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준비기일을 앞두고 3일 전 옌 변호사는 마지막 점검회의를 하자고 사무실로 박 교수를 불렀다. 그간 준비했던 내용과 항소이유서에 언급된 증인 재신청건들에 대한 부분이었다. 정 변호사가 조금 일찍 도착한 박 교수를 먼저 맞았다.
“오늘도 옌 변호사는 늦나요?”
“아닙니다. 지금 자료 검토 중이었어요. 곧 들어오실 거예요.”
옌 변호사가 바로 회의실로 들어왔다.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리고 회의, 시작할까요?”
옌 변호사가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박 교수에게 운을 띄웠다.
“좋은 소식이요?”
“네. 지난번에 라인으로 말씀드렸지만, 항소심 재판부가 확정되었거든요. 기억하시죠? 이 재판의 재판부가 누가 되느냐가 이 재판의 관건이라고 말씀드렸던 거.”
“네. 얘기했었죠.”
“부장판사가 곧 정년을 맞이하게 되는 굉장히 공정하기로 유명한 분으로 지정되었어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 그쪽의 입김이 닿지 않을 확률이 큰 거죠. 계속 판사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들은 대개 입법위원들이랑 당연히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지난번 여자 판사 같은 사람으로 지정되지 않아서...”
“사실 2심은 단독심인 1심이랑은 많이 달라서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까요.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제 우리가 정리한 것만 제대로 봐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네.”
박 교수의 반응이 그닥 자신이 예상했던 만큼 반기는 기색이 아닌 것이 옌 변호사는 조금 이상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민사도 지난번 말씀대로 잘 마무리된 걸로 아는데,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거예요?”
“특별히 그런 건 아니구요. 국회에도 가서 항의를 하고, 한국 쪽 외교부에도 계속 요청을 하고 있는데, 어디 하나 특별한 소식이 없어서요.”
“아, 그러세요. 일단 우리는 재판에 집중하도록 하지요.”
“아참! 한 가지 여쭤볼게요. 혹시 한국의 르포 추적 방송팀에서 나오면 옌 변호사가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를 하는 것은 가능하죠?”
“방송이요?”
“아무래도 한국에서 방송팀에서 관심을 보이게 되면 한국 여론이 외교부를 압박하게 될 거고, 한국에 의존적인 타이완 관광 현황을 볼 때, 타이완이 한국의 여론에서 요구하는 진실 규명에 아예 외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요. 지금 한국 방송팀이랑 접촉 중이긴 하거든요.”
“네. 뭐, 인터뷰 정도라면 제가 충분히 할 수 있죠. 한국인 관광객에 대한 소송건에 대해서도 저희가 대응할 수 있는 홍보가 될 테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연결이 되는대로 그 부분은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할게요.”
“네. 그럼 잠깐 정리 좀 할까요?”
“네.”
“일단 두 명의 여학생은 확실하게 증인 신청을 할 거고요.”
“네. 증인 심문에 대한 내용은 지난번 보내드렸던 내용이 반영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원래 재판에서 증인 심문을 제가 직접 할 수가 없게 되어있나요?”
“네? 그럴 리가요. 얼마든지 판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직접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대면하지 않게 한다면 목소리로만 하는 거니까 크게 다를 게 없거든요.”
“그런데 왜 1심에서는....”
“그 여자 이야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갔던 거고, 왜 1심의 변호사가 그것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좀 의아하긴 하지만, 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이번에 1심 재판부에서 감추고 열람을 거부하면서 밝혀진 그 최초의 진술서와 정신상담 센터에 피해자라고 하는 랴오츠리엔이 자신은 아무런 피해상황이 없다면서 적은 상담 기록 자료 등을 새로운 자료로 증거로 인정해달라고 제출할 예정입니다.”
“네.”
“그리고 녹음자료에서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많은데요. 아무래도 이 학생들이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한국어의 미묘한 차이나 그런 부분들이 빠진 것 같아요. 여기 형광펜으로 표현한 것들인데 따로 한번 좀 봐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촘촘하게 중요 사안들을 상의하고 토의하느라 2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렇게 준비과정이 끝나고 그들은 3일 후 법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항소심 준비기일 당일, 박 교수는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시먼딩의 집에서 걸어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타이베이 법원이었지만 잰걸음으로 걸어서였는지 더 빨리 도착했다. 법원 현관을 들어서는데, 카메라를 들고 있는 카메라 기자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워낙 자극적인 뉴스를 만들어내는 타이완의 쓰레기 언론이니 뭔가 그들이 노리는 먹잇감이 있으려니 했다. 그들의 옆을 지나면서 눈이 마주친 모습은 정갈한 정복을 입은 기자라기보다는 프리랜서 하이에나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중에 마이크를 든 남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그들은 다시 자기 둘에서 노닥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언제 연락이 온대?”
“몰라. 우리는 스탠바이하고 있다가 연락이 오면 그때 움직이면 돼. 얼마나 좋아, 이런 용돈벌이! 하하하”
그들이 낄낄거리는 옆을 지나 법원으로 들어간 박 교수는 1심을 하던 법원 쪽으로 갔다가 다시 삥 돌아 물어물어 항소심 법원을 찾았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인지 늘 꾸물거리며 나타나는 주영희의 변호사도 보이지 않았고, 옌 변호사와 정 변호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10분이 지나서 옌 변호사와 정 변호사가 도착했고, 그 후 5분 후 주영희의 변호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등장인물이 도착하자, 변호사들은 경비에게 자신들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박 교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법정에 들어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판사가 그들을 맞았다. 옆에 있어야 할 다른 좌심과 우심도 보이지 않았다.
“자아, 1심에 대한 기록을 좀 봤는데요. 이게 좀 이상한 부분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판사가 먼저 운을 띄웠다. 민사에서도 그랬지만 주영희의 변호사는 얼굴이 잔뜩 긴장한 상태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상고 이유서 외에 저희들이 증인 심문에 대한 부분과 증거 신청 부분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옌 변호사가 서류를 바로 앞에 앉은 서기에게 전달했다. 미처 보지 못한 사이에 검찰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검찰관의 모습이 보였다.
“검찰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고이유서에 나온 논리대로 보더라도 1심에서 논리적으로 발견되는 모순들도 많구요. 결정적인 증인에 대한 부분도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저희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내가 지금 문제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묻지 않았습니까?”
판사가 검찰관의 말을 막고 날카로운 저음으로 다시 지적하듯 물었다.
“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피고 측 문건을 보고 검토해 보록 하겠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1심이 이루어졌는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 많은데요. 일단 어떤 증거들을 채택할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판사가 옌 변호사가 제출한 내용을 살폈다.
“으음. 증인 심문은 다시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구요. 이 증거들은 뭡니까?”
“최초 피해자라고 하는 여학생이 자신의 직접 성평회에 신고를 하면서 작성한 최초의 진술서입니다. 그런데 장소가 문제가 무고의 증거로 충분히 의심될만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료를 최초로 접수했던 외교대학교 성평회에서도 이 자료에 대한 의구심이나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1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 검찰 측에서 이 자료의 열람을 거부하여 1심이 끝나고 나서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판사가 유심히 살피는 동안, 주영희의 변호사는 다시 얼굴이 뻘게져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을 제대로 한 것 같지도 않은 검찰관은 대강 자료들을 훑어보는 시늉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그런데, 이건 새삼스럽게 증거로 상호 인정하는지를 볼 필요도 없는 것이 검찰이 증거라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문제의 외교대학교 성평회에서 접수받은 것 아닙니까? 성평회의 보고서를 주요 증거로 쓰면서 이것을 증거로 사용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새삼 증거로 지정한다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이상해 보이네요. 본래의 증거로 인정합니다. 검찰 측, 맞죠?”
“아, 네. 맞습니다.”
그저 안절부절못하며 뒤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것은 주영희의 변호사뿐이었다.
“이건 또 뭐지요?”
판사가 다른 서류를 들어 보이며 옌 변호사에게 물었다.
“외교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정신상담센터의 기록입니다. 증인 심문을 통해서 더 명확하게 확인하겠지만, 일단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학생이 외교대학교 성평회측에서 성희롱 피해를 받았으니 정신 상담을 받으라고 권하였으나 상담을 통해 자신은 아무런 정신적 피해가 없어, 상담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직접 서명하고 기록한 내용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이것도 성평회 관련 기록이니 따로 증거로 편입시키는 논의는 필요 없겠는데요?”
“그렇네요.”
검찰관은 그저 심드렁하게 판사의 말을 받았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주영희 변호사만이 뚫어질 듯 검찰관의 얼굴을 보며 엉덩이를 들썩거릴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건 없으면 이대로 오늘은 마감하도록 하지요.”
판사의 말이 끝나자 검찰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전용통로로 빠져나가버렸다. 뻘쭘해진 주영희의 변호사는 밖으로 나오며 무슨 보고를 하려는 지 황급히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남치고는 괜찮은 느낌인데요.”
옌 변호사가 특유의 힘 있는 목소리로 박 교수의 기운을 돋우려는 듯 웃어 보였다. 정 변호사 역시 밝은 얼굴로 대꾸했다.
“1심에 대해 안 좋았던 일은 다 잊고 다시 시작하는 걸로 하자구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이 밖으로 막 나오려는데 눈부신 빛이 박 교수의 앞에서 번쩍하고 빛나며 시야를 가렸다.
“한국인 성추행범을 변호하시게 된 이유가 뭡니까?”
누군가 카메라와 함께 마이크를 들이밀며 세 사람의 앞으로 공격하듯 성큼 거리고 달려들었다.
“뭡니까?”
옌 변호사가 빠르게 박 교수의 앞을 막으며 정 변호사에게 외쳤다.
“얼른 박 교수님 모시고 따로 택시 타고 가세요. 이쪽은 내가 막을게.”
“여학생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 정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는데요. 뻔뻔하게 항소까지 한 이유가 뭡니까?”
말 그대로 나오는 대로 마구 떠들어대는 그 남자는 앞서 박 교수가 들어올 때 현관에서 마주쳤던 그 타이완 양아치 기레기였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박 교수를 이끌며 정 변호사가 얼른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그들의 뒤를 따라오며 마이크를 들이미는 그에게 옌 변호사가 외쳤다.
“당신들 어디 소속입니까?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하면 될 것을 이런 식으로 테러처럼 달려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식으로 법적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옌 변호사가 뭐라고 이야기하던 그들은 정 변호사와 박 교수가 택시를 타고 출발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택시를 황급히 잡아 탄 박 교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나요?”
“일단 법원을 한 바퀴 그냥 돌아주세요.”
정 변호사가 다급하게 외치듯 기사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쪽 변호사가 산 사람들일 거예요. 타이완에서는 이런 식의 공격도 제법 있거든요.”
“공격이요?”
“네. 전에 회의에서 옌 변호사님이 설명드린 것처럼 저쪽에서는 항소심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그러면 박 교수님이 한국인이라는 점을 파고들어서 여론이나 그런 것들을 통해 박 교수님의 일반 생활이 굉장히 불편해지도록 떠들고 언론에 얼굴을 알리고 하는 거죠. 그렇게 정신적으로 핍박하다 보면 자살을 한다거나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그냥 1심의 판결에 맞게 벌금을 내고 내 나라로 도망가겠다는 결론을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