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력과 말의 진짜 관계
AI가 글도 잘 쓰는 시대,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생각하는 힘'을 중요하게 여길까?
그리고,
'생각하는 힘' 이란 뭘까?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걸까?
또다시 궁금해진다.
에이든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엄마의 마음이 크다 보니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이 궁금증의 실마리를 아주 사소하지만 깊이 남은 경험에서 발견했다.
생각해 보면, 부부싸움의 시작은 항상 이랬다.
|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들어?"
에이든과의 불통도 그렇게 시작됐다.
| "엄마가 화 난 것 같아? 안 난 것 같아?"
나는 분명히 내 감정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
'왜 말을 해야만 아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내 말을 들은 두 남자는 매번 똑같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말도 안 해놓고, 나 보고 어떻게 알아차리라는 거야?'
그리고 그 표정에 나는 또 화가 치민다.
반복되는 이 상황이 싫어서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고, 결국 나름의 결론에 닿게 되었다.
사실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남편과 아이가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수십 번도 넘게 얘기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내 안의 감정이 분명하고, 여러 번 반복했던 지적이니, 거울에 비친 것처럼 내 마음이 보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나만 알고 있는 내 마음일 뿐이었다.
내가 안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는데도 그 차이를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그렇게 돌아보니,
머릿속에 있던 내 생각과 감정은 '형태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생각,
심지어 나조차도 정확하게 붙잡지 못하는 흐릿한 감정들.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어떤 순서로 설명해야 할지'
'형태가 없는 생각'을
'형태가 있는 무언가'로 만들려다 보니 내 머릿속은 늘 안갯속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됐다.
'말'은 생각에 형태를 갖추게 하는 가장 적절한 도구라는 것.
누군가에게 닿고, 이해되고, 때로는 설득되게 만드는 힘을 가진 도구라는 것을.
'내 감정과 생각은 나에겐 명확하지만, 남은 알지 못한다'는 결론은,
'생각은 말로 표현되기 전 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 후로 나는,
이유와 감정 상태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오히려 감정이나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하게 되면서 불필요한 오해도 줄고, 스트레스도 훨씬 덜해졌다.
이제 나에게 '말'은 감정을 정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
생각은 머릿속에 있을 땐 흐릿하고, 겹쳐 있고, 종종 뒤엉켜 있기도 하다.
그 복잡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부터 정리가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말'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 무게를 실감하는 중이다.
에이든을 비롯한 아이들의 말 습관을 보면 그 안에 사고력의 단서들이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 "그 친구가 내 연필을 가져갔어."
2. "그 친구가 내 연필을 가져갔는데, 자기가 가져간 줄 몰랐던 것 같아. 그래서 일부러 말 안 하고 기다렸어."
만약 아이가 1번처럼 말하는 습관이 있다면, 정보 전달에 집중된 방식이라고 볼 수 있고,
반대로 2번처럼 말할 수 있다면, 상황을 해석하고, 감정을 읽어 내는 사고력이 개입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릴 때 에이든도 1번처럼 말했다.
"엄마! 친구가 나를 때리고 도망갔어."
"왜?"
"몰라"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 친구들이 알리안이 문제아라고 말을 해."
"왜?"
"자꾸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가서 안 들어와. 그래서 선생님들이 찾으러 다닐 때도 있어. 그런데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니깐 수업 분위기가 흐려져서 내가 집중하는데 좀 힘들어. 다음에 또 그러면 알리안한테 자제해 달라고 부탁해 보려고."
평소 에이든의 말속에는 늘 '왜냐하면'이 숨어 있다.
그 말에는 ‘정보, 감정, 해결책’이 함께 녹아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 구조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말하기 방식이 몸에 밴 결과처럼 보였다.
이번 글쓰기 수업을 보며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에이든이 평소에 하던 말의 방식이 이미 사고력 있는 말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내 감정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겠지"라고 생각했던 건, 결국 내 생각에 갇혀 상대를 보지 못한, 1 번식 말하기와 다를 바 없었다.
반면 에이든의 말은 상대를 향해 확장된 사고가 담긴 표현 방식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고력의 정의는,
'단순한 '정보'나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유추하고 해석하며, 감정과 연결해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되어있다.
1번처럼 단순한 정보만 나열하는 말은 감정이나 해석이 비어 있어 자기 목소리를 담기가 어렵고,
2번처럼 '정보 -> 유추 -> 자기 판단'의 흐름을 따라 말할 수 있는 아이는 글도 길어지고, 말도 이야기처럼 흘러간다.
그렇다면 내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에이든의 말이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도록, 좋은 질문을 많이 던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사고력을 키우는 '말'은 결국, 좋은 질문과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동네 학원가를 걷다 보면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문구가 '사고력'이다.
그만큼 미국이든 한국이든 생각을 깊고 넓게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다 공감하는 목소리 같다.
그런데 사고력은 질문 없이는 키워지기 힘든 능력이다.
미국 아이들도 타고난 것이 아닌, 부모와 선생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들이 쌓여 지금의 말 잘하는 아이들로 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을 잘한다는 건 유창함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해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다.
그 능력이 쌓인 아이는 나중에 어떤 글을 써야 할 때도 처음부터 종이에 갇히지 않고, 이미 입 밖으로 꺼내 본 생각을 다시 정리해서 좋은 글로 만들 수 있다.
결국 사고력은, 말하는 만큼 자라고,
그렇게 자란 사고력을 더 깊이 있게 다듬고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글로 담는다.
✍️ 이 연재는 매주 목요일 정기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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