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 사는 악녀 - 125

작별 인사를 고하다.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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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다니요?”


제임스가 박 교수의 돌발적인 발언에 놀라서 다시 정확한 의중을 물었다. 출국금지라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지 않느냐는 것을 돌려서 묻는 것이었다.


“가족도 없는데 이렇게 비싼 아파트에 사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래서요.”

“아! 그럼 어디로 가려구요?”


제임스는 무슨 소리인가 놀랐다가 이사를 한다는 이야기로 이해하고는 다시 놀란 목소리를 차분히 하며 물었다.


“지금 내가 여기 사는 걸 주영희가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모르는 곳으로 가려고 해요.”


박 교수는 차마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것을 제임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제임스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박 교수의 결심이 변하기 전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택하겠다는 일종의 스스로에게 건 제한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으음. 갈 곳을 정하긴 했어요?”


제임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곳으로 가는 대로 제임스에게 알려줄게요. 그전에 너무 살림이 많아서 혹시 제임스가 불쾌하지 않다면 사용하지 않은 많은 물건들이 있어서 아이들 것도 그렇고 좀 챙겼는데 짐이 좀 돼서요. 언제 편할 때 저녁이나 같이 해요.”

“그래요. 시먼딩 근처에 우육면 맛있게 하는 전통적인 가게가 있는데, 언젠가 한번 소개한다고 하고서는 내가 근처에 갈 일이 없어서 같이 못 갔었네요. 내일모레 저녁 7시에 내가 여기서 출발하면서 전화할게요.”

“그래서 그럼 모레 봐요.”


전화를 끊고 다시 판판에게 오랜만에 라인을 통해 연락을 취했다.

박 교수: 판판! 잘 지내니?

판판은 이미 졸업을 하고 아빠의 교회가 있는 타이중에서 아빠의 교회일을 돕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연락을 취하면 바로 답변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젊은 아이들이 매일같이 핸드폰을 손에 쥐고 사는 것에 비하면 교회일 때문에 바빠 라인에 대한 답은 언제나 늦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 판판에게서 답변이 왔다.

판판 : 교수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박 교수: 응. 판판과 판판 아버지의 기도 덕분에.

판판 : 2심 재판은 아직도 시작이 안된 거예요?

박 교수: 응. 당분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아.

판판 : 어떻게 그럴 수가 있대요? 아빠 친구분 중에 유명한 변호사분들 지난번에 소개시켜 드렸던 분들, 다 이야기해보셨어요?

박 교수: 응. 판판이 여러 가지로 힘을 써줘서 그래도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다.

판판 : 결과가 그렇게 나왔는데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박 교수: 재판이 열리지 않으면 그것조차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나저나 한국으로 대학원 진학하고 싶다고 하더니 아직도 생각 중이야?

판판 : 교회일이 생각보다 잡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요. 한국에서 선교단이나 다른 자매교회를 맺다고 하는 이벤트로 있고 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이제 여름방학 시작하며 또 꼬마들 여름방학 캠프 준비해야 하고...

박 교수: 판판이 효녀네. 엄마 아빠가 든든하시겠네. 판판, 그동안 고마웠어.

판판 : 네? 갑자기요? 무슨 일 있으세요?

박 교수: 응. 당분간 타이베이를 떠나 있으려고 해.

판판 : 왜요? 교수님 혹시 가족분들 다 가셔서 힘드세요? 제가 아빠한테 말해서 조금이라도 생활비 보내드릴 수 있는데, 계좌 좀 알려주세요.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그냥 넘어가셔서 못 부쳐드렸잖아요.

박 교수: 아니야. 그렇게까지 신세 지면 안 되지.

판판 : 무슨 신세예요. 하나님이 분명히 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다 밝혀주실 거예요.

박 교수: 그래. 판판하고 부모님한테 감사하다는 인사 전하려고 연락했어.

판판 : 교수님. 힘내셔야 해요. 어디로 가시려구요?

박 교수: 일단 타이베이를 떠나 있으려고 해. 주영희도 하도 난리를 치고 그래서...

판판 : 그러셨군요. 알겠어요. 많지는 않지만 그냥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은행 계좌 알려주세요.

박 교수: 아니야. 그러지 말자. 그동안 너무너무 고마웠어.

판판 : 왜 어디 멀리 가시는 분처럼 그러세요? 무섭잖아요.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잠시 타이베이를 피해있는 거라면서요? 교수님 어디 계시든 저하고 부모님이 기도할게요. 우리 교인들에게도 교수님 건 이야기해서 함께 기도해달라고 말할게요.

박 교수: 그래. 고마워.

판판 : 2심에 제가 또 증인 가서 서면 분명히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판판이 자꾸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는 이야기를 치는 것을 보며 조금씩 조금씩 박 교수의 눈앞이 흐려졌다. 종교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가족들이 떠나고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저쪽 안 보이는 하늘을 보며 대화를 걸었던 그 대상을 판판이 지금 다시 언급하고 있었다.

박 교수: 그래. 그럼 잘 지내고. 혹시 한국 대학원에 가거나 한국에 유학 가려고 하면 내가 부족하긴 하지만 추천서랑 학교 추천해줄 테니까 오늘내일 생각해보고 알려줘.

판판 : 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당분간 부모님 교회를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박 교수: 그래. 아프지 말고, 늘 건강하고. 부모님께도 안부 전해줘.

판판 : 네. 교수님도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또 연락 주세요.

그렇게 판판까지 연락을 마치고 한국 교회 목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타이베이에 있는 한국 교회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중에 주재원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교회를 찾은 것은 박 교수가 먼저였다. 종교도 없는 박 교수가 그와 연락을 했던 것은 한 가지 이유였다. 몇 되지도 않는 한국 교인들 사이에서 박 교수에 대한 터무니없는 루머가 나돌기 시작하면서 타이베이 대표부에 압박을 할 요량으로 연락을 취했다가 다혈질의 목사가 루머를 퍼트리고 다니는 교인들과 마찰이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부터였다.

목사는 교회에서 집과 차를 제공받고 월급을 받으며 계약직으로 그곳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아이가 없이 아내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는 거의 중국어를 하지 못했고, 그의 아내가 눈치가 빨라 중국어를 배워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였다. 박 교수의 가족들이 모두 있을 당시 연락을 했던 터라 차가 있는 그가 근처 자오씨 온천이나 바다를 보러 바람을 쐬러 함께 드라이브를 가는 것을 몇 번 정도 했던 터였다. 오랜만의 박 교수의 전화에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응대했다.


“아이고,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격조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털털한 목사는 까칠할 때는 여지없이 불같은 다혈질이었지만, 이제 박 교수와는 1년여의 교류를 통해 목회자 특유의 따스함으로 그를 보듬듯 하는 태도를 취했다.


“아닙니다. 제가 자주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에 진전도 없고 해서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다름 아니고, 이제 여기 생활을 정리하려고 인사차 연락드렸습니다.”

“예?”


목사가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로 멈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지난주에 그 한국어과의 한국인 교수라는 교수님 말고 있다는 박 교수인가 하는 작자가 우리 장로한테 성이 같아서 자기가 아주 곤욕스럽다는 둥 어쩌고 떠들고 다니길래 그런 사람이 교수랍시고 같은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는 거냐고 제가 면박에 면박을 줬던 일이 있었는데, 많이 힘드신 상황인 겁니까?”

“그냥 1심도 그렇게 끌더니 지금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나가고 있는데 재판도 열리지 않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미루고 막고 있는 것이 보여서 이제 그냥 정리하려고 합니다.”

“후우! 교수님이 오죽하시면 그런 결정을 내리셨겠습니까? 지난번에 한국에는 잘 다녀오신거구요?”

“네. 가족들과 한 달 함께 있다가 왔습니다. 지금 이 집을 지난번 부목사님이 이사하시는 게 어렵다고 하셔서 그대로 빼는 걸로 정리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워낙 좋은 입지를 둔 탓에 아이가 많은 부목사의 낡은 집이 값만 비싸다면서 박 교수가 살던 집에 이사시기를 맞출 수 있다면 들어오고 싶다고 계속 기다렸었는데 그 낡은 집의 집주인이 두 달치 보증금을 모두 떼이고 위약금까지 내놓지 않으면 절대 내줄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어그러진 입주 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셨는데 확실하게 누명을 벗는 모습을 보여드리지도 못하고 이렇게 발을 빼는 것 같아서 영 마음이 안 좋고 찝찝하네요.”

“지난번 제 집사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이미 예상했던 바입니다. 이대로 교수님이 혼자만의 힘만으로 이 나라의 입법위원부터 언론, 국립대학교, 교육부, 검찰, 법원까지 모두 대적하는 것이 중과부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들은 결코 자신들의 민낯이 드러나 잘못이 드러날 위험을 부담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겠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재판이고 뭐고 일이 터졌을 때 다들 그냥 한국에 들어가라는 말을 들었던 게 맞는 건가 하는 후회도 좀 듭니다.”

“뭐 후회까지. 지금이라도 다 지워버리고 다시 들어가시면 되는 거지요. 그나저나 들어가시기 전에 식사라도 한번 함께 하시지요.”

“저는 3일 후에 집 정리하고 떠납니다. 드릴 그림액자 하고 몇 가지 선물도 있고, 남겨둔 옷 짐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 교회에 좀 맡겼으면 해서요.”

“아, 그러셔도 됩니다. 그러면 내일은 좀 그렇고. 모레 점심 어떠신가요?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 끝내는 대로 나가겠습니다. 아점을 함께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나씩 연락을 정리하고 짐도 정리하고 제임스에게 줄 것과 목사 내외에게 줄 짐들을 챙기고 묵묵히 부동산업자가 요구한 대로 냉장고와 싱크대를 비우고 물걸레로 깨끗하게 닦고 샤워를 하며 욕실과 화장실도 깨끗하게 정리했다. 세제와 물로 깨끗하게 정리되는 집에 비해 정작 박 교수의 마음속은 계속 복잡해져만 갔다.


정작 전화해야 할 마지막 곳에 전화를 아직도 못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주홍글씨 때문이었다. 일이 터지고 나서 대학에 전화를 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대학교수라는 직업은 대학사회라는 곳을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고, 그렇다면 돌아가더라도 받아줄 곳이, 돌아갈 곳이 없다면 돌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박 교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일이 터지고서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학교의 지도교수였던 이나 다른 동기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러 이 사태에 대해 그들이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왜곡해서 알고 있어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는지 등등을 직접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교통상위의 중국 유학파 비서관이 외교부의 압박에 발을 빼겠다는 마지막 통화를 하면서 이야기했던 내용이 박 교수의 뇌리에는 강하게 박혀 있었다.


“교수님. 저는 조금 이해가 안 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에서 박사까지 공부하시고 교수를 하신 분이 저 같은 비서관 따위에게 도움을 청하실 필요가 있나요?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테고 이 바닥이 다 그렇게 연줄과 파워로 이루어지는 곳인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왜 교수님이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일을 풀어나가시지 못하는지 저는 좀 이해도 안 되고 답답합니다.”


당시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답하지 못했었지만, 정말로 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그곳을 알지 못하고 그곳을 나와 정치적인 행보를 하는 이들만 보았을 것이다. 그곳의 학자라는 가면을 쓴 이들이 얼마나 서로를 질시하고 물어뜯지 못해 틈만 노리는지, 지도교수라는 자조차도 무슨 일만 생기면 얼마나 트집을 잡고 생채기 내려고 안달인지 그가 알 턱이 없었다. 그가 일하는 공간에서는 서로 간의 양해와 묵인 속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뒤를 봐주고 또 서로가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거래하고 동문이라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꼭대기를 자신들만이 지킬 수 있다며 으스대는 꼴만 봐왔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과 대화할 때 스승이 꼴 같지도 않은 것들이라며 욕하는 이른바 ‘1동 것들’의 세계는 결코 그렇게 끈끈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박 교수에 향해서 그리 끈끈하지 않았다. 스승의 영향을 받으며 외국어를 공부했고, 해외의 대학에 지원하는 박 교수를 보며 지도교수는 시비 걸면 말했었다.


“도대체 우리 대학의 국문과 출신이 왜 가만히 여기서 교수 짓을 하지 않고 해외의 대학에 그것도 불려 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팔아가면서 나가려고 하느냔 말이다. 여기서 배움도 부족한데 뭐 그렇게 외국어 잘하는 게 대수라고 그걸 무기로 그렇게 나대려고 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박 교수가 외국대학을 최초로 나가 경력을 쌓고 여러 가지 일을 만들고 시대의 흐름이 한류와 맞물리며 한국학이라는 것으로 확대되자, 박 교수의 까마득한 후배들 중에서는 서울대 박사학위를 받지 않고 박사 수료만 하고 해외대학으로 유학을 나가거나 아예 석사만 마치고 박사를 해외대학으로 나가겠다는 이들이 생겨났다. 우연히 한국에 들어와 지도교수와 이제 해외 대학으로 대학원을 나가겠다는 여자 후배, 이렇게 셋이서 식사를 하는데 지도교수는 초창기 박 교수에게 날렸던 불화살에 대한 기억은 모두 지웠는지 너무 인자한 표정으로 그 여자 후배에게 말했더랬다.


“그래.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지. 자네가 더 넓은 곳에서 공부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내가 높이 산다. 여기 박 교수도 내가 초창기에 추천해서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에 이른 거 아닌가?”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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