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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maker Sep 01. 2021

박사들의 마을에서 밥순이로 살아간다는 것.

똑똑한 바보들을 사랑하는 법



내 친구들이 이 글의 제목을 읽는다면 항의할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마을엔 거의 모두가 박사학위를 가진 고학력자들이지만, 누구도 서로를 ‘박사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물론 문화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다. 예를 들어, 인도 사람들은 이제 친해졌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부르면, 자기가 스스로 ‘닥터’라고 이름 앞에 붙여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런 예들은 대개 웃기는 에피소드로 치부되어 회자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스와도 서로 이름을 부르며, 동등하게 친구처럼 지낸다. 농담할 때만 박사님을 붙인다.


   빅뱅이론이라는 시트콤을 본 적이 있는가. 한 에피소드에서, 극 중 평범한 웨이트리스로 나오는 여주인공이 조립식 가구를 산다. 옆집에 사는 물리학, 이론물리학, 천체물리학 등의 분야의 네 명의 박사들이 가구를 조립하다가, 아주 장황한 과학 이론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결국에는 아무도 조립하지 못하고 방을 떠나며, 웨이트리스 여주인공만이 홀로 남아 가구를 조립한다. 매일을 이 웨이트리스 같은 마음으로 산다면 설명이 쉬울까? 빅뱅이론을 보면서 매 에피소드마다 박장대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매우 똑똑하다. 나 같은 사람은 대화에 낄 수조차 없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듣지 못하여, 옅은 미소를 띠고 박자에 맞춰 적절하게 고개를 가끔씩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하는 데에 도가 터버렸다. 똑똑하지만 다들 뭔가 부족하다. 생활능력이 결여되어 있달까. 오랜 시간 동안 공부만 하느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삶의 스킬들은 연마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름난 여성 과학자 친구 중에 결혼하고 애도 둘이나 있지만, 한 번도 요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 가사 노동을 꼭 여자만 혹은 남자만 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떠나서, 그 누구라도 애가 있으면 기본적으로 식사를 준비할 줄은 알지 않느냐 말이다. 어떤 친구 집엔 초대를 받아 갈 때마다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다. 부인도 남편도 서로 식사를 준비할 생각은 없이, 하우스 헬퍼가 준비하겠거니 하고 그냥 우리를 초대만 한 것이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 그 집에 초대를 받을 때마다 미리 음식을 만들어갔다. 예의가 있고 없고 기분이 좋고 나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어찌 됐든 누군가는 저녁시간에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 남편은 한국 남자치고는 범상치 않은 스타일이었다. 연애시절 가끔 남편이 석사를 하던 학교에 놀러 가면, 사람 친구는 하나도 없이 소개해주는 친구들이 죄다 개, 고양이, 병아리, 닭 이런 동물들이었다. 엄청나게 순수하면서도 괴짜 같은 면이 좋았다. 이곳에 오고 나서 그와 비슷한 동류의 사람들을 무더기로 만났다. 한국에서는 아주 잘 적응하여 살던 내가 오히려 특이한 사람이었다.


   이 마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하루 동안, 그것도 공항에 머물면서 비행기를 두 번이나 놓쳤다. 또 누군가는 일 년 동안 스마트폰을 네 대를 잃어버렸다. 그의 부인이 그 해에만 다섯 번째 스마트폰을 사주며, 아무리 절약해도 이런 데서 돈이 샌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이야기해보면 모두가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남편은 사무실에서 한참 일하다가 나오면, 어디에 차를 주차해두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다. 처음엔 너무 이해가 안 가서 심각하게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걱정을 했다. 남편외에도 모두가 자기 차를 어디에 주차해 두었는지 까먹는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마을 친구들에게 밥을 자주 해준다. 그것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필리핀이란 나라는 먹거리가 아쉬운 나라다. 맛있는 열대과일들은 널렸지만, 더운 날씨 탓인지 가격 대비 사 먹는 음식의 퀄리티가 아쉽다. 거기다 야채가 부족하여 균형 잡힌 식사를 하기 힘들다. 그러니 이 마을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들에게 건강에 좋고 맛난 음식을 만들어줘서 뱃속 두둑하게, 거짓말 조금 보태어 영혼 깊숙한 만족감을 선물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나쁜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착하고 바른 만큼 남들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믿어버린다. 집 열쇠를 맡기거나, 신용카드를 빌려줘도 맘 편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남이 자기를 괴롭혀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악인들이 코 앞에서 돌아다녀도 모른다.


  언제나 동생을 20명쯤 둔 소녀가장이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 도와줄 일들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고, 한국 문화의 기준으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할 때도 있지만, 이제는 깍쟁이 같은 나도 그들을 포용하게 되었다.


  팬더믹으로 한참 보지 못한 그들이 그립다. 얼른 그들을 다시 만나, 나는 모르는 그들의 이야기에 옅은 미소를  얼굴로, 박자에 맞춰 적절하게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하고 싶다. 차마 대놓고 웃기는 힘든 그들의 어리버리함에 숨죽여 고개돌려 몰래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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