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하셨어요? 제가 놓친 얘기는 없을 겁니다. 제가 오늘 새벽까지 이 자료를 정리해서 정 변호사에게 공부하라고 주고 갔으니까요.”
“아, 그러세요.”
“1심 판결이 말이 안 되는 이유와 갑작스럽게 돌변했으면 몰라도 장기간 성희롱임에도 불구하고 반대 증거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막 하던 중이었어요.”
정 변호사가 자신의 앞에 있던 자료들을 옌 변호사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렇죠. 교수님이 보내주신 자료를 보면서 정말 어이가 없는 부분이 너무 많더라구요.”
“죄송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박 교수의 도발적인 질문에 순간 정 변호사와 옌 변호사의 표정이 굳었다.
“네? 무슨?”
“혹시 한국인의 사건을 담당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저희는 외국인 사건도 맡은 적이 없습니다.”
옌 변호사가 스스럼없이 바로 대답했다. 박 교수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말을 이어나가지 않냐 옌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혐한 정서 때문에 이렇게까지 당하셨는데 저희가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하신 거죠?”
“네. 사실은 그렇습니다. 1심 변호사인 장 변호사도 처음엔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릴 것처럼 말했었는데 현실은 보시다시피 이렇거든요.”
박 교수가 1심 판결문을 가볍게 들었다가 탁자에 던지듯 떨구며 말했다.
“사실 저는 한국에 놀러 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한국 드라마 마니아세요. 매일같이 한국 드라마를 끼고 사시거든요. 그래서 저도 어제 새벽에서야 타이완 사람들이 한국인들에게 왜 그런 혐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지 자료들을 좀 찾아봤습니다. 특히 상대편 변호사의 뒤에 있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건의 배후인 거죠. 그 주영희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인터넷에서 뒤져서 자료를 좀 봤습니다. 자기 블로그도 운영 중이더라고요. 한국 욕으로 도배를 했더라구요, 하하하!”
이제 서른 중반 정도의 옌 변호사는 똘똘한 눈망울을 굴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국민들의 혐한 정서가 재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거나, 법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데 그렇게 판사의 왜곡된 판결이 나올 정도로 타이완이 썩은 나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썩어요? 하하하하! 맞네요. 그 표현이 정확하시네요.”
옌 변호사가 박 교수의 독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다 썩은 것만도 아닐 수 있습니다. 누가 2심 재판을 맡게 될지가 관건입니다.”
“네?”
“장 변호사에게 설명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 판사는 타이완의 썩어 있는 부분의 정점에 있는 여자예요. 그래서 법조계에서도 욕을 먹을 대로 먹으면서도 그들의 먹이사슬 관계에 있어 꼭 필요한 여자라서 그 자리에 있는 거구요. 그렇다고 재판을 포기하실 건 아니잖아요? 2심은 나이가 좀 있는 부장판사급이 맡게 되기 때문에 썩지 않은 판사가 맡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단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바꾸지 않아도 제대로만 봐줄 사람을 만나면 이 건은 이변이 없는 한 명확한 무고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마지막에 ‘무고’라는 말을 하며 옌 변호사가 단호하게 펜으로 1심 판결문을 꾸욱 찍어 눌러 보였다.
“후우. 오늘 가족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저 혼자 남게 되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조금 궁금한 몇 가지들이 저도 있고 정 변호사도 있으니 그 얘기를 먼저 좀 해볼까요?”
“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얼마든지.”
“이 연판장 말인데요. 외교대학교 학생들 100여 명이 교수님에 대해 부적절한 교수이니 해임을 요구한다고 한 서명 운동한 거요. 물론, 그 주영희라는 작자가 자신이 지금 거기 강사로 일하고 있고, 한국어학과 OB이니 사람들을 동원하고 학생들을 시켜서 그렇게 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어떤 학생들이 그렇게 서명을 했는지, 그것부터 재판부에 명확하게 탄핵을 했으면 해서요.”
“제가 외교대에 부임하고 나서 이 사건이 발생해서 수업에서 배제되기까지 3개월간 전부를 합쳐봐야 6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명이 100명이래요. 일단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내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학교 정문에서 학생들을 동원해서 서명을 받은 거예요. 서명의 기본은 연락처와 소속인데, 그것조차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것을 1심 재판이 되어서야 확인을 했어요.”
“역시 그렇군요. 그건 됐구요, 그다음. 이 랴오츠리엔이라는 여학생이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주장하신 내용을 잠깐 봤는데요, 그건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직접 확인한 건 아니구요. 다른 분을 통해서 듣게 된 사실입니다. 원래 이 학생이 타이난 출신인데 지금은 타이중으로 이사를 했거든요. 중학교부터 타이중에서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타이난의 초등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언뜻 들었었는데, 그때 묘하게 말하면서 자기가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교사가 죽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아는 사람을 통해 그녀가 타이중의 고등학교 다닐 적에 자신이 좋아했던 연인관계라면서 사귀었던 교사가 있었는데 성희롱을 했다면서 교사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번 건처럼 일을 꾸몄고, 심지어 그 교사가 죽기 전까지 학교 옥상에 같이 있었고, 살해한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살해요? 랴오츠리엔이요?”
“그렇게 듣기는 했는데, 직접 조사를 한 것은 아니라서요. 제가 그곳에 간다고 사실을 바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닐 것 같구 해서요.”
“만약 사실이라면 일이 너무 커지는데요. 그건 조금 생각을 해보기로 하죠. 사실 이번 건과 관련성을 입증하기도 조금 어려울 테고 뭐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네요. 그런데 그런 사실관계를 입증하여 활용하는 건 별론으로 하더라도 사실이라면 정말 무시무시한 애한테 걸리신 거네요. 무슨 영화 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저도 들을 때는 그저 흘려 들었었는데 막상 사실이라고 하니까 조금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 그리고, 굳이 이 여학생이 고백했다고 했던 다음날 집에서 열린 파티에 이 여학생을 부른 것은 어떤 이유였나요?”
“네?”
“만약 제가 이 사건을 맡게 되면, 의뢰인과의 비밀유지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에 변호와는 별개로 제가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해서요. 혹시 이 여학생과 연인관계셨나요?”
옌 변호사의 눈이 반짝거렸고, 정 변호사가 숨을 죽이고 박 교수를 쳐다봤다.
“만약 연인관계였다면 그 난리를 부렸을 때,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그 아이를 달래고 어떻게 해서는 이런 사달이 나지 않게 했겠죠.”
“으음. 그것도 그렇네요. 그렇다면 왜 파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늘 얘기해왔어요. 그게 사실 파티 이틀 전에 새벽까지 사랑고백을 한답시고 연구실에 남아서 실랑이를 하고 매듭을 지은 이유이기도 했어요. 그 아이의 언행이 점점 선을 넘어오고 있었고, 뭔가 선을 긋고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이 아이는 자신이 나와 밀당을 하는 연애관계라고 착각을 하며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기게 만들고 싶어 했어요, 끊임없이.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장난을 못하게 못을 받을 필요가 있었어요. 그게 내 생각에는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그렇지 않다면 계속 교수인 나에게 이런 식으로 밀당하듯이 버릇없이 굴거나 무슨 연인에게 하는 듯한 말장난은 하면 안 된다,라고 못을 박겠다고 작정하고 그날 토론 아닌 토론을 길게 하게 된 거였어요. 그런데, 자기가 항복한다고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은 남자는 없었는데, 자기가 이번엔 순순히 고백한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일종의 항복을 통한 정리를 듣고 나서는 곧 방학이니까 타이완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가족들과 지내고 오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정신적으로 불안한 애가 고백이랍시고 했는데, 이틀 뒤에 다른 여학생과 남학생을 불러 집에서 밥 한 끼 한다고 아내가 자리를 마련했는데, 만약 겨우 안정시켜놓은 이 여자애가 자기를 빼고 다른 학생들을 불러 식사를 했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난리를 칠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정말로 아까 옌 변호사의 말이 맞고, 1심에서 그 사람들이 우긴 말이 맞다면, 어떤 변태 교수가 자신이 성희롱하는 여학생을 자기 아내와 딸아이가 있는 곳에 불러서 동석을 시킵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자기 아내와 딸아이에게는 감추고 연구실에 몰래 불러서 연애를 하든 성희롱을 하든 했을 거 아닙니까?”
“아아, 무슨 말씀인지 이제 이해가 갑니다. 일이 그렇게 꼬였던 거군요. 으음...”
“그런데 저도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물어보세요.”
“옌 변호사님은 이 사건에 왜 관심을 갖게 되신 거죠?”
“으음...”
이번엔 옌 변호사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주저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저도 말씀드릴게요. 저는 변호사가 된 지 이제 딱 10년 차입니다. 그런데, 이 변호사 사무실도 그렇고 사건관계도 그렇고 대부분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대부라고 아시나요? 저희 대부와 어른들이 투자자의 형태로 사무실을 투자 운영해주고 계세요. 사건도 직접 알선해주시고.”
“그렇군요. 그런데요?”
“당연히 사건이 들어오면 어머니와 대부에게 상의를 먼저 드립니다.”
“아, 네.”
“사실 이 사건이 엄청나게 복잡한 사건도 아닌데, 사회적인 파장은 굉장히 될만한 사건이 맞거든요. 최근 마요흥 사건도 보셨겠지만, 여자들이 돈 때문에 무고를 하는 성희롱 사건도 늘어가는 추세라서, 저희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나름 화제가 될만한 선전성 사건이라고 이 사건을 판단했어요.”
“네.”
“그래서 무료 변론을 조건으로 저희가 이 사건을 수임하려고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