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acemaker Sep 13. 2021

비행기 타지 않고 매일 세계 여행하는 여자

작은 지구촌, 국제미작연구소(IRRI)


나는 지난 9년간 이상한 마을에서 살았다.

미국, 영국, 인도, 한국, 중국, 우크라이나, 카메룬,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마다가스카르, 에콰도르, 미얀마, 태국, 키르기스스탄, 이란, 탄자니아, 대만, 캐나다, 독일, 프랑스, 호주, 필리핀 등의 전 세계인이 모두 같이 사는 마을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필리핀 로스 바뇨스에 위치한, IRRI (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국제미작연구소)이다. 결혼한 지 3일 만에, 박사과정 인턴 학생이었던 남편을 따라 그곳에 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남편이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과학자로 승진하기까지 9년 동안, 1년에 한두 차례 한국에 휴가 가는 것을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팬더믹이 우리 모두를 후려치기 전에는, 그 모든 나라의 사람들과 차 마시고 운동하고 수다 떨고 밥 먹으며 함께 이웃으로 살았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 살게 되면, 문화 차이를 경험하게 된다. IRRI가 위치한 곳은 필리핀이었지만 감당해야 하는 문화는 비단 필리핀 문화뿐만이 아니었다. 문 앞을 나서면 온갖 문화가 발에 차이며 나를 괴롭혔다.


  IRRI에서는 전 세계의 명절을 거의 다 지켰다. 큰 명절이 있을 때면 해당 나라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준비하여 초대하는 식이었다. 때로 추수감사절*이 영국 것인지 미국 것인지 하는 유치한 논쟁도 일어나는 곳이었다. 기독교, 가톨릭,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 불교 혹은 내가 들어보지 못한 종교까지 모든 종교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잘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아내긴 했지만 쉽지 않은 삶이었다. 예민하고, 주관이 뚜렷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나였기에 그 모든 문화적 씨름들이 힘들고 피곤하기만 했다. 그런 특수한 환경에서 임신과 출산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외로웠다.


  사랑하며 산 날보다 미워하며 산 날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문화라는 벽은 생각보다 더 크고 단단하고 무겁고 견고했다.  그 벽을 문이라 여기고 열고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 문 언저리에 머물기만 했다.








   그러다 그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들이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다. 더러 마음을 열고, 서로의 타향에서 가족처럼 친해진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거나 다른 나라로 이직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한국에서 한국인 친구들과의 헤어짐은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타국인 친구들과의 헤어짐은 흡사 사별(死別)**같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서, 일상은 안정과 초연함을 잃고 쉽게 곤두박이칠 치곤 했다.


  팬더믹이 일어나고 나서는, 공황(恐慌)***같은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필리핀의 사정이 너무 위험해서 이직을 결심한 친구들과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을 때마다, 지독한 슬픔을 경험했다. 밤에 자려고 눈을 감으면, 마치 내가 점처럼 변해 사라질 것 같은, 영혼도 남지 않고 없어질 것 같은 불안에,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이런 나를 위해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외로울 때마다 끄적였던 글쓰기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들을 받아들이게 해 주고 아픈 마음을 치유해주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면, 찰나의 바람 같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릴 것 같던 그들이 영원으로 깊이 남았다.


   지나간 모든 친구들과 그들의 문화를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시작한다. 9년간 고군분투한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싶은 이유도 있다. 결국에는 내일이 있다고 믿고 싶어서다. 언젠가 돌아가 회복된 사랑으로 그 수많은 문화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이제 시작한다.











*추수감사절: 기독교 신자들이 한 해에 한 번씩 가을 곡식을 거둔 뒤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올리는 날. 1620년에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다음 해 가을에 처음으로 거둔 수확으로 감사제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사별(死別) 죽음으로 헤어짐.

***공황(恐慌) 두려움이나 공포로 갑자기 생기는 심리적 불안상태



타이틀 이미지 출처: freepik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