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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Jan 13. 2022

길을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이 불었다.

이 더운 나라에 얼마 없을 소중한 바람이다.

매일같이 비가 오는 우기가 지나고 나면, 저녁나절에 선물처럼 바람이 선선하게 분다.

십이월 동지 무렵에 눈 없이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며 지나기를 벌써 햇수로 8년 째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이 비슷한 나날이 계속되다 보니까 세월이 가는 줄 모르고 나이를 먹는다. 지난 십이월은 작년 들어 세 번째 이사로 분주했고, 나는 혼자 있는 집이 싫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을 불러 밥을 해 먹었다. 그러다 보니 집들이 선물로 살림살이도 늘고 열몇 평 남짓 되는 집도 제법 살 만 해 졌다. 비가 와서 눅눅해져 생기는 집 곰팡이만 아니면 완벽했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곰팡이 진드기 때문에 매일 같이 창문을 열고 햇볕을 쬔다. 그러면서 웃는다. 지지난 번 집에서는 열 수 있는 창문조차 없지 않았나. 그럼에도 삼년 반을 잘만 지냈다. 새 집주인한테 항의해서 오기로 한 청소업체는 거의 3주나 예약이 꽉 차 있다고 했다. 그래, 여기는 동남아지. 가끔은 그냥 혼자서 해결해야 할 것들도 많다. 그래도 나는 청소를 제법 좋아한다.


작년 마지막 날, 나는 코로나 시대를 맞고 세 번째 접종을 했다. 그 후의 기분은 참 별로였고 몸은 한없이 땅속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일부러 주말을 쉬려고 마지막 날에 접종을 한 건데, 이불속에서 낑낑대다가 잠이 들었다. 냉장고 속에는 쟁여둔 음식이 가득했지만 하루에 두 끼 이상은 잘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이 주의 시간이 흘렀는데, 정신 차려보니 지금 여기에 있다. 스스로 많이 해 왔던 고민들은 해가 바뀜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에 또 다른 현실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눈앞에 있다. 하지만 그냥 그대로 두고 그때그때 가능한 일을 찾아 집중하려고 한다. 뭔가에 몰두하고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행복하다.


오늘의 하루 일과를 마치고 탄수화물이 없는 저녁을 해 먹은 다음, 나는 선선해진 길을 걸었다. 이사 오고 나서 처음 걷는 골목길의 집들은 신선하게 보였다. 비슷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속에 내가 놓여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이방인임을 느낀다. 그때의 마음은 산란하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하다. 어딘가에 정착해서 뿌리내려 살고 싶기도 할 텐데, 지금의 나는 그저 흘러 흘러 흐르는 대로 살고 있는가. 물길에 몸을 맡겨 흘러 내려온 기분이지만 다행히 내가 안착한 곳은 꽤 안락해서 다행이다.


오늘 있었던 일들 가운데 마음에 제일 남았던 일은 건보료 고지서에 관해 문의 전화를 했던 거였다. 한국 집에 다녀올 때마다 병원에 가는데 그때마다 돌아오고 나면, 추가 납부 고지서가 왔었다. 원래는 세대주의 피부양자로 등록이 되어 있다면, 건보료 추가 납부 같은 건 없다는 걸 어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화로 문의를 하다가 결혼을 했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인 즉슨, 혼인 신고를 한 건 보험 공단에 신고가 되지만, 이혼이나 사망의 경우 본인이 꼭 공단에 알려야 하는 법규가 있다는 거였다. 하긴, 국민 연금 추가 납부를 하려고 해도 '이혼' 관계가 나오는 상세 혼인관계 증명서가 필수로 들어가야 한다는 건 - 법적인 테두리가 없기에 오히려 나의 노후를 더 챙기고 싶어서인데 그것도 증명이 필요한 건가 싶어서 - 더더욱 별로인 사실이다. 지난 번 서울 행 때 서류를 떼어두기를 잘했다. 공인 인증서 같은 것도 컴퓨터에 저장해 두길 잘했다. 연말들어 휴대폰 화면이 박살 나고, 벽에 곰팡이가 핀 걸 발견하고, 이제야 다시 모든 걸 바로 잡은 지금.


일련의 일들이 액땜이 아니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계시만 다. 한 살 더 먹을수록, 하나씩 하고 싶은 일은 줄어드는 건 사실이다. 브런치 프로필에 썼듯 열정이 사라지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들어가며 살고 싶지는 않다. 작년에 세웠던 목표 열 가지 중에, 내가 이룬 건 딱 한 가지였다. 그래서 올해는 하나의 목표만 세워보려 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살자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말고 하자. 그게 나의 올해 목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내가 다시 삶을 재정비하고자 했을 때 마치 사금하면 찾아지는 반짝거리는 한 두 개의 진실 정도는 있을 거라 믿는다.


삶은 언제나처럼 흔들린다.

바람처럼 흔들리고 풀처럼 나부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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