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것도 한두 번 겪다 보면 익숙해진다. 모든 것에 특별함의 지속은 없다는 이야기로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도 나름 나만의 방식으로 의식하며 살아도 그것이 일상이 되어 가면 어느 틈엔가 다른 것이 더해지며 이유 없이 바빠져 간다. 반면 우리에게 주어진 문명의 이기들은 차곡차곡 시간을 압축해 동시대를 더 나아가 다른 시대까지 묶어주어 마치 놀란 진동의 울림에 매번 핸드폰을 확인하는 습관도 원래 태초부터 이렇게 살아온 듯 몸은 알아서 그렇게 쫓기듯 시키지도 않은 일상의 경쟁 속으로 영문도 모른 채 떠밀려 앉아있다. 점점 사는 것이 숨 쉴 틈 없는 블랙홀로 빠져만 들어간다. 그래서 아마 지켜보시던 신께서 도저히 참지 못 하시고 하늘의 선물을 내렸다. 정신 차리라고, 문명의 이기에 휩쓸려 끌려가듯 허둥대지 말고 인디언 영혼을 찾아 좀 쉬어가며 정리를 하고 다시 나아가라고 코로나가 창궐했다고 믿고 싶다.
코로나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불평하던 평범한 일상을 감사하게 느끼게 바꿔 주었고 마스크로 하여금 표정관리의 오해와 쓸데없는 소리를 줄여 조용함도 얻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다시금 알게 되었고 또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어 자아의 성장과 삶의 방식의 변화에 기회를 주었다. 이제 2-3년을 그렇게 역설적으로 감사하게 지내다 보니 평소의 불편함이 평범으로 되어가는 놀라운 적응의 일상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코로나를 벗어나게 되다 보니 꿈틀 옛것의 보상 심리가 돼 살아난다. 그것을 직접 목도하였다.
설날휴무를 맞이해서 ‘고향대신 해외로’를 외치며 막혔던 호흡을 해외에 토해 내고픈 열망으로 이번 설 연휴기간 동안 단기간 외국으로 나간 사람들이 37만 명 지난해의 13배라고 한다. 정말 이었다. 지인의 미국 출국에 보낼 물건을 전해 주러 인천공항을 갔다가 주차장에 주차 자리가 없어 헤매 돌며 자투리 틈에도 자동차가 서있고 주차 공간 양옆으로 이중 주차는 기본으로 차량 왕래조차 안 되는 이런 경우는 처음 본 듯하다. 물론 공항 안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단하다. 사람들이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있고 삶에 자신도 있다는 이야기다. 코로나가 준 화두의 기회로 얻게 된, 나는 누구이며 왜 살고 있는가의 대답을 먼저 찾은 그들의 삶의 활력과 철학을 존중하게 된다. 물론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꼰대가 되어가는 내가 느끼는 원초적인 질문은 '죽을 때까지 모으기만 한 사람과 모으면서 잘 쓰면서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을 원하는가?'이다.
예전 브라질에서 근무할 때 현지 근로자들이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연말 휴가를 가려고 돈을 모은다고 수군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욱이 그들을 낙천적인 열대 특유의 안이함 이라며 게으름으로 흉까지 봤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그들이 오랜 경험 통해 지니고 있는 삶을 대하는 그들의 가치 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보다 삶을 대하는 생각에서는 우리가 부족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 꼰대들은 그러고들 있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나와 가족을 위해 집을 장만하고 돈을 모으는 것 만이 올바른 삶이라 생각을 하고 자식들에게도 그 기준으로 살기를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은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했다. 바꿔 말하면 오늘 당신이 먹은 음식은 바로 당신이며 사건을 추리하듯 어떤 사람이 하루 동안 먹은 음식을 본다면 그의 삶의 양식, 생각 수준까지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00년대 사람의 생각이다. 놀랍다. 음식의 질적, 감성적 가치의 차이를 가지고 사람을 안다고 했다는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먹는 것이 음식의 전부가 아니다는 말이다. 이를 1700년대 살던 사람의 이야기로 놀라운 삶의 가치의 차이를 보게 된다. 덧붙여 이를 두고 누군가가 평했다. 아마 브리야 샤바랭이 지금 살아 있다면 그는 다시 “당신이 음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라고 이제는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가급적 친환경 식품을, 맛보다는 가치를, 개인보다 공동체를 더 생각하는 음식의 소비를 한다고 한다. 알고는 있는가, 그냥 먹는 게 음식이 아니다. 거기에도 삶의 철학이 담겨있다.
이렇듯 삶을 대하는 생각이 코로나를 지나며 특별한 이들의 철학적 사고에서 일반화되어 평범했던 우리가 삶을 대하는 방법도 더욱 진지해졌다. 이것이 우리가 신께 받은 큰 선물이다. 왜 사는지, 왜 먹는지 등 원초적 질문을 떠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것을 먹어야 하는지 등 삶의 방법적 질문으로 들어가게 해주고 있다. 거기서 함께 깨우치고 나가야 한다.
아내와 인천공항에 물건을 전해 주고 오는 길에 인천 송도 쎈트럴파크에 들러 산책하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그리고 함께 발 닫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말을 하며 샤부샤부 저녁을 즐기고 들어왔다. 이제는 나도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존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