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10년, 아니 37년 인간관계가 남긴 것은 '번아웃'이었습니다.
이번 퇴사는 여느 다른 퇴사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소위 '프로 이직러'인 저는 늘 새로운 직장을 정해두고 퇴사했었는데요. 2024년 9월, 새로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당분간 쉬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과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간을 즐기며 성장하는 것이 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조직에 합류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협업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즐겼어요. 성장을 좇았습니다. 어디서나 성장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회사를 찾아볼 힘도, 새 회사에서 빠르게 적응해 성과를 낼 힘도, 성장을 할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핑계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큰 스트레스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몸이 우선이죠. 그래서 그냥 쉬기로 했습니다.
3년 후 40대를 맞이하는 미혼의 여자, 게다가 돈을 쓰는 부서인 PR를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사실 위험한 결정입니다. 게다가 이력을 보면, 이직처를 정해두지 않은 '무작정 퇴사'는 아주 위험한 결정입니다. 사실, 직장생활 10년, 퇴사만 5회가 넘었습니다. 하나의 조직에서 1~2년 체류했던 셈이죠. 잦은 이직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loyalty)이 의심되고, '어차피 뽑아놓으면 또 나갈 사람'이라는 지표 쯤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퇴사 후 헤드헌터 분들을 통해 이력서를 내고 있는데요. 요즘 받는 서류 탈락 피드백은 "너무 잦은 이직으로 우리 조직에서도 나갈 것 같다."였습니다.
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3~5년 정도의 (제 기준에서) 장기근속이었습니다. 근데요. 정말 견딜 힘이 없더라고요. 조직 안에서 어떻게든 버텨야지 하고 휴직신청을 해보는 등 조직 내에서 할 수 있는 여러 노력을 했습니다. 잔류하기 위한 노력을요. 제 커리어에서 장기근속 경력이 절실하게 필요했기에, 퇴사만은 하기 싫었어요. 하지만 회사는 휴직기간을 오래 줄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회사는 당장 국내외 시장에 달려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인데, 제가 요청한 휴직기간이 너무 오랜 기간이라고 판단해 함께 할 수 없다고 거절하더군요. 하여, 원하지 않던 퇴사를 당했습니다.
퇴사 후, 궁금했습니다. 왜 이렇게 극도로 소진되었을까. 이 정도까지 소진될 필요는 없었는데 정말 방전되었어요. 정신적인 에너지를 체력과 관련이 있다 생각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운동이 저를 버티고 생해준 것은 맞지만, 무언가 정신적인 에너지가 한껏 채워지지 않더라고요. 휴대폰도 충전을 하면 일정 시간 후 %가 올라가 있는데, 제가 생각하는 휴식과 충전하는 활동들을 해도 내내 정신적인 에너지는 바닥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시작했어요. "왜 나는 조직 안에서 견딜 힘이 사라졌을까, 왜 이렇게 에너지가 고갈된 걸까. 번아웃이 왜 이렇게 크게 온 걸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퇴사 후 찾아간 저의 영혼의 안식처 중 하나인 태국 방콕에서 거리를 걷다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원래 내 능력 이상으로
모든 일에 너무 애써왔구나.
'애쓰다'의 사전적인 뜻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다'입니다.
저는 늘 모든 일에 힘주고 애써온 사람이라는 것을 태국 방콕의 한 거리에서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명상이 정신 에너지 충전에 좋다고 해서 그렇게 1일 1명상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깨달았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는 늘 애써왔습니다. 회사에서 100%를 기대하면 늘 마음을 담아 150%를 했어요.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좇는 사람이었기에, 제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는 늘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고 애써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 더 이상 힘쓸 에너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에 그렇게 잔뜩 힘을 주고 마음을 다해오니, 당연히 번아웃이 올 수밖에 없겠죠. 회사, 친구, 사랑, 취미.. 저의 세계에서 저는 왜 이렇게 애써온 걸까요? 왜 이렇게 마음과 힘을 모든 사람에게, 모든 회사에게 다해왔을까요? 착한 아이 증후군이었을까요?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고 하기엔 '강강약약'의 성격이고, 쓴소리도 꽤나 소신껏 잘 발언한다는 점에서 아니더군요. 도대체 왜 이렇게 애쓰고, '애쓴다 = 삶의 디폴트(default)'였을까요?
저를 둘러싼 일, 직장, 인간관계에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려가면서 까지 최선을 다한 이유 중 하나는 '완벽주의'가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보이고 싶었냐고요? 아뇨. 전혀요.
여기서 말하는 완벽주의는 누군가의 시선에 완벽해 보이고 싶다기보다는, '나는 이 정도 해야 해!'라는 완벽주의로, 스스로 높은 기대치를 정해두고 달성하지 않으면 마구마구 괴로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 누울 자리는 내가 만들면 된다는 주체적인 마인드셋, 그리고 무엇이든 제가 인볼브 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자신감, 해결사적인 면모 때문이었어요.
직장에서 필요이상으로 애쓴 것 이외에도 제 인간관계를 돌아보았습니다. 지난 37년을 돌아보니,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과 인간관계에서도 늘 저의 진실된 마음과 제가 갖고 있는 힘(역량)을 다해왔어요. 안 되는 일은 되도록, 애매한 관계는 좋은 관계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누울 자리 보고 뻗어야 하는데, 그냥 다짜고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안 누워도 되는데 이불부터 펼치고, 베개를 가져오고, 최적의 자리를 마련하기 부지기수였습니다. 일단 좋은게 좋은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 않아도 될 일,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는 일,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잔뜩 애쓰고 한껏 힘을 준 제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자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방은 원하지 않았거나 아예 인지하지도 않은 상태인데 혼자 관계에 애쓰고 기대한 뒤 상처받았던 지난 날들, 제가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 3개월 넘게 전화는커녕 먼저 연락하지 않는, 그들에겐 그냥 흔한 친구 중 하나였지만 혼자 친한 친구라 착각하며 관계에 열과 성을 다했던 불쌍한 저의 모습이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귈 때도 늘 그 사람이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고 근거 없이 믿어 온 착각의 나날들, 그로 인한 상처, 누구나 인간관계나 일에 나처럼 진심을 다할 것이라는 착각. 깨닫고 나니 황망함, 허무함, 그리고 더 큰 상처들이 드러나더라고요. 특히 제이런 허망함을 이야기했을 때, 제가 틱틱거리는 것에 똑같이 미묘한 온도차이로 대응하는 친구들을 보며 더더욱 20년 넘는 우정에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저라면 제 잘못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감정의 허망함에 공감해 줄 텐데, 그들은 제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아마도 본인을 지키기 위함이었겠죠.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상처받았어요. 그리고 20년 넘은 우정이 저의 노력만으로 지속되어 온 것에 확신을 느꼈습니다. 아닌 걸 알지만, 그들의 반응은 더욱 저를 외롭게 만들고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늘 친구들에게 저자세로 원하지도 않은 것을 알아서 해주니, 얼마나 제가 만만하고 쉽게 보였을까요. 나를 소중하게 여기 지도 않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늘 전화며 문자를 해왔는데, 그걸 들어준 친구는 얼마나 고통이었을까요. 얼마나 싫었을까요. 미안할 지경이네요.
마케팅, PR을 할 때 늘 현황을 분석하고 진단 후, 상황에 맞는 캠페인을 제안해서 성과를 내왔으면서. 인간 카리나는 왜 그냥 인간 강아지 레브라도 레트리버처럼 일단 상대방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스로보다 더 남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해 애쓰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을까요.
이제라도 제가 필요 이상으로 애써왔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번아웃으로 인해 에너지가 소진되기 전, 충분한 에너지가 있었을 때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으면 조금 더 빠른 회복이 가능했겠지만, 모든 것이 전소된 지금.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딥니까. 모르고 계속 이 방식대로 살았으면 아마도 평생 계속 상처받고 일방적인 짝사랑만 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브런치를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애쓰지 않기로 했어요. 모든 사람에게 120%의 최선을 다하고, 모든 일에 180% 최선을 다한 지난 37년의 결과가 번아웃이라면, 이제 이렇게 애쓰며 살아온 생활방식은 끝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저도 좀 덜 상처받고 단단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살아야 하잖아요.
사실, 타고난 기질, 살아온 환경, 그리고 가정환경을 생각하면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엇이든 애쓰며 살아갈 것입니다. 타고나고 자라오며 확립된 정체성이 giver이거든요. 그런데요, 이 기질을 이제는 제 자신을 지키면서 쓰고 싶습니다. 사랑, 우정, 마음, 힘, 에너지 - 이제 저도 누구에게나 박애적으로 다 나눠드리긴 힘들어요. 정이 많고 도우려는 마음도 이제는 조금은 가려서 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애쓸 대상', '애쓸 직장', 이제 저만의 기준을 갖고 선택해 보려고요. 기존에 있었던 관계가 저의 노력만으로 이어져온, 일방적인 관계였고 제가 생각한 만큼 그들은 저에게 소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허들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이미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사랑왔는데, 저는 이제 깨닫고 지금부터 실행해보려고 합니다.
이 브런치에서는 앞으로 남은 삶에서 이어질 사회생활, 인간관계에서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할 행동방식, 마인드셋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37년 동안 확립된 가치관이 깨질지 모르겠지만, 깨지 않으면 남은 여생도 이렇게 끊임없이 혼자 기대하고, 상처받으면서 유약하게 살아갈 텐데 그건 싫어요. 이미 받아온 상처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도 똑같이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정말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커리어 10년 차 - 앞으로 일할 3-40년의 나날동안 늘 자신을 소진시키며 저의 힘과 마음을 원하지도 않는 회사를 위해 살아가기 싫어요. 자신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제는 마음과 힘을 조절할 겁니다.
이 브런치가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인간관계, 직장생활에서 큰 상처를 받아온 - 삶에 너무 애써온 분들에게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