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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김아람 Dec 19. 2024

뮤지컬 클로버

'만약에'

간만에 창작뮤지컬 온라인 무료중계가 있어 연말에 큰 선물 받듯이 감사히 보게 되었다.


(다시 한번 온라인 중계를 허하신 관계자님들을 향해서 큰절 꾸벅)


관극 전 내가 가진 정보는 창작초연, 2인극, 자유극장, 클로버와 고양이 포스터 정도였다. 여러 모로 열악한 자유극장이지만, 자유극장이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유독 애정했던 극이 줄줄이 떠오른다. 뮤지컬 브론테, 라레볼리시옹, 유진과 유진을 보기 위해 노란 계단 밑으로 걸어내려갔던 그 설렘들. 비 오는 날의 축축함. 관극 전 리허설 소리, 삐걱대는 의자, 번쩍 일어나서 치던 물개박수와 셔터소리 등등 그 뜨거움이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이번 중계극 역시 자유극장으로 떠나는 미지의 여행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챙겨보게 되었다.


처음 보는 배우 2인이어서 왠지 낯선데, 첫 넘버부터 심상치 않은 복장과 진한 메이컵에 항마력이 딸리기 시작했다. 저 펄럭이는 복장과, 과한 서클렌즈와, 고장 난 AI가 문학책 읽는 것 같은 단어. 마돈크 백작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극이 나랑 안 맞나 싶을 즈음 정인이가 청량하게 등장했다. 그런데 정인이도 역시 나에겐 다른 이유로 항마력이 딸렸다. 할머니랑 사는 폐지 줍는 착한 청소년이라니,, 너무 해묵은 설정 같아서 점점 극이 나에게 튕겨나갔다.


그런데 두 배우가 만나는 시점부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영상 속 고양이가 헬렐로 변신해서 근본 없는 문학체(?) 말투로 정인이에게 방좀 내달라고 당당하게 구걸하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를 집중시켰다. 그리고선, 뮤지컬 댕냥시(개와 고양이의 시간)처럼 사람이 고양이 역할을 하는 캐릭터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헬렐 역의 강찬 배우가 얼마나 귀여워지던지, 그 요상한 고갯짓과 몸놀림 역시 고양이에서 따온 게 눈에 보이며 극이 한껏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오드아이 설정으로 컬러렌즈를 낀 것이고, 고양이 관절처럼 움직였던 요상스럽고 뻔뻔한 몸짓이었다. 동물 캐릭터를 깊이 연구한 듯한 배우가 귀엽기 시작하니 나는 이미 졌다.


자유극장 답지 않게, 극은 센스 있는 영상 화면배경과 회전무대를 잘 사용하며 시각적으로 제법 풍성하다. 그리고 두 배우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율동(?)스러운 동작으로 합을 맞추는데 그게 꽤 잘 맞아떨어져서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가령 지옥으로 가는 여행길이나 햄버거힐에서 춤추듯 일하는 설정들이 소극장에 꼭 맞을 정도로, 과하지 않을 정도로 번잡스럽게 시선을 집중시켜 주는 게 딱 좋았다.


이 극이 나에게 더 잘 다가왔던 이유는 사실 넘버이다. '만약에', '클로버' 등 웬만한 넘버가 모두 서정적이고 착한 느낌인데 귀에 부드럽게 착 붙는다. 두배우 다 넘버랑 목소리와 모습이 딱 어울리다 보니, 이젠 항마력 딸리기는커녕 극 안에 내가 들어가서 같이 공명하게 시작했다. 온라인 중계는 게다가 클로즈업을 해주니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더 집중이 잘되기도 한다.  

내용은 뻔한 듯 뻔하지 않은 스토리인데, 알고 보니 이게 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클로버'를 창작뮤지컬 초연으로 올린 것이었다. 딱 청소년 동화 같은 착한 시놉시스 같았는데, 알고 보니 원작이 청소년 문학 소설인 것을 안 이후, 그것을 안 읽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극을 본 이후부터 자꾸 머릿속에서 넘버가 반복되며 헬렐의 냥냥펀치와 그 뻔뻔한 눈빛이 떠올라서 나는 결국 책을 찾아 빌려보게 되었다.


책 안에는 헬렐과 정인 말고 할머니와 재아의 서사까지 있어서 훨씬 풍성하고 전후사정을 이해하기가 좋았다. 뮤지컬과 책을 함께 볼 기회는 많지 않다. 그래서 하나의 줄거리를 책의 형태와 뮤지컬의 형태 두 가지로 맛볼 수 있고, 이것을 또 비교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큰 즐거움이자 기쁨이었다. 내가 작가라면 내 글이 극장에 올려질 때 얼마나 설렐까? 책에는 헬렐과 정인이 말하는 것과 완벽히 똑같은 대사도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이 마치 대본집을 읽으며 뮤지컬을 다시 보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곰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뮤는 순간에 사라지니, 글이라도 챙겨볼 수 있어서 소중했다.


나에게 이 극의 눈물포인트는 정인이 할머니에게 식사를 초대한 후, 할머니가 먹는 것을 보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과 넘버이다. 아마도 극장에서 다들 훌쩍거리지 않을까 싶은 그 넘버인데, 그걸 할머니 없이 혼자 연기하며 그 감정을 잡아간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사랑을 참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읊조려서 그런지 더 깊이 와닿았다. 현존하는 것 중 가장 강력한 건 역시, 사랑인가 보다.


헬렐은 악마지만 왜 이렇게 정인을 바르게 이끄는 인도자같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마지막에 숙박비까지 야무지게 계산해 주고 떠나는 매력쟁이 헬렐. 특히 강찬 배우님 초면인데 심하게... 잘 어울리십니다.. 헬렐을 직접 보고 싶어서 꼭 직관하고 싶어졌다.


이 극에서는 '만약에'라고 유혹하는 악마는 오히려 착해 보이고, 현실 속의 목사, 보험설계사, 햄버거 사장 등등이 만약에로 꾀어내는 악마 같았다. 만약에라는 내 안의 모든 갈망 속에서 '너'를 기어이 발견하고 싹트게 하는 그 마음. 그 착한 마음을 뮤지컬에서는 순도 깊게 보여준다. 절대 순수여서 헬렐이 탐낼만했던 정인이는 내가 봐도 여전히 이질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또 홍성원 배우가 너무 찰떡이어서 서사가 또 납득이 간다는..ㅎㅎ


고양이 안으로 들어간 악마의 휴가, '만약에'라는 단어로 내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뭔지를 은근슬쩍 생각해 보게 하는 착한 극, '뮤지컬 클로버'가 흥했으면 좋겠다. 나는 창뮤를 사랑하고, 특히 창작 초연극을 좋아한다. K-뮤지컬이 뻗어나갈 그날을 기다리고, 내가 그냥 공연장 하나 턱 사서, 내 본진 실컷 공연하게 운영하는 착한 건물주가 되기를 꿈꾼다. (나 역시 이미 '만약에' 병에 걸린지도 모른다.)


청소년 소설을 창작 초연극으로 만들어보는 용기, 제작진의 창의성은 또 하나의 독특한 창뮤를 탄생시켰고,덕분에 오래간만에 800번대 문학파트에서 책도 한 권 빌려보게 되었다. 또 나를 자유극장 직관을 꿈꾸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나는 이 극장과 질긴 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2월의 온라인 뮤지컬 무료중계라는 선물,  뮤덕에겐 이 선물이 헬렐이 속삭이는 어마어마한 낚시였고, 나는 대책 없이 또 낚여버렸다.  


* ‘피어나’ 넘버 (헬렐)

넌 모르지 네게서 얼마나 달콤한 냄새가 나는지

난 느껴져 아직은 영글지 않은

네 안에 가득한 새까만 열매들이

나는 알아 너를 가질 방법을

황금과 지폐 쥐어준다면

누구나 다 변해 처음엔 싫대도 결국에 인간은 다 똑같아

네 손에 세상을 쥐어주고 씨앗을 싹트게 하고 싶어

풋내기 클로버 따위 말고 정말 대단한 걸 주고 싶어

널 내 지옥으로 데려가 모든 문을 열어주고 싶어

욕망이 꽃피는 곳 파라다이스

너도 화려하게 피어날 테니


난 널 원해 오랜만의 휴가에 기쁨을 피워줄 낙원을

어차피 언젠가 너도 날 원하게 될걸

당연히 그러니 피어나


헬렐이 히브리어로 '빛나다'라는 뜻이라는데, 찬란 = 헬렐. 운명인가?
헬렐이 정인에게 한 첫마디 "두려워 말라, 소년."  진짜 고양이스럽다. ㅎㅎ
어찌 이리 절절히 잘부르던지.
뮤의 분위기와 흡사한 산뜻 깜찍한 책 표지.
악마가 말하면 속는 척이라도 해, 좀! ㅋㅋㅋㅋ
우리 동네  헬렐이. 너도 무해한 악마니?
황금빛 눈. 너 키키 아니고 헬렐이 맞는 것 같아.

*뮤지컬 사진출처 : 네이버 TV 무료중계 장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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