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uch’는 독일어로 ‘연기’라는 뜻이다. 단어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연기에 가까운 훈제 향이 매우 강하게 나는 이색적인 맥주다. 영어로 번역하면 스모크드 비어(Smoked beer)정도 되시겠다. 이 강한 훈연 향은 맥아를 훈제해 말려서 양조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인데, 마치 훈제한 고기나 소시지를 같이 먹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기에 충분한 향이다.
이 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일에서는 주로 바이에른 북부의 밤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만 소비되는 지역 맥주로서의 경향이 강하다. 가장 많이 알려진 양조장은 밤베르크의 슐렌케를라. 독일식 라우흐비어는 하면 발효법으로 만들지만 훈제 맥아로 만든다는 점에서만 특이할 뿐이고, 상면발효법으로도 양조할 수 있기 때문에 에일이나 스타우트를 같은 방법으로 양조하여 만들기도 한다.
13. 메르첸비어(Märzenbier; Märzen)
독일어로 3월을 뜻하는 ‘메르츠(März)’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른 봄에 양조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르게 된 맥주, 되시겠다. 냉장고가 없던 과거에는 여름에 맥주를 제조했다가 팍 쉬어버려 식초 맛을 내기가 십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겨울이 맥주 양조 시즌이었고 그 외에 계절이라고 해도 여름은 꿈도 못 꾸고 그나마 기온이 낮은 편인 초봄이나 초가을에 맥주를 양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살펴본 5월의 맥주처럼 초봄 맥주에 속하는데, 이후 양조 기술과 냉장 설비의 발달 덕에 대중적인 라거 계열의 맥주에 밀리게 되었다.하지만 바이에른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전통을 고수하며 생산하는 양조장들이 아직도 제법 많이 남아 있다. 대개 맥아와 홉의 함유량이 많아 일반적인 필스너보다는 맛이 좀 진하고 알코올 도수도 약간 높은 편이며, 몰팅을 오래 한 맥아를 주로 쓰기 때문에 색깔도 투명하기보다는 밝은 갈색을 띤다.
영어권에서는 오스트리아에서 생산하는 메르첸비어를 ‘비엔나 라거(Vienna Lager)’라고 부르기도 하며 간혹 노란색이 아닌 밝은 갈색을 띠는 이러한 맥주들을 ‘엠버 라거’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 옥토버페스트비어(Oktoberfestbier)
이름 그대로 옥토버페스트에 사용되었던 맥주다. 사실 옥토버페스트가 열리기 전부터 있었던 맥주인데, 원래는 바로 위에 설명한 메르첸비어와 사실상 동일한 맥주, 되시겠다. 원래 옥토버페스트는 그 해 봄에 양조한 맥주가 맛이 가서 버리지 않기 위해 빨리 소진시키기 위한 이벤트로 일부러 축제를 만든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 깔려 있다.
그런데 바이에른 지역에 한정되었던 축제였던 옥토버페스트가 전 세계적 맥주 축제가 되면서 뮌헨과 바이에른의 양조장들이 앞다투어 축제 기간 동안 팔아치울 맥주를 기획하여 내놓게 되었고, 옥토버페스트비어는 축제 분위기와 맞물려 한정판 맥주라는 희소성까지 갖추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이것도 위에서 공부한 헬레스처럼 옥토버페스트에 참가하는 뮌헨 소재 양조장의 맥주에만 붙일 수 있는 명칭이라, 뮌헨 이외의 양조장들은 옥토버를 생략하고 ‘페스트비어(Festbier)’라고 표기하여 출시하고 있다.
14. 발틱 포터(Baltic Porter)
18~19세기 영국에서 북유럽 발트해 연안 국가로 수출하던 포터(Porter) 맥주. 앞서 공부한 바와 같이, 원래 포터 맥주는 18~19세기 대영제국의 대표 무역품 중 하나로 영국의 식민지를 비롯하여 여러 국가에 수출되었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폴란드, 프로이센, 발트 3국, 러시아 제국 등에 둘러싸인 발트해 연안 국가에 주로 수출되었다. 당시 수출되던 포터는 현대의 대중적인 포터와는 달리 알코올 도수가 7%대로 다소 높고 단 맛과 쓴 맛이 혼재된 맥주였다.
이후, 포터의 인기가 페일 에일이나 라거 등에 밀려 점점 취급하는 곳이 적어지자 수출량이 급감했고, 점점 영국 내에서도 포터를 생산하는 양조장들이 격감하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오히려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양조장들에서는 영국의 포터를 모방하여 자체적으로 포터를 생산했는데 이것이 바로 발틱 포터이다.
영국 본토의 재료가 아닌 독일이나 체코, 폴란드에서 나고 자란 재료들을 사용했고, 영국식 상면발효 에일이 아닌, 하면 발효 라거로 만들었지만 기본적인 포터가 가진 속성은 그대로 유지했다. 캐러멜 맥아(Malt)를 사용했기 때문에 캐러멜이나 검붉은 과일 맛 등을 지녔으며, 검은 맥아(Dark Malt)에서 나오는 초콜릿, 커피 맛 등이 은은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크래프트 맥주 문화가 유행하면서 발틱 포터는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과 함께 스트롱 다크 에일(Strong Dark Ale) 부류로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에서 각광받아 많은 상품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대적 재조명에 따라 폴란드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발틱 포터들도 시장에 제품을 출시하게 된다. 대표적인 발틱 포터는 러시아 발티카(Baltika) 양조장의 발티카 6포터, 라트비아의 ‘Aldaris Porteris’, 미국의 스머티노즈(Smuttynose)의 발틱 포터 등이 있다.
15. 미국식 부가물 라거(American Adjunct Lager)
가장 일반화된 미국 스타일의 맥주, 되시겠다. 중간에 ‘부가물’이라는 용어가 붙은 이유는, 보리와 홉의 사용량을 줄이고 옥수수나 쌀 등의 녹말을 섞었기 때문인데, 본래의 목적은 앞서 한번 설명했던 것처럼, 맛과 향을 낮추는 대신 생산단가를 절감하고 대량생산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한 미국식 상업주의 발상에서 출발했는데, 맛이 대중들에게 어필하면서 주류로 자리 잡은 라거, 되시겠다.
진정한 맥주 마니아들은 보리와 홉의 향과 맛이 떨어져서 물맛 혹은 시금털털한 오줌에 가까운 맛이라며 폄하하지만, 의외로 그 강하지 않은 부드러운 느낌과 가볍게 마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현재 전 세계 70%의 시장을 아메리칸 라거가 잡게 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버드와이저, 밀러, 쿠어스 등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미국 맥주와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의 유명 맥주는 아메리칸 라거 스타일이다.
한국의 맥주도 하이트진로의 맥스와 스타우트, 오비맥주의 골든 라거, 롯데의 클라우드, 제주특별자치도의 제스피, 세븐브로이 IPA와 일부 소규모 양조장의 맥주를 제외하면 전부 여기에 속한다.
앞서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부가물(옥수수나 쌀)을 넣었다고 하여 무조건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미국식 부가물 라거가 아닌 경우에도 보리 맥아와 홉 이외의 것을 첨가하는 경우가 흔하게 있으며 맥아의 함량이 높고 나머지 부가물의 비중이 낮을 경우에는 나름대로 라거의 맛을 유지하는 맥주들도 많기 때문이다.
또 맥주의 맛이 밍밍 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부가물 때문만이라기보다는 원액을 만들어 물과 섞어 대량 생산하거나 여기에 탄산가스를 인위적으로 가하는 싸구려(?) 공법에도 큰 책임이 있기 때문에, 모든 부가물 라거를 미국식 부가물 라거로 폄하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면도 없지 않다.
다양한 맥주 양조장 중 유명하고 유서 깊은 브랜드의 맥주에도 보리 맥아 외에 옥수수나 쌀의 녹말질을 첨가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벨기에의 유서 깊은 브랜드인 스텔라 아르투아나 레페 브라운 같은 맥주에도 옥수수가 들어가며 이탈리아의 페로니, 터키의 에페스, 태국의 창, 필리핀의 산 미구엘, 라오스의 비어라오, 중국의 칭다오 맥주와 옌징 맥주 등 평판이 높은 유명 해외 맥주에도 맥아 이외의 쌀이나 옥수수 등을 넣어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 맥주와 버드와이저를 위시한 미국식 부가물 라거와 일본&한국식 드라이 맥주의 맛은 매우 차이가 많은데 이들 맥주는 원가절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맛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부가물을 사용한 것이니만큼 부가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고 홉 역시 아낌없이 투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물을 넣어 원액을 희석시키는 데 있다는 점. 이들 브랜드는 맥주 양조과정에서 물은 결코 넣지 않는다.
- 라이트 라거(Light Lager)
아메리칸 라거의 일종으로 라거에 탄수화물과 알코올 함량을 줄여 만든 맥주. 일반 맥주에 비해 열량이 낮기 때문에 ‘라이트’라는 말이 붙었다. 얼려서 걸러내는 아이스 필터드 공정을 거치는 것이 특징으로 '라이트'나 '아이스'라는 말이 붙은 모든 맥주가 여기에 속한다.
16. 드라이 맥주
1980년대에 출시된 ‘아사히 슈퍼 드라이’를 필두로 시작된 미국식 부가물 라거의 강화판이다. 정작 미국식 부가물 라거에서 물을 더 타서 만든 맥주임에도 역으로 맥주의 본고장에 역수출되는 이상 현상을 보이는 중이다. 서양 맥주 중에도 ‘SUPER DRY’라고 쓰여있는 맥주들은 다 이 맥주의 공법의 영향을 받은 제품군이다. 맥아 함량을 대폭 줄였기 때문에 맛은 매우 약한 편이며 특유의 차가운 이물감이 의외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 시장에 널리 퍼지게 된 맥주, 되시겠다.
앞서도 설명했던 바와 같이 맥주에 물을 타는 목적은 단 한 가지뿐이다. 생산비 절감과 판매량 상승이다. 맥주의 맛과 질적인 면으로 보자면 당연히 그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맥주 마니아들에게는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일본에서 기술을 그대로 베껴오는 것에 익숙한 한국 맥주들은, 옥수수 전분을 많이 쓰기 때문에 드라이 맥주의 ‘차가운 이물감’이 잘 느껴진다. 아사히의 드라이 맥주와 비교하면 농도에서 1% 정도 차이가 나긴 하는데, 심리적인 효과를 빼면 실제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드라이 맥주의 본고장인 일본에서는 청출어람으로 맥아 함량을 더욱더 줄인 ‘발포주’까지 탄생하기에 이른다.
드라이 맥주는 ‘청량감’을 강조하는데, 어려서부터 탄산음료를 즐기던 이들이 맥주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면서 가볍게 마시기에는 좋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아주 주효하게 먹혔다. 일본에서는 맥주의 문화가 식사 전에 가볍게 입가심을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 청량감 정도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뿐, 맥주 본연의 맛 따위를 음미할 문화가 성숙하지 않았던 탓이 크다.
하이트진로에서 수입한 호주 드라이 브랜드
심지어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도 아사히 슈퍼 드라이의 매출은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문화권에서 반주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는 80년대 오비맥주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곡을 배경으로 깔고 만화가 이현세를 모델로 기용한 TV 광고가 대히트를 쳤다. 루이 암스트롱의 명곡을 이 광고 때문에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진정한 마케팅의 성공사례로 광고계에 전설이 되었다.
- 발포주(發泡酒; はっぽうしゅ)
드라이 맥주에서 원재료를 더 줄여서 아예 ‘맥주’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만든 유사 맥주를 말한다. 원재료 중 맥아 함량이 50% 이상에 곡류, 호프, 물 이외의 부재료는 법령에 지정된 것으로 맥아 대비 5% 이내로 첨가된 것에 한해 ‘맥주(ビール)’로 표기할 수 있으며 50% 미만은 발포주.
명칭의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거품나는(發泡) 술(酒)’이란 뜻으로, 맥아함량이 미달이니 맥주라 부를 수 없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단, 맥아 또는 맥류가 포함되어 있어야 하므로 샴페인 등의 스파클링 와인이나 탄산을 넣은 탄산주는 들어가지 않는다.
한국에서 2017년 4월 하이트진로가 최초로 ‘필라이트’라는 이름의 발포주를 발매했다. 사실 한국에서는 주세법상 ‘발포주’라는 분류 자체가 없고 맥아 함량이 10% 이하면 기타 주류로 분류된다. 일본의 경우 맥주의 맥아 함량 기준이 50%인데 반해, 한국은 10%로 낮다. 따라서 한국에서 발포주라 불리며 팔리는 술들은 일본보다도 맥아 비율이 훨씬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 무알코올 맥주
이것은 알코올 함량이 1% 미만이거나 아예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탄산음료에 해당한다. 알코올의 끓는점이 물보다 낮으므로 일반 맥주를 적절하게 가열해 알코올만 증발시켜 제거하거나 기압을 이용해 가열 없이 알코올만 제거하는 기법이 쓰인다. 무알코올 맥주는 맥주가 아니라 탄산음료에 해당되기 때문에, 주세법이 적용되지 않아 같은 용량의 경우 당연히 맥주보다 훨씬 싸다.
일반적으로 알코올 섭취를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교도와 미성년자, 그리고 임산부를 위한 상품이다. 지방간 등으로 술을 마실 수 없거나, 운전 등 알코올에 민감한 일을 해야 하는데 맥주는 마시고 싶은 사람들도 찾는 편이다. 실제 유럽에서 생산하고 있는 대부분의 무알코올 맥주에는 아랍어 표시가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