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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틈이 Oct 27. 2019

미처 몰랐던 '워킹맘 아이'의 내공 세 가지

“엄마, 오늘 대성이가 내 양말보고 막 웃었어.”

“양말이 왜?”

“남자가 분홍색 신었다고”

“뭐가 웃겼을까?”

“그러니까. 난 어피치가 좋아서 분홍색 양말 신은건데…”

“그래서 어떻게 했어?”

“분홍색이 어때서? 그랬지 뭐.”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묻긴했지만, 속으로는 그려졌습니다. 


작년에 지인에게 카카오프렌즈 양말 세트를 선물받았습니다. 평소 어피치를 좋아하는 웅이는 그 중에서도 어피치가 그려진 분홍색 양말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빨아놓으면 가장 먼저 어피치 양말을 고릅니다. 처음 웅이가 어피치 양말을 신었을 땐 저도 “분홍색인데?” 라고 했었습니다. 보통 분홍색 양말은 결이, 파랑색 양말을 웅이가 신었으니까요. 제 말에 웅이도 잠시 망설이더니 “근데 난 어피치가 좋으니까~” 벗지 않더군요. 뒤늦게 아차싶어 저도 “맞아. 분홍색이 뭐 어때서. 우리 아들한테 잘 어울리네.”라고 했습니다. 



워킹맘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끔 ‘이것만 바뀌면 우리가 덜 힘들텐데’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첫 째로 고정관념을 꼽습니다. ‘엄마라면 아이 곁에 있어야 한다.’와 같은 것이요. 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어떤 환경에서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내 아이에게 어떤 돌봄이 필요한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아이 곁을 지킬 생각만 했었거든요. 복직을 하며 아이 곁을 비우게 됐을 때 몰려온 죄책감은 말할 것도 없고요.


반대로 말하면 워킹맘으로 산다는 건 그런 고정관념을 따르는 게 아니라 마주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건 힘들긴 했지만 (여전히 힘들지만), 하나씩 깰 때마다 생각이 넓어지고 행동 반경도 커졌습니다. 



다름 vs 틀림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 나고자라고 있는 웅이 결이도 같습니다. 출근하는 제가 “아이는 어쩌고?” 질문을 받을 때 웅이 결이는 어린이집이 끝날 때 친구들에게 “왜 엄마 안 와?”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퇴근한 저를 잡고 “왜 나는 엄마가 안 와?” 그대로 물었습니다. 


“엄마가 회사에 다니니까.”

“왜 엄마는 회사에 다녀?”

“키가 큰 사람도 있고 키가 작은 사람도 있지? 머리가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고 말이야. 회사에 다니는 엄마도 있고 안 다니는 엄마도 있어. 웅이 엄마는 회사에 다녀.”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걸 알려줘 엄마가 일하는 것도 다양한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이길 바랐습니다. 자꾸 반복하면서 웅이도 받아들였고 친구들의 “왜 엄마 안 와?” 질문에 “우리 엄만 회사에 다니거든.”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이 대화를 응용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여잔데 머리가 나보다 짧아.”

“여자도 머리 짧을 수 있어. 엄마도 엄만데 출근하잖아.”


이런 식으로요. 이제는 결이가 “엄마는 왜 바지만 입어?” 물으면 웅이가 “바지 좋아하는 여자도 많아.”라고 합니다. ‘워킹맘 아이’로 자라며 웅이 결이는 모든 사람이 같지 않음을, 같이 않다는 것은 다른 것일 뿐 이상하거나 틀린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해석의 힘



심리학자인 에일린 케네디 무어는 아이에게 삶을 음미하는 자세를 가르치고 싶다면 ‘잔이 절반이나 차 있다’는 낙관적인 사고를 익히게 하라고 말합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 낙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건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게 아니라고 하네요. 노력이 필요하다고요.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를 활용하라고 조언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 세탁기에 있어요.” 아이가 울먹이면 “적어도 내일은 그 옷을 입을 수 있겠구나.” 라고 덧붙여주는 겁니다.


아침 출근길, 웅이 결이가 유독 떨어지기 힘들어할 때가 있었습니다. 손을 꽉 잡고 “우리 또 헤어져야해?” 물으면 “보고 싶었던 만큼 밤에 더 신나게 놀까?” 꼭 안아주곤 했습니다. 압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와 낮시간 내내 떨어져있는 건 아이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른인 전 그래야 할 이유가 있고 이해하고 있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냥 아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아쉬워하게만 두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습관처럼 그렇게 하다보니 아이도 그 모습을 배워갔습니다. 얼마 전 제가 읽을 책을 산처럼 쌓아두고 “언제 다 읽나” 혼잣말을 하고 있으니 웅이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엄마 많이 배우겠네.”


내 뜻대로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내 뜻대로 상황을 해석할 수는 있습니다. 




상황을 보는 눈


올해 웅이는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엄마인 제 눈엔 아직 아기같은데 혼자 화장실에 가서 뒷처리를 할 수 있을 지, 학교가 끝나고 혼자 학원 셔틀버스를 탈 수 있을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혼자 잘 해내더군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대응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상황에 처해도 이렇게저렇게 8살의 눈높이에서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방과후 수업을 하는 과학실을 찾아가다 길을 잃으면 복도에 있는 형, 누나들에게 길을 묻고, 그래도 못 알아듣겠으면 데려다달라고 부탁을 할 줄 알았습니다. 


하루는 교문에서 하원하는 웅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엄마가 그러더군요. “웅이는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것 같아요.” 라고요. 그러고보니 얼마 전 키즈카페에 갔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암벽등반 같은 걸 하는 기구가 있었는데 웅이 앞에서 기구가 고장났습니다. 당연히 저한테 와서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주위를 살펴보더니 데스크로 가더군요. 뒤를 슬쩍 따라갔더니 ‘기구를 하고 싶은데 고장났다. 고쳐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땐 내가 옆에 있는 걸 보지 못했나 싶었는데,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기구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던 것이죠.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엄마가 늘 옆에 있었다면 아이의 ‘비빌 언덕’이 되어 줬을텐데, 그렇지 않았으니 아이는 그 때마다 비빌 언덕을 찾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넉살 좋은 성격으로 이어진 것 같고요. 


어찌보면 웅이가 단단해 진 건 모두 ‘엄마의 부재’라는 ‘결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핍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한번 더 눈 맞추고, 한번 더 안아주고, 한번 더 믿고, 한번 더 응원해주면 그 결핍은 성장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엄마의 내공이 쌓인만큼 아이도 내공이 쌓입니다. 
웅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는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첫 독자는 저 자신이고 두번째 독자는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입학시킬 동료 워킹맘들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독자는 먼 훗날 이 일기를 읽을 웅이입니다. 웅이가 일기를 읽을 때 이 이야기를 해줄 생각입니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아침 1시간 반, 밤 2시간 반 뿐이었지만 하루에 한가지씩은 꼭 일기로 남기고 싶었던 게 있었다고요. 시간이 짧아 늘 아쉬웠지만, 마음은 아쉽지 않았다고요.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각자의 일상에 최선을 다했다고요. 그걸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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