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이에게 어떻게 위로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제자에게 스승이 보이는 자세

by 발검무적
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백우(伯牛)가 병을 앓자, 공자께서 문병하실 적에, 남쪽 창문으로부터 그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천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염경(冉耕)의 초상

백우(伯牛)는, 앞서 언급했던 공자의 문하에 제자로 모두 들어간 염 씨 삼 형제 중에서 맏형인 ‘염백우(冉伯牛)’ 혹은 ‘염자(冉子)’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름은 염경(冉耕)이고 자(字)가 백우(伯牛)이다. 공자의 주유(周遊) 시 공자를 따른 제자들 중 벼슬을 하지 못한 제자 10명을 덕행, 언어, 정사, 문학으로 4 과로 분류하여 잘하는 부분을 각각 언급하는데, 이를 후세에는 ‘공문(孔門)의 4과 10 철(四科十哲)’이라 한다. 그중 덕행에서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뛰어났다고 분류된다.

일찍이 공자가 노나라 중도재(中都宰)라는 지방관을 거쳐 사공(司空, 재상)이 되었을 때 뒤를 이어 중도재로 임명되었고, 공자가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할 때 그를 수행했는데 젊은 나이에 한센병(추정)에 걸려 요절하게 된다. 그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공자가 문병을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바로 이 장이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해설한 내용부터 살펴보자.

예에 “병자는 북쪽 창문 아래에 있는데, 임금이 문병하러 오면 남쪽 창 아래로 옮겨서 임금으로 하여금 남쪽을 향하여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하였다. 당시 伯牛의 집에서 이 예로써 공자를 높이자, 공자는 감히 감당할 수 없으므로, 그 방에 들어가지 않고, 창으로부터 그의 손을 잡으셨으니, 이는 아마도 그와 영원한 이별을 하신 듯하다. 命은 천명을 말한다.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지금 곧 걸렸으니, 이는 곧 하늘이 명한 것이로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병을 삼가지 못해 병에 걸린 것이 아님을 또한 알 수 있다.

왜 하필이면 남쪽의 창에서 손을 잡고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혹시 병이 옮을 것을 우려하여 그렇게 한 것인지 등등의 의아함을 풀어주는 설명이 먼저이다. 임금의 예로 스승 공자를 맞이하자, 그것이 예가 아니라고 공자가 감히 그 방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만약 전염병을 우려했다면 손을 잡고서 그렇게 안타까움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 병이 걸린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당시 한센병이 걸리는 원인 중에서 방탕하게 주색잡기를 좋아하거나 가지 못할 곳을 가서 병을 얻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 병이 걸린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하려고 설명한 것이다.

염경(冉耕)의 초상화

특별한 행간의 의미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 요절하게 된 제자를 문병하는 스승의 애절함이 담긴 장이다. 그래서 侯氏(侯仲良)는 이 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伯牛는 덕행으로 알려져 안자(顏子)와 민자(閔子) 다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장차 죽으려 하자 공자께서 더욱 애통해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장이 그저 단순한 병문안이라고 보고 넘길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먼저 상황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자의 설명처럼 자신이 방탕하게 아무렇게나 생활해서 걸린 병은 아니었지만, 한센병(문둥병)은 당시로서는 심각한 전염병이었다.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꺼리는 전염병이 위중해지던 염백우는 이른바, 시한부 인생으로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스승마저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다고 좌절하고 있을 그즈음에 스승이 자신을 찾았다.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감히 스승에게 자신의 병이 옮기게 될까 싶어 조심스럽고, 자신의 위중한 흉한 꼴을 보이는 것도 꺼려졌다. 임금을 모시는 최상의 예를 갖춰 모시려고 하자, 예가 아니라면 결코 행하지 않는 스승의 옹고집답게 창을 통해 스승이 다가왔다.


전염병이기 때문에 접촉은 당연히 굉장히 위험한 시도라고 여겨 금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스승은 아끼던 제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후대의 몇몇 학자의 학설에 의하면, 원문의 ‘亡之’가 한의학에서 말하는 맥을 잡는 행위에서 비롯되어 ‘맥이 없구나’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긴 하다. 즉, 일부러 손목을 잡아당겨 맥을 잡아 봤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손을 덥석 잡은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애통해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은, 애통해하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라고 말하며 대명사를 두 번이나 쓰면서 강조하며 ‘천명’을 언급한다. 주자의 해석에서 아까 살펴보았던 난잡한 행동을 하고 다닌 사람들이 주로 한센병에 걸렸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변명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뜻을 더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그런 몹쓸 짓을 하고 다니는 이들이 걸리는 병을 왜 이렇게 덕행과 효행이 훌륭한 이가 걸렸다는 것인지 말도 안 된다고 한탄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두 번의 대명사를 쓴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아닌, 정작 이런 천벌을 받아야 할 이들은 버젓이 천수를 누리고 있음을 한탄하는 의미를 동시에 담아낸 말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말함과 동시에 체념으로 天命(하늘의 뜻)을 언급한 것이다.


하늘이 그렇게 정한 운명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제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위로로 전해줌에 다름 아니다. 천명으로 알고 겸허히 수용하라는 최상의 위로에 다름 아니다.


대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슬픈 영화에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울고불고 대성통곡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결코 부러 슬픔을 강조하지 않는다. 순애보나 사람이 죽어 슬픈 영화는 절대로 슬픈 장면이나 오열하는 모습을 넣지 않는다.

영화 <A.I.>중에서

그저 그 죽음을 그래서 슬픈 사람들이 슬픔을 이기고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만을 조용히 조응할 뿐이다. 슬픔은 영상이나 이야기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는 관객이 오롯이 감정을 그대로 담고서 느껴야 하는 것이다. 즉, 슬픔은 카메라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밖으로 자연스레 배어 나와 관객의 가슴에서 흘러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와 수양을 통해 감정에 대한 공부를 하지 못한 자에게는 만들지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것을 공부나 수양을 통해 모르는 이들도 느끼는 것은 똑같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죽음을 앞둔 애제자의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안아주는 감정이 이 장의 처음과 끝에는 가득하다. 그저 제자를 만나 문병한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감정이 읽는 이의 가슴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세상을 떠나는 자에게는 물론 남겨지는 자에게도 크나큰 고통이다. 단순한 이별도 슬픈진대 영원한 이별이 슬프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인간은 언제고 그 영원한 이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천명(天命)을 알고 있다. 배우지 않고 경험하지 않았지만 자연의 섭리이기에 알 수밖에 없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해서 아픔이 줄어들거나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서 기다린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그 죽음을 겸허히 맞고 더 아파하지 말라고 제자를 부둥켜안는다. 네 잘못이 아니고 네가 그렇게 죽을 위인이 아닌데, 하늘이 이리 빨리 데려가는 것에 대한 제자의 하늘에 대한 원망을 자신이 더 크게 하는 것이다. 화를 낼 일이 있어도 내 옆의 사람이 더 크게 화를 내면 내가 화를 내기가 무안해지기 마련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 중에서...

그렇게 염백우는 스승의 최상의 위로와 가르침을 그날 받았고 스승과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정말 착하고 능력 있고,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이들이 하늘의 부름을 받아 요절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게 된다. 온갖 몹쓸 짓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천수를 누리는 일은 수천 년 전 중국에도 있었다. <논어>를 읽으면서 <장자>를 언급할 것은 아니지만, 도척(盜跖) 같은 도둑놈은 천수(天壽)를 누리고 백이숙제는 단명하는 일이 현실에서는 일어난다. 일반인들은 왜 하늘이 이리 공평하지 않느냐고 분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공자가 말하지 않는가? 천명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라고. 누군가의 말처럼 하늘에서 더 큰 쓰임을 갖기 위해 먼저 데려가는지 현생을 사는 사람이 이해할 도리는 없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한정된 삶으로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예정이 있다면 시한부 인생이란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긴가 짧은가의 차이만 있을 뿐, 영생하는 인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시한부라는 것은 한정된 삶이기에 더 그 삶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삶에서 어느 하루 방탕하게 흘려보내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냈던 오늘은 어제 죽어가던 자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내일 아닌가 말이다. 하루를 살아도 올바른 생각으로 올바른 마음가짐을 다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나, 하루만 그렇게 살면,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 당신의 일생을 이루기 마련이다.


당신의 하루가, 곧 당신의 평생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이 장을 통해 깨우칠 수 있었으면 하는, 내 바람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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