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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 실리콘밸리 교실은 여전히 작문 노트가 있다.

글쓰기 교육에 여전히 보수적인 실리콘밸리

by 에이든엄마


실리콘밸리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 "수많은 IT 기업들이 몰려 있는 곳이니, 교육도 앞서가겠네요?"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다.

첨단 기술이 가장 빠르게 스며드는 도시이자, 부모 중 절반 이상이 IT 업계에 종사한다.


아이들의 교육도 누구보다 빠르고 진보적으로 앞서 있을 거라는 기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살고 있는 근처 학교의 교실 풍경은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요즘 여기저기서 AI로 에세이를 쓰고, 요약을 만들고, 아이디어를 뽑아낸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만큼 글쓰기 수업의 방식도 빠르게 바뀌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에이든이 다니는 학교만 해도, 모든 수업 시간에 여전히 등장하는 건 작문 노트와 지우개 달린 연필이다.

다시 말하면, 글쓰기 교육만큼은 오히려 놀라울 만큼 '기본'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쿠퍼티노와 인접한 사라토가 지역도 실리콘밸리 중심에 있지만, 교육에 있어서는 첨단 기술보다 '기초 학문 실력'을 훨씬 더 중시하는 분위기다.


특히 글쓰기는 SAT, AP 등 대학 입시에서도 핵심 평가 요소이기 때문에, 학생 개개인의 '자기 글쓰기 능력'을 최우선으로 기르는 것이 이 지역 교육의 기본 방향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초등부터 중등까지 문단 구성력과 논리적 흐름 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

이 과정은 아이들로 하여금 생각을 구조화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을 반복적으로 익히게 하며, AI와 같은 외부 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글을 완성해 내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다.


정형화된 글쓰기 훈련 시스템이 견고하게 자리 잡은 덕분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데 익숙해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밟고 있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단지 커리큘럼 선택이 아니라, '글쓰기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지역 사회의 뿌리 깊은 공감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지역이 AI가 급부상하는 지금도,

교육만큼은 유독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교사와 학부모 모두 아직은 인공지능 도입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 부모들 대부분이 IT 업계 종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사주거나 게임을 허락하는 시점을 의도적으로 늦추려는 경향은 아주 흔한 일이다.


부모들이 이처럼 기기 사용을 미루는 이유는, 기술이 아이의 사고력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중학교 때까지는 디저털 기기와의 접촉을 줄이려는 노력을 이어간다.


실제로 에이든의 반 친구들 중 대부분은 아직 스마트폰이 없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운동이나 음악처럼 외부 활동이 있는 특별한 경우에만 부모의 허락 하에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인공지능 시대에 맞지 않는 보수적인 생각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내 주변의 많은 부모들은 이 같은 신중한 접근에 깊이 공감하는 모습이다.


물론, 학교들이 AI를 언제까지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지역 학교들이 글쓰기에 AI를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는 이유는, 기술의 발전을 몰라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하는 힘'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본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교육 방식과 부모들의 선택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정보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무엇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을 키우는 일이다.


그 힘은 결코 AI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오히려 AI는 그 기반이 충분히 다져졌을 때, 비로소 아이의 사고 확장과 표현을 도와주는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매일 최신 기술과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학교 역시 AI를 점점 더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아이가 꼭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기 생각을 자기 말로 풀어내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빠르고 편리한 기술이 아니라, 느리고 투박한 글쓰기 연습 속에서야말로 길러진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은 지루하고, 불필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단한 기반이 쌓여 있어야 기술의 도움을 받더라도

자기 생각을 잃지 않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


AI는 결국 도구일 뿐,

아이의 생각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오히려 충분히 생각하고, 말해본 경험이 축적된 아이에게 AI는 그 생각을 더 잘 끌어내고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파트너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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