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가 굉장히 좁습니다. 저런 식의 옐로 페이퍼 기자라는 것들이 저렇게 먹고살아요. 당장 사실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얼굴을 팔게 하고 압박을 하게 되면 일상생활이 불편해지거든요. 그런데 어지간히 다급하긴 했나 보네요.”
“다급하다니요?”
“이전에 주영희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건도 그렇고 교수님이 명예훼손이나 고소에 대해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돈을 써가면서까지 저러는 걸 보면 저쪽에서도 상당히 몰려있다는 걸 드러내는 거죠.”
“그런데 우리를 어떻게 알아보고 저렇게 덮친 거죠? 아까 저 사람들 법원에 들어올 때 마주쳤던 사람들이었어요. 당시에는 나랑 정면으로 마주쳤는데도 못 알아봤어요. 옌 변호사가 이 쪽에서 유명한 사람인가요?”
박 교수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정 변호사에게 물었다.
“아니죠. 아까 우리 재판 끝나기가 무섭게 그쪽 변호사가 전화기 들고 복도에 뛰어나가는 거 못 보셨어요? 아마 저 사람들에게 스타트 싸인을 내린 걸 거예요. 당시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는 없었잖아요. 말 그대로 실시간 중계를 해준 거죠. 지금 나가는 사람들을 저격하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박 교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미 익숙한 상황인지 정 변호사는 바로 오는 전화를 받았다.
“네. 옌 변호사님. 그렇죠? 알겠습니다. 그 뒤쪽 골목 민사 법원 쪽으로 걸어오세요. 우리도 그쪽에서 내릴게요.”
“뭐랍니까? 옌 변호사는?”
“잠시만요. 기사님. 저쪽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세워주세요.”
정 변호사가 법원을 중심으로 크게 두 바퀴째 돌고 있던 택시 기사에게 반대쪽 골목에서 내린다고 표시를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옌 변호사님쪽도 다 그냥 파하고 사라져 버렸대요. 그런 사람들은 돈 받고 한번 저격하면 그걸로 끝이거든요. 정말로 취재를 할 요량이었다면 교수님의 뒤를 밟아 교수님이 사시는 곳을 저격했지, 법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죠.”
“그러면 아까 그 모든 게 쇼라는 말인가요?”
“그렇죠. 그렇게 한번 압박하게 되면 일반인들이라면 법원에 다시 오는 것도 두려워하게 되고 이게 기사가 떠나 다시 얼굴까지 공개되고 하면 일상생활에 압박을 느껴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게 되거든요. 물론 변호사인 저희들은 익숙한 편이지만요. 다 왔네요. 옌 변호사님 저기 계시네요.”
택시에서 내린 박 교수에게 옌 변호사가 웃으며 물었다.
“놀라셨죠? 아마 이런 경험은 처음이실 텐데...”
“제가 대강 다 설명드렸어요.”
정 변호사가 택시비를 내고 뒤따라 나오며 옌 변호사에게 설명했다.
“네. 뭐 저쪽이 똥줄이 타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까 우리에게는 좋은 싸인이라고 생각합시다. 일단 준비기일이 끝났으니까 법원에서 곧 연락이 올 거예요.”
“언제쯤 연락이 오나요?”
“통상 한 달이 넘지는 않을 거예요. 게다가 고등법원이니까요.”
옌 변호사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한 달이 넘도록 법원에서 연락이 왔다는 통보는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른 재판 송무로 바쁜 옌 변호사에 계속 물어본다고 그가 뭔가 알아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한 달이 훌쩍 넘긴 어느 시점에서인가 법원에서 등기 서류가 도착했다는 프런트의 알림이 울렸다.
1층 리셉션에 가서 받은 서류에는 의외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용은 달랑 1장이 다였다.
- 그동안 형사 건으로 규제되어 있던 출금금지 처분을 4월 5일을 기준으로 해제한다.
“뭐지, 이건?”
옌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분명히 항소심으로 바로 이어졌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2심은 별개심이 아니라 연속심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형사 사건의 피고, 특히 외국인에게 출국금지가 해제되는 일은 결코 없다고 했다. 박 교수는 혼란스러웠다. 그 서류를 들고 집으로 올라와 멍하니 책상에 앉아 서류와 바깥의 하늘을 보며 멍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해 보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처분이 아니었다. 내용을 일단 네이버 카페에 사진 파일로 올리고 정리하자, 스승에게서 바로 연락이 왔다.
발검무적 : 이게 갑자기 무슨 통보인 건가?
박 교수 :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법원에 직접 알아보기도 그렇고.
발검무적 : 으음. 시기상 1심이 끝나서 그 간헐기에 벌어진 행정 착오라고 볼 수도 없고 이건 아무래도 의도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듯한데...
박 교수 : 의도적이라면...?
발검무적 : 자네가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의도를 대놓고 보인 것이 아닌가 싶네.
박 교수 : 제가 그냥 한국에 들어가게 되면, 재판은요?
발검무적 : 통상 형사법은 타이완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피고가 법원에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질 수 없다는 조건이 있네. 타이완과 한국은 정식 외교수립 상태가 아니니, 형사사건에 대한 피의자를 송환한다거나 하는 것도 불가하고, 그렇게 되면 그냥 사건은 무기한 보류가 되는 것이지.
박 교수 : 그렇게 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을 한 걸까요?
발검무적 : 자네가 한 달여 전에 준비기일에서 녹취해서 정리한 내용대로라면 그들은 굉장한 위협을 느꼈겠지. 그대로 진행된다면 1심이 뒤집힐 확률이 커지니까...
박 교수 : 그런데 재판이 열리지도 않고 있습니다.
발검무적 : 아마도 자기네들 멋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자네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아니까 진행을 시켰겠지.
박 교수 : 그렇다고 그 늙은 남자 판사가 지극히 공정한 사람이라 강행한다면 몰라도 아직 시작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은 포섭되었거나 결국 겉으로는 공정한 척해놓고 뒤로 호박씨 까는 전형적인 타이완인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발검무적 : 나 역시 그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말한 것이 있고, 지금 더 드러난 증거들까지 있으니 재판을 열지 않으면서 시간을 벌고, 자네에게는 더욱 이런저런 방법으로 압박을 가해보는 거지. 벌써 세월이 얼마인가? 말이 그렇지 아무런 일도 못하고 그저 갇혀 있으면서 재판만 바라보는 것이 외국인 입장에서는 사람 피 말리는 노릇이라는 것을 그들도 아는 거지.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심지어 젊은 변호사까지 무료 변론을 하겠다고 달려들었으니 그쪽에는 곤란하기도 하겠지.
박 교수 : 그러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발검무적 : 으음. 자네는 솔직하게 어떻게 하고 싶은가?
박 교수 : 저도 솔직히 아까 문건을 받고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한국에 들어가 버린다면 여태 싸운 것도 그렇지만, 그들이 뒤에 어떻게 할지가 뻔하니까요.
발검무적 : 그렇겠지. 아마 자네를 성추행범에 몰래 도망간 자라는 프레임에 씌워 계속 공격하고 주영희는 특히 한국 언론에 또 찌라시를 뿌려대겠지.
박 교수 : 네. 그렇게 되면 제가 어디를 가든 어떤 일을 하려고 하든 결국 대학에 남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발검무적 : 하지만, 재판이 열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무턱대로 시간을 이렇게 끌고 자네 가족과도 떨어져 영혼을 갉아먹는 일을 당하는 것도 무리가 있긴 하네만...
박 교수 : 후우. 솔직히 재판이 빨리 진행되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론이 나올 텐데 그것도 아니고 덜컥 출금금지를 해제한다는 문건을 그것도 법원에서 보내오는 것이 독이 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발검무적 : 그러면 이건 어떻겠나?
박 교수 : 네?
발검무적 : 일단 그들의 속내도 알아볼 겸 가볍게 가족들도 보고 한다는 생각에 바람 쐴 겸 한국에 들어갔다가 오는 걸세. 특히 지난번 방송사 피디들도 전화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 직접 만나서 자네가 설명하고 설득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그냥 전화나 이메일로 자료를 건네주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을 테니 겸사겸사 한국에 한 달 정도 나갔다가 다시 상황을 보고 들어오는 걸로 하는 걸세. 어떤가?
박 교수 : 그건 생각해볼 만하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방송사 고발 프로 피디들도 좀 만나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해보고, 외교부도 본부에 쳐들어가서 담판을 짓고 싶고, 그 쓰레기같이 굴었던 국회의원들도 푸시를 하구요.
발검무적 : 외교부나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말고. 하여간 그렇게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네. 혹여 자네를 크게 망신 주려고 공항에서 출금금지가 유효하다는 식으로 방송사까지 동원해서 큰 쇼를 벌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없으니 그런 부분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보네.
박 교수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변호사에게도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한국에 나갈 준비를 계획해보겠습니다.
발검무적 : 그래. 무엇보다 자네가 먼저 지쳐서 힘겨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중요하니, 가족들을 만나고 부모님도 뵙고 조금 기력도 회복하고 오는 계기가 되면 참 좋겠네.
박 교수 : 네. 감사합니다. 그리 준비해보겠습니다.
박 교수는 가장 먼저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 없이 생활을 건사하는 아내는 한국에서 이미 봄을 맞고 있었다.
“그냥 들어올 수 있는 건 맞아요?”
“그것도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 선생님이랑도 얘기했지만, 한 달 정도 한국에 나갔다고 와보는 것으로 테스트를 해보고. 출금금지가 유효한 건지, 그리고 저쪽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러는 것인지도 테스트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애.”
“그래요. 그러면 당장 비행기 표 알아보고 들어와요.”
“알았어. 내일모레 들어가는 비행기로 예약할게.”
매주 장을 보러 가던 시먼딩 까르푸에 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타이완의 먹을거리를 잔뜩 사고, 제임스에게 선물 받았던 진먼 고량주도 가방에 챙겨 넣고, 한 달 동안 몇 백만 원의 월세를 꿇어박을 집도 단속을 하고 나서 박 교수는 드디어 공항으로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건물을 나서는 박 교수를 경비가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한국에 가세요?”
“네?”
박 교수가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다.
“아니 짐이 많으시길래, 한국에 가시나 해서요.”
평상시 원래 아이들이 함께 살 때서부터 인사를 나누던 경비이긴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박 교수는 그의 질문이 평상시와 같이 살갑게 들리지가 않았다.
“네. 잠시 가족들을 보고 오려구요.”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보이지 않은 지 꽤 됐네요. 한국으로 돌아간 건가요, 가족분들은?”
“아,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경비는 그저 친절을 보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박 교수는 머릿속이 복잡해왔다. 용산사역까지 캐리어를 끌고 가서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향하면서도 그가 혹시라도 주영희에게 푼돈을 받으며 자신의 거취를 보고하는 끄나풀 역할인 사람일 수도 있을까 하는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공항을 가는 내내 공항에서 과연 무사히 여권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공항에 도착하고 짐을 항공사 측에 부치고 나서 막상 여권을 들고 여권심사대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심장소리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여권 심사대에 자신의 순서가 되어 여권을 내밀자, 심사관이 모니터를 쳐다보며 박 교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며칠 전부터 꾸었던 악몽처럼 모니터 화면에 스파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빨간 경고 박스가 뜨면서 ‘당신은 출국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긴장된 얼굴로 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