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중용할 것인가?

딸랑거리며 선물 들고 오는 자들을 내 사람으로 두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by 발검무적
子游爲武城宰, 子曰: “女得人焉爾乎?” 曰: “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也.”
자유(子游)가 武城의 邑宰가 되었다. 공자께서 “너는 인물을 얻었느냐?”라고 묻자, 자유(子游)는 대답하였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자가 있는데, 길을 다닐 적에 지름길을 따르지 않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일찍이 저의 집에 이른 적이 없습니다.
자유(子游)의 초상

이번 장의 등장인물은 자유(子游)와 담대멸명(澹臺滅明)이다. 먼저, 자유(子游)는 이름이 언언(言偃)이라 하고, 오(吳) 나라 사람이며, 공자보다 45세가 적으며 본문에 언급된 것과 같이 노(魯) 나라의 읍(邑)인 무성(武城)의 재(宰)가 되는 인물이다. 앞에 하도 많이 나왔던 염 씨 삼 형제 중의 염구(冉求)의 자(字) 역시 ‘자유(子有)’인데 한자(漢字)가 분명히 다르니, 초심자들은 혼동하여 어디 가서 아는 척을 잘못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공자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성(武城)을 지나면서 언언(言偃)을 만나는데, 현을 타면서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께서 듣고서 빙그레 웃으면서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고 말하는 내용이 뒤에 배울 ‘양화(陽貨)편’에 나오는데, ‘조그마한 읍을 다스리면서 제후쯤이라야 행할 예악(禮樂)을 읍의 백성에게 가르치는가?’라고 격에 맞지 않은 것을 은근히 알려주는 내용이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초상

담대멸명(澹臺滅明)은, 성(姓)이 담대(澹臺)이고, 이름이 멸명(滅明)이며, 자(字)가 자우(子羽)라고 하고, 공자보다 39살이 어렸으며, 얼굴이 아주 못생긴 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무성(武城) 사람으로 자유(子游)가 무성재(武城宰)로 있을 때 등용한 사람으로, 이 장에서 보이다시피 자유(子游)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인연으로 공자의 제자가 입문하게 되는 인물이다.


담대멸명이 공자의 제자가 되었다가, 남쪽 지방으로 떠나 장강에 이르니 따르는 제자가 300명이 되고, 들고 물러남이 분명하여 그 명성이 제후들에게 자자하다는 소문을 스승이었던 공자가 듣게 된다. 그때 공자는, ‘말로써 사람을 취하다가 재여를 잃었고, 외형으로 사람을 취하였다가 子羽(담대멸명)를 잃었다.(吾以言取人, 失之宰予, 以貌取人, 失之子羽)’라는 말을 한다. 이것이 子羽(담대멸명)을 계속 제자로 거두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말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정확하게 어떤 의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의 장강 유역의 ‘담대호(澹臺湖)’란 호수가 있는데 그 명칭이 그를 추존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장의 상황은 이러하다.

작은 고을의 책임자로 일하는 제자 언언(言偃)을 격려도 할 겸 안부도 물을 겸 찾은 스승이 이 그에게 괜찮은 인물을 구했는지 물으니 언언(言偃)이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괜찮은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는 부분이다.


이 구조는 흔히 보이지 않는 구조인데, 스승의 질문은 두 가지를 모두 체크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정말로 괜찮은 사람을 얻었는지 안부를 묻는 것이고, 그 안에는 공부만 할 때와 실무 행정을 하게 되면서 사람을 구하는 눈과 기준을 제대로 제자가 갖추었는지 그 안목을 체크하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스승의 그 의도를 제자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을 함에 있어, 그저 대답하지 않고 구체적인 자신이 왜 그를 높게 평가하는지를 설명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평가는 짧고 간략하다. ‘그 사람은 절대 지름길로 걷지 않으며, 아직까지 공적인 일이 아니면 인사권자인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다.’는 말로 그 사람의 인격을 칭찬한다.


주자는 자유(子遊)의 평가가 갖는 행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지름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행동을 반드시 바르게 해서, 작은 것을 보고 빨리 하려고 하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으며, 공적인 일이 아닐 경우에는 邑宰를 만나보지 않는다면 그 스스로 지킴이 있어, 자기를 굽혀 남을 따르려는 사사로움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지름길로 가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갖는 복합적인 의미는 이 장에서 나온 것으로 흔히 말하는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의 의미와 같다. 뭔가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정도(正道)가 아닌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자신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집에 사사로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공적인 업무 해결 능력 이외의 개인적인 친분을 쌓거나 뇌물을 바치는 따위의 행위를 일절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행동만으로 그의 청렴결백하고 우직한 성향을 자유(子遊)의 판단기준으로 파악해낸 것이다.

그래서 양씨(楊氏)는 이러한 사소한 부분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그러한 판단 기준으로 사람을 들여 쓰는 자유(子遊)에 대한 안목을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정치를 하는 데에는 인물을 얻는 것이 최우선이므로, 공자께서 인물을 얻었느냐고 물은 것이다. 滅明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 일의 소소한 것을 보고서도 그 공명정대한 情을 알 수 있다. 후세에서는 지름길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우활(迂闊)하다고 할 것이요, 그의 집에 이르지 않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거만하다고 여길 것이니, 공씨(孔氏)의 문도(門徒)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것을 알아 취했겠는가?”

수천 년 전의 양 씨(楊氏)가 ‘후세’라고 말한 것이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해당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문장이다. 후세 사람들은 지름길을 따르지 않는 자를 보면 어리석도 아둔하다고 할 것이고, 상사의 집에 틈만 나면 선물을 들고 찾아가지 않으면 ‘뭐가 그리 잘났느냐’며 거만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것을 누가 수천 년 전에 한문으로 적은 문장이라 여기겠는가? 그런데 문장의 마무리는 화룡점정(畵龍點睛)에 다름 아니다. 공자에게서 배운 제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후세의 기준을 거부하고 제대로 된 기준으로 사람을 뽑았겠는가 하는 감탄으로 마친다.

그래서 주자는 이 모든 주석을 마무리하며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몸가짐을 멸명(滅明)으로 법을 삼는다면 구차하거나 천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요, 사람을 취하기를 자유(子遊)로 법을 삼는다면 간사하거나 아첨하는 자에게 혹함이 없을 것이다.”

평범하게 제자를 찾아 안부를 묻고 제자는 괜찮은 사람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이 대화가 주는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였다.


스스로 운신을 함에 있어서는 멸명의 처신을 모범으로 삼으면 되고, 사람을 쓰는 입장에 되었을 때는 자유(子遊)가 보여준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그 사람을 판단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이 글을 읽어 내려왔다면 그저 끄덕거리고 말 것이나, 다시 한번 스크롤을 올려 원문을 읽어봐라. 지름길을 택하려 가려하지 않고, 사적으로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사의 집에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하며 읽지 않았던가?

별생각 없이 보면, 다 옳은 말이고 다 그런 것 같은데, 자신의 행동과 이른바 일반인들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닫고 거기서 오는 위화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원래대로 일을 하면, 우직하게 모든 서류를 다 검토해야 하고, 원칙대로 테스트를 다 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우직, 아니, 단순 무식하고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고지식한 사람이라며 조직에서 소위 따를 시키기 일쑤이다.


그런 자들의 공통점은 그 우직한 이를 손가락질하며 세상사는 요령이 없다고 욕하고 비난하면서 상사에게 굽신거리며 명절 때마다 선물을 갖다 바치고, 공직에 있는 자들은, 김영란법에 적당히 걸리지 않는 범위에서 그 부인에게 선물을 하거나 뒤탈이 나지 않게 뇌물을 바치는 지름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자부한다.

당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그러한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여기면서도 <논어>를 읽을 때는 원래 그것이 정답인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앉아 있는가?


지금 공부하는 내용이 당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굳이 고상하게 지금 당신이 <논어>를 읽고 있다고 당신의 자아에게 있는 멋없는 멋 부릴 필요 없으니 그냥 젤 단순한 게임을 깔고서 게임을 누르던가 너튜브의 정신 나간 자들의 지껄임을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당신의 같잖은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읽는 고전이 아니다, <논어>는.


궁극적으로 인격을 도야하여 실제 생활에서 수양함을 실천하기 위한 공부가 원시 유학이 본래 강조하는 핵심이다.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뒤로는 별의별 지저분한 짓을 하며 유교라는 이름으로 양반의 탈을 만들어 쓴 조선시대의 성리학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란 말이다.

원칙대로 사는 것, 그런 사람을 중용하고 곁에 두는 것.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아는 것도 어렵지만, 옳은 것은 알겠는데 내가 그런 사람처럼 살다가는 진작에 왕따가 되어 조직에서 도태되어 버릴 것이고, 그런 사람을 인정하고 뽑다가는 나 역시 언제 팽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공부를 잘못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사는 거, 힘들고 녹록지 않다. 제대로 사는 것이 아무 힘도 들지 않고 누구나 편하고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고,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었다면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면서 목이 터져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외쳤을 리도 없고, 외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고, 아무도 하려 들지 않지만, 그것이 옳고, 옳은 방식으로 살아야 그 사람이, 그리고 그 사회가, 그리고 그 시대가 더 높은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고양할 수 있다는 것을 공부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차 얘기했지만 머리는 좋아서 배우고 어떤 것이 옳은지는 금방 아는 녀석들도 아는 것과는 별도로 자신의 영리를 위해 그 배운 것을 출세와 영달에만 쓰는 법비와 정치가들이 득시글거리는 것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아니, 시대가 발전했으니 지금이 훨씬 더 심하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당장, 당신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거나 감사권을 가지고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 당신은 어떤 사람을 들여 쓰고 어떤 사람을 내치는가? 당장 당신과 늘 밥 먹고 술 먹고 형님 동생 하는 사이의 사람을 들여 쓰지, 객관적으로 능력이 인정된 사람을 선뜻 선택하여 쓰려들지 않는다.

부정부패를 발견하고 당신의 측근이 옳지 않은 짓을 했을 때, 그것으로 영리를 취하며 술잔을 기울이며 그것이 노하우라고 당신에게 공범 프레임으로 둘러칠 때 당신은 그를 감사권자로서 단호하게 그의 목을 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이것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단 한번 이라도 있던가? 당신이 고작 했던 짓이라고는 그 자리에서는 썩소를 짓고 나와, ‘그래도 나는 저들과 똑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정도의 생각을 하는 것으로 그들과 구분된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는가 말이다.

경성제대의 교수들이 일류 교수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박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석사라도 맛을 본 이들은 왜 그런지 대강 안다.


무능한 교수는 자신보다 훌륭한 교수가 자신의 곁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무능한 것을 넘어 정치적 이욕(利慾)까지 있는 교수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어리석은 수족이 필요하지, 자신보다 뛰어나 자신의 부정부패를 꿰뚫는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교수를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대학의 총장직을 거쳐간 것들에게는 학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 것이다. 감옥에 가서 전직 대통령들과 잡곡밥 겸상을 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대한민국의 감사원이, 각 부서마다 있는 감찰부서가, 경찰서마다 있는 청문감사관실이, 매일같이 스쳐 지나가는 자기 동류들의 부정부패를, 언제 나에게 똑같은 작두칼이 내릴 줄 알고 사정(司正)의 칼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긴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면 검찰의 법비들은 뭘 가지고 또 협박을 할 것이며 딜을 할 것이냔 말이다.

역겹고 지겹고 넌더리 나지 않는가?

당신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가?

설마 당신의 자식에게 밥상머리 교육이랍시고, 적당히 티 나지 않게 공금은 손을 대고 된다고 하고, 공금에 손을 댈 때는 늘 주변에 같은 직위 혹은 바로 위의 상사를 공범을 만들어서 독박을 쓰지 말라고 가르치는가?

자식이 그런 짓 하고서 수갑 차고 콩밥 먹으러 가는 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부터 그러지 말 것이고, 그런 자를 들어 쓰지 말 것이며, 그런 자를 감찰하고 사정하여 돌을 솎아내야 밥을 먹으면서 어금니가 박살나버리는 일을 당하지 않을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러지 말자는 남의 소리에 앞서 당신이 공부를 통해, 수양을 통해 당신의 양심이 외치는, (물론 지금은 속삭이는 수준이겠으나) 소리를 듣고서 죽기 전에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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