 보여주었었다.
자신도 그곳에 선발되고 싶지만, 자신은 아쉽게도 선발되지 못하여 계속 지원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그의 눈에, 내가 그들처럼, 혹은 중세의 수도승처럼 보였단다. 물론 다른 의미에서 같은 침대를 쓰는 분이 나를 ‘보즈[일본어로 스님]’라고 비아냥거리는 별명으로 부르기는 하지만, 그의 눈에 어떻게 보였길래 그런 생각을 했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그도 알았고, 나도 그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입시지옥이 명확하게 시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공부가 좋아서 하냐고 물으면 돌을 맞기 십상이다. 하지만, 공부가 좋아서 하는 애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만큼 인간에게 매혹적인 것은 없다. 자신이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활용해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내는 것은 묘한 마력을 갖는다.
데이빗 헷프갓의 실화를 다룬 영화, <샤인>
그렇게 피아노 건반이 싫다고 연습하지 않던 아이가 조금씩 손이 돌아가고, 음감을 느끼면서 곡이 완성되는 과정을 겪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대로 피아노를 치려고 연습을 한다.
20대를 마치기 전에 수학 이론을 연구하여 천재 소리를 듣는 이들에게 왜 돈도 안 되는 수학을 공부하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돈도 되지 않는 물리학을 왜 공부하냐고 물리학자에게 질문하는 것은 우문이다.
당신을 비롯한 대부분이 공부는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고 좋은 대학을 가서 돈을 많이 벌고 기어 올라가기 위해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이 ‘모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신에게도 분명히 그런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처음 퍼즐을 맞출 때, 퍼즐을 맞추는 것이 놀이도 아니고, 그 수많은 퍼즐을 맞춘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맞춰가면서 그림이 완성되는 즐거움에 완전히 다 맞춰져 본래의 그림을 갖추는 것을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목이 굳어버린 것도 모르고 한참을 앉아 그것을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던 파란 눈의 사랑이 도대체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지를 알고 싶어 사전을 뒤적이고 그 나라 말을 배우고 그 파란 눈의 사랑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고,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들이 당신에게도 있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 즐거움’은 당신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즐거움을 위해 버릴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어느 사이엔가 당신이 잊고 있었지만 당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에게는 본래 ‘그 즐거움’에 빠졌던,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 즐거움’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를 수는 있지만, 그 원천은 같다.
내가 원하는, 내가 빠져들어, 내가 하고 싶어, 내가 선택한, 온전히 내가 주가 되어 결정하고 주도했던 것들이다. 남이 하라고 해서, 사회에서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 뒤지고 싶지 않아서 했던 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들이란 말이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되는 공부는,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들이 완성되어 실천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당신의 살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당신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도 많겠으나, 당신이 알고 있었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놓쳐버리는 경우도 많다. 당신이 가지고 있음에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잃은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