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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Mar 09. 2023

그만 읽고 이젠 쓰자.

논문의 세계에 발을 들이며 깨달은 한 법칙은, 읽는 것을 멈춰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칙은 대체로 다른 일에도 적용되는듯하다.


   어릴 적부터 읽는 것을 좋아했다. 낱낱의 활자를 의미 단위로 변환해 정보로 저장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도파민 수용체를 자극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화장실에서 샴푸 통의 글씨라도 읽곤 했다.


   다행히 부모님은 책에 인색한 분이 아니어서 넉넉히 공급해 준 교양서적을 끼고 살 수 있었다. 밤늦게 방문이 열리며 '아직도 안 자고 책 읽으면 어떻게 하냐'는 말을 흔히 들었다. 공부가 지겨우면 책을 읽었다.


   활자 중독 증세는 여러모로 유익이 컸으나, 한편으로는 망설임을 늘린 것도 이 시기가 아닐까 떠올린다. 얕은 정보가 켜켜이 쌓이며 말을 뱉고 글을 쓰기 전, 내가 모르는 무엇이 또 있을 것 같아 한참을 고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혼자서 쌓는 일을 멈추고 사회과학 분야의 지식 생산의 임무를 받았으나, 망설임을 그치기 어려워 단 한 줄의 지식이라도 더할 수 있을까 염려된다. 한 문단을 쓰기 위해 알고 있던 정보를 쏟아내면, 그와 연관된 정보가 수없이 딸려 나온다. 이 또한 안 읽고 넘어갈 수 없으니 그대로 수십 페이지를 읽게 되고, 기존의 정보에 갈등이 생겨 이미 썼던 문단도 뜯어고친다.


   과거에는 도서관에서 최대 다섯 권 정도를 빌릴 수 있었을 것이나, 시대가 변해 논문 파일을 기가바이트 단위로 쌓아둘 수가 있다. 어떤 이에겐 축복이겠으나 내게는 비극이다. 읽고 고치고 다시 읽는 일이 몇 주째 반복되었는지도 알 수 없으니, 더 이상의 새로운 정보는 받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떤 미국 교수는 당신의 연구가 결정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노벨상감의 역작을 쓰고 싶은 욕심은 이해하지만, 그랬다가는 영영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지식의 발전은 도약이 아닌 축적이기에, 다른 이들의 발판을 놓아줄 정도면 충분하다. 부드러운 어투지만, 까불지 말라는 의미로 들린다.


   깊이 파려면 먼저 넓게 파야 한다고 했지만, 그저 넓게 파기만 해서는 깊이에 다다를 수 없다. 어느 시점에는 중심에 삽을 깊숙하게 꽂고 단단한 지반을 헤쳐야 한다. 읽는 일이 넓게 파는 것이라면, 쓰는 일은 깊이 파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쓸 것을 정했다면 시야를 닫고 쓰는 일은 연습한다. 매일 쓰는 일은 그래서 유익하다. 매일 포기를 연습하는 중이다. 이 글이 결정판이 되지 못해도, 내일의 내가 더 좋은 글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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