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란 동물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탈 것', '달리기' 등이다. 칭기즈 칸과 나폴레옹, 여포의 적토마와 오크에 맞서는 로한 기마병이 떠오른다. 말은 어떤 동물보다 강인한 모습으로 인간과 함께 동서양의 역사와 상상을 누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500kg를 넘는 덩치에 길게 뻗은 네 다리, 딱 멋진 길이의 목 위로 매끈하게 날리는 갈기, 80km/h에 달하는 속도는 마치 전쟁터를 누비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처럼 보인다. 적어도 우리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이 타고난 매력 탓에 수천 년간 그렇게 잡아다 길들이고 개량했을 것이다.
정작, 말은 그 달리기로 인해 고통받는다. 언뜻 튼튼해 보이는 네 다리와 발굽은 빠르게 달리는 기능을 위해 내구성을 포기해야 했다. 말의 발굽은 해부학적으로 발바닥이 아닌 발가락이며, 그마저도 충격에 매우 취약하다. 헤비급의 보디빌더가 온종일 하이힐을 신고 중량을 든 채 달리는 것을 상상하면 얼추 비슷할 것이다. 열량도 크게 소모하여, 경주가 끝나면 20kg가량 빠지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한 번이라도 다리에 부상을 입으면 완전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쓸모가 없기에 도축된다. 일생을 고통과 함께하며, 그 고통을 짊어질 힘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진다. 이 불행의 시작은 다른 동물보다 잘 달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더 크고 더 빠르게 개량된 것이다. 그에 따르는 부작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정해놓은 하나의 이유를 위해 삶을 혹사시키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성적과 대학, 동산과 부동산, 명예와 권력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축복 속에 태어난 인생은 고통이 되었다. 더 많은 자본이라는 허상을 두고 스스로를 재촉하며, 견디지 못한 자에게는 그가 자신이라 할지라도 무자비하게 심판한다. 채찍은 허영심과 열등감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정말 존엄한가. 편자가 박혀 발굽이 다 닳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속도로 대지를 누비는 법을 망각한 이 동물을 동정할 자격이 있는가. 서로가 서로를 가두어 단단한 울타리를 만든 우리는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덫에 걸린 것일지 모른다.
발 없는 말도 말이다. 말은 말로서 존재한다. 다리가 부러진 말도 인간의 관점에서 쓸모가 없을 뿐, 생명의 존재는 여전히 건재하다. 삶은 그 자체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이유가 없는 삶은 서술이 맞지 않는 모순이다. 혹여 자신의 쓸모를, 이유를 잊은 이가 있다면 자유로운 들판의 말을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농업과 산업의 문명을 벗어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생명의 숨결을 느껴보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