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 사는 악녀 - 100

민사 준비 기일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621


뒤에 앉아 있던 과장이라는 여자가 보다 못해 뚱뚱한 몸을 흔들며 천천히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테이블로 왔다.


“그러면 이 자료에 대해서 저희가 다시 한번 검토하고 위원님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자료 다 검토 분석 끝냈다면서요?”


박 교수가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대꾸했다.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분석한 거 맞는데, 위원님과 회의까지 한 건 아니거든요. 맞죠 보좌관님?”

“그, 그렇죠.


너무도 어색하고 티 나게 손발도 맞지 않는 슬랩 코미디를 연기하듯 두 여자는 자기들끼리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 회의라는 곳에 당사자인 제가 들어가서 설명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네?”


과장이라는 여자가 다시 사례 걸린 듯이 박 교수를 곤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누구보다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 그건 맞는 말씀이긴 한데...”


보좌관이 자기가 먼저 말을 하면서도 내내 과장의 눈치를 살폈다. 과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틀린 말씀은 아닌데요. 이 정도 증거면, 사실 뭐 설명이고 뭐가 들을 수준은 아니잖아요? 저희가 위원님에게 브리핑을 하고 그다음에 연락드리도록 할 테니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시지요?”


과장의 태도가 완강해서 더 이상 그들을 추궁하는 것이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 박 교수는 일단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그들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내려왔다가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1층 경비실을 지나기 전에 다시 2층의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문 앞에서 방금 나섰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우리한테 중요한 건, 사실이나 진실 같은 게 아니라구. 이 건을 위원님이 터트렸을 때 위원님에게 무슨 득이 있느냐는 거야.”


그녀의 약간 날카로운 소리에 조금 열려 있던 문에서 박 교수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래도 이렇게 서류 증거까지 있는데, 3류 대학도 아니고 외교대학교에서 이런 짓을 하고, 교육부에서도 눈감아줬다는 게 행여 한국 언론이나 그쪽을 통해서 우리한테 터지면 심각해지는 거 아니야?”


“우리 위원실에서 잘못한 거야? 아니잖아. 그리고 1심 판결까지 유죄로 했을 때는 저쪽 여자 입법 위원실에서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저쪽은 지금 타이난 시장 후보로 나가려고 이거 꾸몄는데, 후보에서도 떨어져 버리고 그나마 입법위원 타이틀 하나인데, 자기 비서관이랑 스캔들까지 터져서 독이 오를 대로 올랐잖아. 그런데 한국인 때문에, 한국인을 살리는 폭로와 기자회견을 위원님이 하시겠어? 뭣보다 이 친구야. 우리 위원님이 교육부 OB인데 교육부를 저격하는 결과가 될 텐데 그걸 위원님이 하실 리가 있냐?”


더 이상 기다리기 뭐해 박 교수가 열린 문에 노트를 하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과장이라는 여자는 들고 있던 머그컵을 떨어뜨렸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보좌관은 화들짝 놀라며 마시던 차에 사레가 들려 컥컥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미안합니다. 핸드폰을 두고 나갔네요.”


박 교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고 나왔다. 핸드폰의 녹음 버튼은 아직도 눌러진 상태 그대로였다.

국회회관을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이 아닌 시먼딩 쪽으로 무작정 걸으며 속이 울렁거렸다. 길을 걷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길 옆으로 주저앉듯이 벽을 잡고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빠지고 땅이 튀어 올라는 것 같은 느낌에 어지러웠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호흡을 조절하고 어디선가 오토바이의 날카로운 엔진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이 퍼뜩 들었다.

“후우!”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라운지 위에 있는 여름에 아이들과 올라갔던 야외 수영장이 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국의 겨울처럼 눈이 오거나 눈발이 날리는 겨울의 날씨는 아니었지만, 물이 빠진 을씨년스러운 수영장에 제대로 관리되어 않은 모습들이 휑한 박 교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 타이베이 시내가 사방으로 터져 멀리까지 신베이까지 보이는 모습을 보며 옥상의 가장자리에까지 가서 난간에 올라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그 힘겨운 여름의 다툼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야외 수영장에 올라와 깔깔거리며 수영하고 물놀이를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뭘 위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발아래를 쳐다보니 개미만 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떨어지면 고통 없이 한 번에 죽겠지?’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악녀들이 법원에서 읽어달라는 편지가 생각나며 박 교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죽어주기만을 바라는 그녀들의 소망을 들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민사재판 준비기일이 먼저 다가왔다. 민사 준비기일이 시작되면서 항소심 준비기일이 확정되고 재판부가 결정되었다는 연락도 옌 변호사에게서 왔다. 옌 변호사는 민사 재판까진 무료변론을 해줄 수는 없다는 선을 그으면거도, 민사 판사에게 항소심이 끝날 때까지 민사를 보류해달라는 주장을 확실하게 하라는 코치까지는 잊지 않고 메시지로 보내왔다.


형사 법원과 같은 위치의 다른 건물에 위치한 민사법원에 찾아가자, 병원의 대기석처럼 그 앞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머리숱이 없는 뻔뻔하게 생긴 주영희의 변호사가 앉아 있던 박 교수를 확인하며 쭈뼛거리며 반대쪽 의자의 끝에 앉았다.


법정에서 경비가 이제 들어와도 된다고 부르면서 두 사람이 법원으로 들어갔다. 여자 판사가 혼자서 판사석에 앉아 양쪽에 잔뜩 쌓인 서류들 사이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변호사신가요?”

주영희의 변호사에게 여자 판사가 물었다.

“네. 원고 측 변호인입니다.”

“피고신가요?”

“네. 맞습니다.”

“네. 그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피고는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으셨나요?”

“네.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이요?”

“현재 변호사를 선임하여 형사 항소심을 진행 중입니다.”

“형사 항소심이요?”


여자 판사가 다시 서류를 뒤적이며 내용을 살폈다. 지난번 형사 재판을 했던 잇몸이 다 드러날 정도로 입이 튀어나온 천박하게 생긴 외모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의 여자 판사였다. 얌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강단이 제법 느껴지는 단발머리에 차분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 것이 비호감은 아니라는 생각을 박 교수는 하고 있었다.


“아, 그렇네요. 이게 1심 판결이 난 것을 보고 손해배상을 청구한 건가요?”


그녀가 다시 주영희의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형사와 상관없이 워낙 원고인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가 심각하기 때문에....”

“묻는 질문에 먼저 답해주세요.”


여자 판사가 주절거리며 박 교수를 범죄자로 한정 짓는 듯한 말을 시작하는 것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막았다.


“네?”

“지금 민사 재판을 제기한 이유가 1심에서 유죄로 확정판결이 났다고 손해배상을 바로 청구하신 것 같은데, 항소했다고 하잖아요, 피고가?”

“그러니까 저희 입장은 항소와는 상관이 없는....”

“그러면 항소심에서 무죄가 나오면 민사는 상관없이 유무죄를 판단해달라는 건가요?”

“아니, 그게....”

“변호사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먼저 진행 중이 형사의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 아닙니까?”


여자 판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주영희의 변호사를 몰아세우듯 물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워낙 1심의 판결이 명확하고 정확해서요.”

주영희의 변호사가 구차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겨우 설득하듯 여자 판사에게 말했다.


“그래요? 지금 피고가 제출한 3장짜리 의견서를 보면, 결정적인 증거는 이쪽에 있어 보이는데요?”

“네?”

“피고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형사 재판 과정에서 감추고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 최초의 피해자 진술서 말인데요. 이게 사실이라면, CCTV에 대한 조사자체도 형사재판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요. 으음. 원고 측 변호인. 이거 사실인가요?”

“네? 뭐가요?”

“뭐가요,가 아니라, 지금 이 사건의 핵심이 원고인 여학생들이 피고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거잖아요. 맞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최초 피해자 진술서에 성추행을 당한 장소가 피고의 연구실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이라고 적혀 있고, 강의실이라고 적혀 있고, 교실이라고 적혀 있어요. 모두 CCTV가 있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증거가 없을 수가 있죠?”

“그건, 제가 다시 피고들에게 물어보던가...”

“지금요? 다시? 1심 판결이 그렇게 명확하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렇긴 한데....”


주영희의 변호사가 얼굴이 뻘게지며 어쩔 줄 몰라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피고가 제출한 문건 증거에 의하면, 외교대 성평회에서 성추행 피해자라고 하면서 해당 여학생에게 학교 정신과 상담센터에 상담을 권했는데, 해당 정신 상담센터에 피고는 다섯 달이 넘게 매주 상담을 받았는데, 정작 원고 여학생은 자신은 정신적으로 피해 입은 것이 없다는 상담내용을 남기고 상담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게 상식적으로 도대체 피해를 입은 쪽이 어디인지 애매하지 않나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1심 판결도 있는데...”

“아니, 1심 판결이 있으니까 더 이상하다고 묻는 거예요.”

“제가 피고 쪽에다가 다시 물어보고 알아보겠습니다.”

“이건 민사로 진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봅니다. 게다가 지금 항소심 일정까지 잡혔다고 하니 항소심 진행상황을 보고 그에 맞춰 민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추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박 교수는 얼굴이 뻘겋게 변해가는 주영희의 변호사를 뒤로 하고 법정을 나왔다.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무것도 없다. 변한 것도 없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박 교수는 겨우 작은 산 하나를 넘긴 것이라며 속을 다지고 또 다졌다. 오래된 오토바이의 날카로운 엔진음이 들릴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이제 과민증상을 넘어 노이로제가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629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