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 주나? 아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다.

배워서 남 주겠다며 명예를 탐하는 이들에 대한 일갈

by 발검무적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공자께서 자하(子夏)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의 학자가 되고 소인의 학자가 되지 말라.”
자하(子夏)의 초상화

이번 장의 등장인물은 자하(子夏), 즉, 복상(卜商)입니다. 공자보다 약 44세 어렸으며, 자유(子遊, 言偃)와 함께 문학(文學)에 뛰어나다고 스승의 인정을 받았던 제자였다. 앞서 공부했던 <논어>의 첫 번째 편에 해당하는 ‘학이편’에서 주로 시의 해석을 함께 논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인정받는 대목에서 등장한 제자이다.


뒤에 배울 ‘선진 편’에서는 그 유명한 ‘過猶不及’(과유불급)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제법 유명한 인물이라 하겠다.

이후에, 자하(子夏)는 거보(莒父)의 재(宰)가 되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묻는데, 공자는 ‘無欲速, 無見小利.(빨리 하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려 하지 마라.)’라는 충고를 해 준다. 자하(子夏)는 스승 공자가 죽자, 서하(西河)에 살면서 위문후(衛文侯)의 사(師)가 되고, 아들이 먼저 죽자 너무 울어서 그 슬픔에 마음이 심하게 상해, 눈이 멀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欲速不達

이 장(章)은 짧다. 이 말을 하면, 이제 눈치 좀 채라. 맞다. <논어>는 그 내용이 길수록 파악이 쉽고, 짧을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행간이 포진되어 있다 하였다. 이 장은, 얼핏 보기에 아주 간단하게 스승인 공자가 자하(子夏)를 훈계하는 내용이다.

먼저 정자(伊川)가 이 장의 의미를 어떻게 풀어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君子의 학자는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요, 小人의 학자는 남을 위하여 즉, 남에게 명예를 얻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다.”

이 주석의 해설 내용은 정자의 오리지널 버전이 아니다. 뒤에 배울 ‘헌문(憲問) 편’ 25장에 보이는 ‘옛날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하였는데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라고 한 공자의 말씀으로, 이 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뒤의 상세히 풀어지는 형태인 것을 알고 정자가 끌어와 풀어 해석한 것이다.

자아, 왜 이 장이 어려운지 하나씩 알아보자. 먼저 훈계하는 대상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왜 자하가 이 훈계를 듣게 되었는지 어떠한 설명이나 상황이 없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또 있다.

바로 ‘儒(유, 선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늘 그렇듯 주자 집주에 근거하여 ‘학자’라고 뜻을 새겼다. 그런데 여기에도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儒(유)’가 된다는 것은 士나 大夫가 되지 않고, 학당에서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학자(學者)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치를 도모하는 일을 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라는 것으로 특정된다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논어>를 통해서 본 자하는 스승 공자에게 문학(文學)에 뛰어나다는 허여(인정)는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비교에 대상으로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워낙 그쪽에 재질이 있었기에 儒(유)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거나, 아니면, 가르쳐 보니 워낙 미치지 못하여(不及)하여 政治(정치)나 벼슬을 하기에는 적정치 않다고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자아, 이제 한눈에 간단하던 짧은 문장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나? 그렇다면 이제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보자. 사씨(謝良佐)는 이 고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더해준다.


“군자와 소인의 분별은 義와 利의 사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利라는 것이 어찌 반드시 재화(財貨)를 증식하는 것만을 말함이겠는가? 私慾으로 공정함을 없애버리고 자신에게만 맞게 하여 스스로만 편하게 하여 무릇 天理를 해칠 수 있는 것은 모두 利이다. 자하(子夏)의 문학은 비록 넉넉함이 있었으나, 생각하건대 그 위대한 것에 대해서는 혹 모른 듯하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군자와 소인으로 구별했다는 것은 나아갈 바와 하지 말아야 할 바를 명확하게 구분할 경우에 사용한다고 공부한 바 있다. 그런데 그 구별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소인들이 추구하는 利(‘이익’이라 번역하지 않고 한자어를 쓴 이유는 뜻을 한정 짓지 않고 개념어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에 대한 개념을 짧지만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재화(財貨)의 이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욕심으로 공정함을 상하게 하고 자신만 편하겠다고 하는 것 모두를 利라고 설명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지양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설명한 후, 왜 스승 공자가 자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미루어 설명해준다. 상황이나 에피소드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다 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어법이 갖는 포인트를 짚어낸 자만이 할 수 있는 해석이다. 문학에는 일정 경지에 올랐다고 했던 자하(子夏)였음에도 이 차이와 분별에 대한 개념을 지엽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을 넓혀주기 위해 스승이 가르침을 내렸다는 것이다.


아! 멋지지 않은가? 성인의 말씀에 주석을 달 수준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공부와 수양이 되어야 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공부만 하고 행간을 아무리 잘 읽어내도 수양으로 이어져 실천으로 행해지고 직접 시행착오를 통해 수양이 완성되어야 현실 적용 능력이라는 것이 생긴다. 그것이 책으로만 세상 공부를 한 자와 공부로 다져지고 충분한 사고를 통해 실천과 현실에 적용을 하여 수양한 자의 차이이다.

공자는 공부로 일가를 이룬 자하에게 그것이 앞으로 나아갈 문을 열어만 준 것이다. 이것으로 앞서 ‘儒(유, 선비)’에 대한 해석과, 왜 자하에게 이 가르침을 주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해소된다.


학문을 하는 목적이 정치에 쓰이기 위함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서부터, 그 학문으로 정치에 직접 쓰이든 아니면 후학들을 양성하든 그것이 군자의 의(義)에 의한 의(義)를 위한 것이어야지, 결코 소인을 위한, 남에게 인정받고 간택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자신의 편리를 위한 것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저 짧은 문장 안에 모두 담아낸 것이다.


‘배워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다. 배워두면 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 배운 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장의 의미에서 보면, 배우는 것은 나의 지식을 고양하고 내 인격을 도야하고 나를 완성시키기 위함이 그 말이 참으로 옳다.


그런데 배워서 남 주겠다고, 즉, 남의 눈에 들어서 그 명예를 얻겠다고 하는 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은 연기를 공부한 자가, 갑자기 입시학원 선생으로 돈을 좀 벌었다고 인문학과 역사를 강의한다고 진실을 왜곡하고 그저 돈벌이로 사용하다가 철퇴를 맞는 일이 있었다. 그가 담긴 포장지로 담긴 만화책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방송에서 퇴출된 그의 처지와 상관없이 출판사의 젖과 꿀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한 가지이다. 만화로라도 역사에 관심을 갖는 그 또래의 아이들 엄마들이 그가 굳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어찌 되었든 자기 자식이 만화책이긴 하지만 싸우고 죽이는 만화책도 아니고 역사 관련 만화책을 보니 상관하지 않고 지속적인 구매를 하기 때문이란다.


도덕적이지 않은 자가 가르치는 지식이 더러운 지식이라고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군국주의 일본이 정치를 잘못한 것이지, 그들 때문에 원자폭탄을 자기 집에서 맞아야 했던 불쌍한 일본 국민들 전체가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알량한 포장지로 이익을 보겠다고 했던 출판사와 편집자들의 얄팍한 상술이 출판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학계에서 국사학이나 서양사학을 가르치는 교수 입네 하는 자들이 더 훌륭하다는 논리는 더더욱 위험하고 말도 안 된다. 그곳에서 삐뚤어진 곡학아세 하는 이들이 더 많이 나왔고,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만한 이들은 다 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래서 공부하는 거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나?

천사와 악마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은, 얄팍한 짜깁기 신학 사이비들에게도 쉽게 넘어가기 마련이다. 최근 넷플릭스의 기록을 다시 쓰고 있다는 <지옥>을 보면, 그저 초자연적인 현상을 먼저 알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자신들의 힘인 양 사이비교를 세워 우민들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만약 그 현상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공부하고 알았다면, 그것들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이다. 내가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보와 지식이 1차적으로 탑재되어야 한다.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재보고 판단하고 검증한 후, 내 생각과 기준을 올바로 세우게 되면, 어쭙잖은 선동과 꼬드김에 두리번거리지 않게 된다.

아주 간단한 논리이다.

썩을 대로 썩어 곪아 터진 정치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대해서, 그 처와 장모에 대해서, 그 당에 대해서, 그 놈들에 대해서 잘 알고 파악하고 있으면 판단이 쉬워진다. 정보가 부족하고 공부하려 하지 않고 그저 판단하려고 하니 기준도 없고 헷갈리기만 하고 그렇게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고 물어오는 것은 그나마 기특하기라도 하다.

그저 막연히, '공부를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에 물어오는 진심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말한다. "좋은 건 아는데, 고전도 읽고, 신문도 읽고 공부도 하면 좋은데 그게 먹고살자니 잘 안됩니다. "라고 적당히 또 넘어가고 그뿐이다.


묻자.

그렇게 먹고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 물어본 적은 있던가?

그 옛날 영어단어를 외우겠다고 사전을 한 장씩 외우고 먹던 시절이 있었다. 즉, 그나마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찾아보는 수준이 아니라, 그 찾아보는 사전을 모두 외워서라도 아니, 염소처럼 먹어서라도 내가 모르는 단어가 없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의 당신은 모르는 것이 나왔을 때, 정확하지 않아 확신이 가지 않을 때, 그저 편하게 그놈의 초록창을 찾고, 너튜브를 찾는 것으로 당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가?


당신이 모르는 것을 알겠다고 사전을 찾고, 책을 찾던 어린 시절 당신의 그 순수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세상이 편해졌다고 편해진 세상을 왜 그리 어렵게 사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달나라에 로켓을 쏘고, 화성에 가서 살겠다는 세상에도 사람은, 그걸 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 사람의 머리는 오히려 더 단순무식화되어가고 있는데도, 기술의 발전만 저 위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가? 기술의 발전이 사람의 사고가 발전했다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언제쯤 깨닫고 책을 손에 쥘 것인가?

누구나 똑같이 밥 먹고 누구나 똑같이 싸고 자고 하는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당신의 삶이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짐승들과 분별이 없어지는 지경까지 끌어내리지 마라.


그리고 손톱만큼 배웠답시고 그것으로 남의 눈에 들어 너와 네 가족만 편하겠다고 利를 취하는 짓을 하지 마라. 너의 자식이, 너희 후손이 그대로 악을 답습하고 이 사회를, 이 나라를, 종국에는 이 지구를 멸망시킨다.


네가 타노스급 빌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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