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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den Kim Aug 19. 2020

13. 삶의 끝에서 신을 붙잡다

신이 계시다면 다만 그를 위로하소서


전도서 3:1-2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도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중략)


 나는 종교가 없다.

재밌게도 미션스쿨이라고 불리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결국 찬송가는 좋네! 정도의 1차원적인 단순한 종교관이 남았을 뿐이었고, 훈련병 시절에 일용한 양식인 초콜릿 과자 몇 개를 얻기 위해 이 종교 저 종교 다니며 거짓 신자 체험을 하며 다양한 체험을 하며 너그러운 종교관 정도는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종교는 지금까지 나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장례도 기독교식으로 하고 싶으시다는 어머니와 누나의 말에 크게 갸우뚱했던 것도 나였다. 우리 가족과 친지들 대부분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나는 유일한 이단아였다. 사실 아버지도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 가시는 모습을 몇 번 보긴 했으나 어머니의 전도에 의해서였는지 자신의 의지였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아프시고 난 후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위로 차 방문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나는 내 방 안에서 자는 척하며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만 조용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신이 있다면 사람이 저렇게 아플 리도 없잖아.'라고 혼자 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세례를 받고 싶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을 때에도 '나는 그런 겉치레가 뭐가 중요해. 믿고 싶으면 그냥 혼자 기도하고 믿으면 되는 거지.'라고 왠지 모를 반발심만을 스스로 키워나가고 있었다. 사람이 당장 내 앞에서 죽어가는데 영적인 존재가 무슨 의미고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강한 의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내 가치관을 뒤흔들어놓은 계기가 찾아왔다. 늦기 전에 성도가 되고 싶다는 아버지를 위한 세례 의식을 하는 도중 아버지가 흐느끼면서 애원하듯 뱉어낸 "아멘"이라는 두 글자. 분위기에 휩쓸렸을지도 모르지만,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선 초라한 인간이 어디에라도 붙들고 의지하고 싶었던 걸까. 약도 아닌 가족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라는 프레임에 자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 버리고 조금이라도 위로받고자 신이라는 존재가 필요했었던 걸까. 그 이후로 나의 종교관은 <신은 없다>라는 불신에서 <신이 있다면>이라는 소망으로 조심스럽게 태도가 바뀌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저렇게 삶의 낭떠러지에 서서 한 떨기의 나뭇가지처럼 덜덜 떨고 있는 아버지를 위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도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중략) / 전도서 3:1-2


 위에서 언급한 성경구절은 사실 종교가 없는 나에게도 위로가 되는 구절이었다. 모든 것은 그에 맞는 때가 있으며, 시작이 있는 것처럼 끝도 있다는 말, 인생에서는 내 노력과 의지만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다소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 종교를 떠나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찬송가와 성경의 구절은 죽어가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떠날 사람도 남는 사람도 이제는 바뀌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인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되는 거라고 다독거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을 애써 부정하고 초콜릿 과자 몇 개를 위해 배신과 거짓말을 일삼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지는 모르지만)

파리한 아버지 옆을 지키고 있을 때면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나직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신이 계시다면 다만... 그를 위로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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