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맥주 문화는 메이지 유신 시기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맥주 강국들의 맥주 양조 기술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일본어로 맥주는 ‘ビール(비루)’라고 하는데, 네덜란드어의 bier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대 네덜란드어의 bier는 발음이 영어의 beer와 거의 흡사한 발음이다.
그 시작은 유럽 맥주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수입된 미국식 부가물 라거 맥주의 영향을 받아 보리 맥아와 홉뿐 아니라 쌀이나 옥수수 등이 재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앞서 공부했던 것처럼 원액에 물을 계속 희석하여 ‘드라이 맥주’라는 맥주 아닌 맥주를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개발(?)하여 맥주의 퇴화(?)를 주도하였다.
반면, 에비스에서는 예전부터 보리만을 사용한 맥주를 양조했는데, 이후 가격대가 높은 프리미엄 맥주이라는 마케팅이 자리 잡히면서 각 맥주 브랜드 사에서는 적어도 한 종류 이상은 보리와 홉만을 사용한 정통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독일 옥토버페스트랑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맥주 축제를 열고 있다.
서유럽산 맥주만큼은 아니지만 일본 맥주도 세계적으로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도 한때 일본 맥주의 최대 수입국이었다. 하지만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에 따른 일본 상품 불매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에 큰 타격을 입고 주저앉아 버렸다.
2019년 10월에는 재무성 통계상 일본 맥주의 수입액이 '0원'으로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2020년에는 불매운동이 약해지면서 다시 유통이 재개되었으나 불매운동 이전만큼의 점유율을 회복하진 못하고 있다.
일본 맥주 브랜드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1. 기린맥주(麒麟麦酒, Kirin)
1907년에 세워진 맥주회사이다. 상표에 그려진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기린, 되시겠다.
◦기린 이치방 시보리(キリン一番搾り)
기린맥주의 간판 제품. 필스너 공법으로 제조되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오리지널 필스너인 필스너 우르켈과 비교할 때 보리향이 더 강화되어 일반 라거와 필스너의 중간까지 끌어올린 맥주. 다만, 홉이나 보리 풍미보다는 알코올 향이 강하기 때문에 홉의 쓴맛보다 알코올향을 더 안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독하다고 느끼기도. 국내에 수입되는 기린 이치방은 병맥주가 일본산이 아닌 중국산이다.
다행히(?) 캔맥주는 일본산이니 본토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병맥주 마시면서 맛있다고 바보짓하지 말고 캔맥주로 마실 것을 추천한다.
◦기린 라거 비어(キリンラガービール)
기린맥주에서 최초로 생산한 맥주. 국내에는 수입되지 않고 있으며, 가을이 되면 캔에 단풍무늬가 그려진 한정판이 나온다. 위에 언급한 기린 이치방과는 다르게 옥수수, 쌀 등이 들어가는 아메리칸 라거 스타일의 맥주이며, 라거 스타일이라 맛도 기린 이치방보다 더 연한 느낌이 강하다.
2. 아사히 맥주
한국에서는 롯데그룹의 (주)롯데아사히 주류에서 수입, 판매하고 있다. 일본에는 후쿠시마와 후쿠오카 등지에 공장이 있으며 중국에도 공장이 있다. 앞서 기린과 같이 주로 국내 수입품 중 캔은 일본산(후쿠오카 공장), 병은 중국산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참고할 것.
• 아사히 슈퍼 드라이(アサヒスーパードライ, Asahi Super dry)
‘Super dry’라는 이미지 마케팅을 내세우며 일본 열도에 드라이 맥주 열풍을 불러온 맥주로 80년대 초중반 부도위기까지 몰렸던 아사히를 1위로 다시 복귀시킨 효자 상품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맥주 중 하나로 꼽힌다. 드라이 맥주가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호도시켜 마치 새로운 공법의 맥주인 것처럼 마케팅에 직접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 주효했다.(그래서 뭐든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고 하는 거다.)
공법 그대로 맛이 상당히 약하고 신맛이 나는데, 신기한 것이 아사히 슈퍼드라이 맥주의 광고에서도 오히려 이 신맛을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인 양 강조하는 후안무치 콘셉트로 밀어붙였다. 어차피 드라이 공법이라는 것이 맹물을 더 섞어서 맥주의 본질을 흐린다는 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실제로 원료 함량을 보더라도 기존 맥주에 비해 맥아 함유량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음에도 그걸 체크할 수준의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 맹점. 일본만큼이나 우매하면서도 광고와 브랜드 이미지에 혹해서 일본 맥주를 찾는 무지한 이들이 많은 한국에서도, 맥주 자체로는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는 맥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수입맥주 순위에 항상 이름을 올렸었다. 원가를 줄이기 위한 이 공법 때문에 한국 맥주가 이 드라이 맥주와 맛이 가장 흡사하는 것은 맥주 마니아들은 모두가 아는 사실.
• 아사히 슈퍼 드라이 블랙(アサヒパードライ ドライブラック, Asahi Super dry black)
아사히에서 나오는 흑맥주. 슈퍼 드라이 맥주에 흑맥주 맥아를 혼합, 흑맥주 버전으로 만든 다크 라거 계통의 드라이맥주 버전. 사실 단종되어 지금은 생산되지 않지만 독일 뮌헨의 흑맥주 제조방식으로 만든 흑맥주였던 아사히 쿠로나마(アサヒ黒生, Asahi Kuronama)가 있긴 했다. 맛도 좋고 괜찮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또 단가 측면의 경제성에 밀려 단종되고 말았다.
• 아사히 더 마스터 필스너(アサヒザ・マスター, Asahi The Master)
2009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 비어 챔피언십 필스너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고 대대적 광고했던 맥주. 캔 표면에 요철장식이 되어 있다. 100% 맥아를 사용하여 양조한 맥주로, 맛은 아사히의 브랜드에 어울리지 않게 꽤 진하고 무게감 있다. 아사히 계열에서 드라이 맥주에 넌더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아사히도 제대로 된 맥주를 만들 줄 안다고 항의하듯 만든 라인업이었으나 역시나 제작 단가의 압박을 받으며 단종의 길을 걷고 말았다.
3. 삿포로(サッポロビール, Sapporo)
1876년 당시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맥주를 생산했는데, ‘삿포로 맥주 주식회사(サッポロビール株式会社)’는 1876년 당시 개척사의 차관이었던 구로다 키요타카(일본 제2대 총리)의 지휘로 세워진 일본 최초의 맥주회사인 ‘대일본맥주’의 후신으로,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개척사 맥주 양조소(開拓使麦酒醸造所)를 설립하여 다음 해에 냉제 맥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
일본에 제대로 된 맥주를 만들겠다는 국가적인 과제로 삼아 독일에 가서 맥주를 배워와서 맥주 공장을 어디에 지을까 고민하던 끝에 과학적인(?) 추론 하에 독일 뮌헨의 위도와 가장 가까운 위도 43도의 삿포로에 공장을 짓게 된 것이다. 실제로 맥주에 가장 중요한 맛을 결정하는 물맛을 위도가 결정한다는 설은 정설처럼 굳어졌는데, 뮌헨이 위도 47도이고 그것을 흉내 낸 삿포로가 위도 43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가 또 이와 유사하며, 1950년대 미국의 최대 맥주 공장이던 쉘리츠의 위치했던 밀워키가 위도 43도였다.
1886년 민영화된 삿포로 양조장이 삿포로 맥주회사(Sapporo Beer Company)의 이름을 갖추게 된다. 1887년에는 또 다른 맥주 회사 일본 맥주회사(Japan Beer Brewery Company)가 도쿄도[東京都] 시부야구[渋谷区]에 설립된 후 에비스(Yebisu) 맥주를 생산했다.
1906년 기린맥주사(社)가 삿포로 맥주를 인수하였고 1956년에는 니폰 맥주가 삿포로 맥주를 합병했으며 1964년 사명이 니폰 맥주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맥주 회사들의 복잡한 합병과 분리 과정에서 에비스 맥주 생산권이 삿포로 맥주에 흡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생산이 중지되었던 에비스 맥주를 1971년부터 다시 출시했다. 1988년 에비스 맥주 공장을 지바[千葉]로 이전한 후 그 자리를 복합단지인 에비스 가든플레이스(Yebisu Garden Place)로 개발해 1994년 개장하였다.
에비스 가든플레이스(Yebisu Garden Place)
사실 다른 라인업은 드라이 공법에 묻혀버렸기 때문에 추천할 것도 없지만, 홋카이도에서만 현지 한정으로 파는 ‘삿포로 클래식’은 꼭 마셔보라고 권한다. 내가 삿포로에 살던 시절, 현지 공장에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들렀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120여 년 전 처음으로 만들었던 삿포로 맥주의 레시피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점과 공장에 붙어 있는 시음장 겸 레스토랑에서 홋카이도의 특산물인 징기스칸과 함께 마시는 그 맛이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었다.(홋카이도산 양배추가 살아 숨 쉬는 것을 볼 수 있다.) 맥주 노미호다이(무제한 마시는 것)+ 징기스칸 다베호다이(무제한으로 먹는 것)는 이 공장 레스토랑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다.
삿포로 맥주 공장 레스토랑
홋카이도에, 삿포로에 가게 되면 공장 견학과 함께 이 레스토랑에서의 진정한 일본 최초의 맥주를 맛보고 올 것을 추천한다. 물론, 반드시 느끼하기 그지없는 본토 스타일의 징기스칸과 함께.
4. 오리온맥주(オリオンビール, Orion Beer)
오키나와에 위치하는 맥주회사로 거의 오키나와에서만 팔리다시피 하지만, 일단 돈키호테 등에도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구할 수 있다. 전술했던 아사히맥주 주식회사가 대주주로 있고 오키나와 이외 지역의 판매를 위탁받았기 때문에 캔에 아사히맥주 로고가 붙어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한국에도 수입되었는데 오리온 제과의 상표명과 중복이 된다는 황당한 이유로, 전 세계에서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오키나와 맥주(OKINAWA Beer)라는 이름으로 수입되고 있다. 오키나와에 가면 공장 견학은 필수코스.(견학도 무료, 시음도 무료)
지비루(地ビール)의 세계
일본에서는 사케도 그렇지만 양조장의 특성상, 맥주도 지방마다 각각의 특색을 살린 여러 종류의 지역 브루어리에서 생산되는 지역 특유의 크래프트 맥주가 있다. 이들 일본의 지역 맥주들을 통칭 ‘지비루' (地ビール)’라고 부르는데, 2012년 말 기준으로 일본 전역에 208개 업체가 있었다. 미국의 마이크로 브루어리와 마찬가지로 각종 혼합물 (과일이나 커피, 심지어 오호츠크해 유빙을 쓴 것까지) 이 첨가된 것이 많아 발포주로 분류된 것까지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연히 생산지역 이외에서는 거의 취급되지 않는데, 아주 예외적으로 경우에 따라 생산지역에서는 체인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도 있다. 최근 한국의 브루어리에서도 하는 것처럼 생맥주 상태로 병에 넣어 출하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유통기한은 단 1주일이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브랜드 몇 개만 소개한다.
• 히타치노 네스트(Hitachino Nest)
이바라키현의 지역 맥주로 상표에 부엉이 그림이 그려져 있어 일명 ‘부엉이 맥주’로 불린다. 마트 진열대에서도 고가에 속한다. 일본에서의 종류는 다양하나, 한국에서는 H Weissen, White Ale, Ginger Ale, Espresso Stout, Classic Ale, Red Rice Ale 정도만이 수입되고 있다. H Weissen은 깊은 밀맥주 맛을 내며, White Ale은 고수가 들어가 있어 특이한 맛을 느낄 수 있다. Ginger Ale 역시 특색이 있으나, 유사한 대체제로 Monteith's Summer Ale이 있어 그다지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다.
• 은하고원맥주(Ginga Kogen Beer)
일본 혼슈 북부 이와테현에 위치하는 은하 고원 맥주 양조장(Ginga Kogen Beer Co.LTD) 에서 만드는 맥주. 찾아보기는 쉽지 않으며, 가격도 제법 센 편. 헤페바이젠(밀맥주)에 속하며 풍부하고 부드러운 첫맛과, 약간의 클로브 향이 나면서 깔끔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눈이 많이 내리는 사와무치 마을의 맑은 물로 만들었다는 콘셉트로, 맥주 상표에 그려진 사슴 두 마리가 이 맥주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병맥주의 경우 파란색 병에 담겨서 포장된다.
• 코에도(COEDO)
일본 혼슈섬 사이타마현의 지역 맥주로 필스너 ‘루리(瑠璃)’ 를 포함해 5종을 생산하는데 한국에 수입되는 것은 페일 라거, 헤페바이첸, 블랙 라거 정도이다. 히타치노 네스트보다는 다소 저렴한 편이다.
• 얏호 브루어리(Yoho brewing)
일본 나가노현에서 1996년부터 시작된 양조장. 지방 맥주의 캔 시대를 연 주력 상품으로써 아메리칸 페일 에일인 ‘요나요나 에일’ 외에도 흑맥주 ‘TOKYO BLACK’, 벨기에 화이트 에일 ‘수요일의 고양이’, 일본 맥주 중에서도 비교적 강한 홉을 내세운 IPA ‘인도의 아오오니’ 등을 양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