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말습관이 어떻게 에세이로 이어지는가
말로 꺼낸 생각이 글로 정리되고, 그 글이 다시 말로 다듬어지는 훈련을 매일 반복하는 아이들.
겉으로는 글쓰기 수업 같지만,
사실은 '나를 설명하는 언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자신의 경험과 그 속에서 느낀 생각을 온전히 드러내는 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결국 글쓰기 교육의 가장 깊은 목적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표현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교육이야말로,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도구는 글쓰기이고, 그중에서도 ‘에세이’라는 형식은 그 마음을 가장 깊이 있게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렇게 내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에세이는 단번에 써낼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아이가 성장하며 자기 생각을 표현해 보는 지속적인 경험의 누적 속에서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는 글이다.
그렇다면, 에세이란 정말 어떤 글이어야 할까?
나는 오랫동안 '에세이'라는 단어를 한국말의 '수필'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정해진 형식 없이 자유로운 감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글.
서정적, 철학적 때로는 시적인 표현이 담긴 글.
그게 내가 생각하던 에세이였다.
에이든이 학교에서 에세이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수필'과 '에세이'의 차이를 구분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에이든이 쓴 글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알던 수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글이었다.
그 글에는 명확한 목적과 구조가 있었고, 에세이라는 장르 안에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학교 수업 시간에 에이든은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 있다.
1. 주장과 논리를 전개하는 설득형 에세이
2.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서사형 에세이
3. 주제에 대한 찬반 논거를 제시하고 결론을 유도하는 논증형 에세이
4. 자신을 보여주는 글, 즉 입시용 에세이
이처럼 에세이의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단순히 '느낌을 담은 글'이라고 하기엔 분명한 전략이 들어 있어 보였다.
그리고 특히 입시용 에세이는,
미국 학교 기준으로 고등학교 11~12학년이 되면, '대학 입시용'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별도의 프로젝트를 다룬다는 사실도 너무나 새롭고 놀라웠다.
이 입시용 글쓰기를 위해 9학년부터 자기 생각을 꺼내는 훈련을 더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12학년 즈음에는 그 기억과 생각을 '선별하고 압축하여 드러내는 글'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이러한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야,
왜 에이든이 6학년인데도 '에세이 쓰기'를 서서히 시작하고 있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에세이 쓰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정말 많이 들어왔다.
미국에서도 모든 학생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는 단연 '에세이'고, 그 어렵다는 에세이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이 것만큼은 서둘러 공부시켜야겠다는 욕심으로 시작한 것이 '에세이 쓰기' 수업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볼수록 내가 어린 에이든에게 했던 질문들을 떠올리게 되고, 앞으로 내가 에이든에게 해야 할 질문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앞 편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번에도 질문에 중요성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나만의 숙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6학년인 에이든이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에세이는
자기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글'을 많이 쓰고 있다.
|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글?
| 그럼 나를 잘 소개하면 되는 건가?
솔직히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자료들을 찾아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 '너는 누구니?'라는 질문은
| '너는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말해줘'가 아니라
'네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방식으로 성장해 왔는지를 보여줘'라는 깊은 의미가 담긴 질문 있었다.
즉, 에세이에서 중요한 건 자기소개가 아니라 '자기 해석'이 핵심인 글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글이야말로 제대로 쓴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어릴 때부터 연습이 필요할까?
내 생각에는,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글을 쓰려면 이미 내 안에 해석 가능한 기억들이 축적돼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는 능력과는 다르다.
경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고,
그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하나의 흐름 있는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몇 년 전, 에이든보다 한 살 어린 조카 데니얼을 2년 동안 미국에서 데리고 있었던 적이 있다.
데니얼은 이곳 초등학교에서 2학년과 3학년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조카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성향을 배려해 선생님이나 부모가 일부러 질문을 줄이거나,
알아서 뭔가를 해주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이런 조카가 처음 미국식 교육을 받으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그 높은 허들은 바로,
쏟아지는 질문이었다. 그것도 영어로...
등교부터 하교까지 선생님도 친구들도 계속 물어봤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어떻게 느꼈는지
|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내가 기억하는 조카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Yes, No, I don't know, I like, I don't like
질문을 이해해도 데니얼은 문장으로 대답하지 않고 단답형으로만 말했다.
그 말 습관은 1년이 지나도록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귀에 데니얼이 'because...'라는 단어를 붙여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단어 하나가 얼마나 큰 변화였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Because"는 그냥 단어가 아니다.
이것은 앞뒤 문장을 연결하며 생각의 흐름을 만들어주는 브릿지 단어다.
그 말을 썼다는 건,
데니얼이 2개의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연결했다는 걸 의미한다.
감정이 아닌 근거를 담은 문장을 말할 수 있었고, 바로 그날이 글의 구조대로 사고하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반면 에이든은 평소 말할 때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편이다.
에이든의 말 습관에 익숙했던 내가,
말 꼬리를 흐리거나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조카를 처음에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년 동안,
질문이 일상이 된 수업 속에서, 데니얼은 어느 순간부터 단어를 고르지 않고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변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표현'이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축적된 사고가 형태를 갖추는 기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내가 아이들의 '말하는 습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경험이 시작점이 아니었나 싶다.
아이가 생각을 풀어내는 힘, 그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그 힘이 결정적으로 쓰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나는 오랫동안 고민 했고, 이렇게 정의하게 되었다.
.
그 힘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이가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이고,
그 힘이 가장 결정적으로 쓰이는 순간은, 대학 입시일지도 모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꺼낸 말에 자신이 담겨 있고, 그 말이 글로 정리되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생각을 풀어내는 힘은 아이를 '말하는 사람'에서 '표현하는 사람'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그런 스토리가 담긴 에세이야 말로 누구에게나 울림을 줄 수 있는 좋은 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에세이를 써 내려가는 힘은,
오늘 하루, 아이가 건넨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