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보내주신 자료가 너무 명확하고 정리도 잘되어 있어서 저는 큰 질문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가게 되면 언제 움직이고 누구랑 어떻게 팀을 꾸리고 어디를 쳐야 할지 구체적으로 상의를 드리고자 만나 뵙자고 오늘 급히 온 겁니다. 어차피 현지에 가서 취재를 하려면 교수님이 당사자이기도 하고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디를 때려야 효과적일지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상당히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강 피디의 말투와 태도에 박 교수는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음을 느끼며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 가기 전에 외교부부터 확실하게 조져야 할 텐데 그러실 수 있을까요?”
“그건 너무 당연한 겁니다. 외교부가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처음도 아니고, 사실 저희 방송사에서 택시 운전수 요구르트 강간 사건에도 가장 먼저 현지 보도했었습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확인해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자신감 있는 강 피디의 태도는 자기 방송사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이 그동안 했던 취재에 어느 정도 확신이 차 있는 젊은 혈기로 넘치는 듯 했다.
“지금 문제의 박준기 부대표가 일본의 총영사로 승진해서 가 있는데... 이 취재가 시작되면 다칠 수 있는 사람도 나올 텐데요, 방송의 수위를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시고 어디를 포커스를 두실 생각이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통화에서도 말씀드렸었지만, 우리 방송사에서 미투가 대대적으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 반대급부가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확실하게 다뤄보고 싶었는데, 한국의 사례를 다루게 되면 데스크도 그렇고 아무래도 위에서 킬 할 확률이 커서 포기하고 있던 차에 교수님이 이런 일을 당했다고 제보를 주시자마자, 이거다 싶어서 바로 확신을 하고 연락 드린 거죠.”
“구체적으로 물으시니 대략적으로 제가 구상했던 것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타이완 교육부를 치는 것이 객관적인 증거를 털어내는 방송에는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은 역시 외교대학교이고, 그중에서도 한국어학과입니다. 이전 학과장이 한국의 지원금을 개인적으로 횡령 착복하여 사용한 것에 대한 부분까지 합치면 한국에서 돈을 얻어낼 때는, 한국 관광객도 그렇고 한국어학과에서도, 그렇게 구차하게까지 비굴했던 그들이, 결국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혐한의 민낯을 드러내고 본색을 드러내며 일을 꾸민다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 큰 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문제의 여학생이 고등학교 때 교사를 음해해서 죽였다는 사건까지 현지에 가서 취재하고 적나라하게 밝힐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시간도 걸리고 취재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무슨 스릴러 영화의 악녀도 아니고, 교수님이 보내주신 자료 보면서 정말 경악했었습니다. 이것도 취재를 통해서 드러낼 수 있다면, 사전 연락과 현장에 하루 정도만 할애하는 것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너무도 적극적인 강 피디의 태도에 박 교수가 오히려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장고에 들어갔다.
“왜 그러시죠?”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제까지 다양한 방송사의 고발 프로그램 피디들도 만났고 기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미리 알아보신 것처럼, 제대로 보도한 매체도 거의 없고, 심지어 만나거나 연락을 했던 사람들도 이제까지 제대로 현지에 오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강 피디가 한다고 하는 부분을 어디까지 신뢰하고 함께 갈 수 있을까 조금 울컥했습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사실 버닝 썬 취재할 때도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인터뷰를 결정하게 된 과정도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다른 매체들이 그저 자극적으로만 이용하려 들고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던 차에, 본격적으로 모두 다루겠다고 약속하고 시작해서 원래 얼굴을 드러내는 건 하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제 의도나 제 태도에서 마음을 바꾸고 얼굴을 깐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강 피디가 뭔가 말을 꺼낼 듯하면서 박 교수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내렸다.
“네. 물어보실 것 있으면 또 물어보세요.”
“저희 데스크의 특징이 우리 방송의 신뢰도를 위해서라도 피해자들은 모두 얼굴을 까고 실명으로 방송 내보낸다는 거거든요.”
“아, 그, 그런가요?”
박 교수의 태도가 조금 움찔했다. 강 피디 역시 박 교수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해합니다. 교수님이 일반인도 아니시고 계속 대학에 계셔야 할테고 한국에서 생활을 하시려면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가족들도 있고 하니 고민이 되실 거라는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이번 버닝 썬 피해자 공개 인터뷰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원래 그쪽에서도 얼굴을 공개할 의도가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분도 저랑 이야기하고 취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용기를 내주신 거였어요.”
“그렇군요. 신생 프로그램이면서 공중파의 시청률을 위협할 만도 했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이제 쭉 달리고 있는 입장이죠. 사실 저희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기획 취재하면서 상당히 인지도를 키운 꼴이라서요. 그나저나 정 그러시면 제가 내일 저를 포함한 저희 팀의 의지를 보여드리는 선물을 하나 보내드릴게요, 오전 중으로.”
“선물이요?”
“네. 어차피 취재를 결정한 입장에서 외교대학교 한국어학과 현재 학과장, 그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사람이요. 그 사람하고 주영희던가요? 대만 친일파, 그 두 사람에 대해 사전 접촉하고 그 통화 녹취내용을 교수님께 보내드릴게요.”
“네? 바로요?”
“사실, 전화는 기본이죠. 두 가지 목적인데요. 어차피 이 사건이 터진 지 2년이 다 되었잖아요. 게다가 지금 1심이 실형까지 나왔으니 저쪽에서는 이대로 퍼트리고 교수님이 유죄였던 게 사실이라고 굳히려고 들 겁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지금 한국의 유명 방송사에서 이 전말을 까겠다고 피디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우리가 곧 타이완에 취재 들어간다' 라는 이야기를 듣게하는 것만으로도 그쪽에서 더 이상 서툰 짓거리를 막는 쨉의 역할을 할 수 있구요.”
듣는 것만으로도 박 교수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작부터 한국의 방송사에서 그것들에게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 그들의 반응이 벌써부터 궁금해져 왔다.
“두 번째는, 교수님이 주신 증거를 물론 신뢰하긴 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방어 논리를 또 펼 거거든요. 바로가 되었든 준비를 하든, 그러면 그걸 가지고 또 이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을 수 있는 거죠.”
“저야 그런 사실 확인 과정이라면 얼마든지 찬성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선물이라는 표현을 쓴 거죠. 하하하! 죄송합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자꾸 웃으면 안 되는데... 하여간 그래서 그 내용들을 보시고, 취재가 진행되는 과정도 보시면서 저희들에게 신뢰가 가신다면 그때 용단을 내려주시면 됩니다. 절대 불가 원칙이라던가 그러신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러면 내일 오전에 그들에게 직접 전화를 넣으실 거란 말씀이신 거죠?”
“네. 두 사람 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거죠? 그대로 전화 요청을 하려구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그들과 통화해보시고 이야기를 진행하시죠.”
“네. 그러면 내일 통화 녹취 파일 보내드리고 연락 다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상상만으로도 통쾌한, 그들도 이제 심장이 덜컹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마음의 소리를 지르며 박 교수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전화기만 보고 있던 박 교수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정오가 되기 30분 전, 강 피디에게서 카톡으로 파일이 한 개 전송되어왔다. 바로 음성파일을 틀었다.
익숙한 어눌하지 그지없는 한국어학과장의 목소리와 강 피디의 통화내용이었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외교대학교 한국어학과 학과장이시죠?”
“네? 누구시죠? 어디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J방송사 강 해진 피디라고 하는데요. 저희가 취재요청을 드리려고 전화를 학과로 몇 번이나 드렸는데, 연락이 없으셔서 이렇게 개인 연락처를 찾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디라구요? 누구요?”
“한국의 방송국 피디입니다. 몇 번이나 학과에 연락드렸는데요. 연락, 받지 않으셨나요?”
“아, 네. 전화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제가 드릴 말씀도 없고 전화받을 이유도 없어서요.”
“무슨 일 때문에 전화드렸는지 아직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요. 메시지에도 어떤 사안 때문이라고 말씀 남기지 않았는데요. 무슨 사안인줄 아시고...?”
“네? 아! 그게, 어찌 되었든 저는 방송국에서 연락을 받을 일도 없고...”
“다름이 아니고, 2년 전에 있었던 한국인 박 교수님 성추행 누명 사건에 대해서 저희가 그쪽으로 취재를 나가려고 하는데요.”
“네? 취재를 와요? 여기를요? 정말요?”
학과장은 정말로 많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으며 몇 번이나 직접 찾아올 거냐고 피디에게 되물었다.
“저희가 그쪽에 가면 취재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도 여쭙고, 사건이 그 학과에서 벌어진 것이라, 아무래도 학과장님이 당시에서부터 지금까지 학과장을 맡고 계시니 이 사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아니, 제가 뭘 잘 알고 있다는 건지... 그리고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지금 박 교수님이 한국에 와 계신 건 알고 계신가요?”
“네. 한국에 가셨다고 듣긴 했는데...”
“어떻게 알고 계시죠? 원래 형사 재판 중에는 법적으로 외국인일 경우, 출국금지 상황 아닌가요?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오셨다고 하던데, 어떻게 아셨죠?”
“네? 아니, 제가 그게 한국어를 잘 못해서요. 잘 못 말했나 봅니다. 저는 그분이 한국에 가셨는지 그런 건 잘 모르고요.”
“그런데 저희가 만나서 취재를 시작하고 사건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억울하다고 주장하신 부분이 너무 많아서 크로스 체크도 하고 아무래도 타이완에 직접 가서 취재를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래서 조만간 그쪽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2년도 더 된 사건을 뭘 지금 와서 취재를 온다고 새삼스럽게 그럽니까? 그때 학생들도 거의 졸업을 준비 중이고... 이제 모두 잊어가고 있는데, 굳이 다시 문제를 들추는 것은... 그리고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인가 본데... 그건 박 교수님의 일방적 주장이고, 진실은 완전히 다릅니다.”
“네. 그래서 연락드린 건데요. 말씀하시는 그 진실이 뭡니까? 정말로 성추행이 이루어졌다고 보시는 증거나 근거가 있으신 건가요?”
“아니, 그게... 제가 아는 건 아니고, 학교 성평회 보고서에 이미 명백한 성추행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거기에 따라서 검찰에서도 기소한 거고, 재판해서 유죄로 이미 다 종결된 사안인데 지금 와서 뭘...”
“학과장님. 지금 하시는 말씀이 오락가락해서 저는 잘 못 알아듣겠는데요. 저희가 2주 안에 준비해서 타이완에 들어가게 되면 취재에 응해서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
“여보세요?”
“제가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요. 그럼 전화 끊습니다.”
“여보세요, 학과장님?”
“뚜뚜뚜....”
녹취파일은 학과장이 도망가듯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며 끝이 났다. 바로 강 피디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들어보셨어요?”
“네. 강 피디는 학과장이랑 직접 전화를 해보니까 어떻던가요?”
“이거 완전히 100%인데요. 누가 들어도 자기네가 찔려서 움찔거리는 각입니다. 확실하게 감 잡았습니다. 이거 방송 나가면, 대박이겠어요. 아참! 그런데 주영희에게도 전화를 계속 시도했었는데요. 피하고 피하다가 받아서ㅠ한다는 말이... 이 사람, 한국 방송과는 절대 전화 같은 것도 안 하고 방송에도 협조를 못하겠다며 어눌한 한국어로 막 소리 지르더라고요. 제가 황당해서 녹취도 못했습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한국어로 자기 말만 하고서는 그냥 끊어버렸어요. 한국 언론은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답니다.”
“원래 그런 놈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박 교수님은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으세요?”
“나는 단 한 번도 그 사람과 말을 섞어본 일이 없습니다.”
“네? 그런데도 이 지경까지 일을 만들고 철천지 원수처럼 몰아세운 거예요?”
“나도 왜 그렇게까지 한 건지, 그저 내가 본보기로 자기를 띄우기 위한 땔감 정도로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래서 이 녹취까지 포함해서 데스크랑 오늘 얘기해서 촬영 나갈 일정을 확정받으려고 합니다. 회의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일단 회의가 끝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고 찾아뵐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은 흥분해서 들떠있는 강 피디의 목소리를 들었던 울림이 아직도 수화기 너머에서 들여오는 것 같았다. 매번 답답해하고 있을 아내에게 음성파일을 전달했다. 근무 중이었을 아내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