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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Dec 16. 2020

요가가 나를 살게 하는 날

하루를 마감하며 잠깐 남기는 감상평

요가가 나를 살게 하는 날이었다.  알람 소리도 못 듣고 늦잠을 자버리고 오래전부터 잡았던 점심 약속도 본의아니게 깨버린 날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남의 말 안듣는 어떤 사람 때문에 어제 종일 내 에너지를 빼앗겼더랬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갑질은 해외에 살아도 늘 존재했단다.

그렇게 이불킥하며 잠도 못자고 맘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도 어거지로 요가 매트에 나와서 몸을 움직이다 보면 숨이 쉬어진다. 너무나 다행이다.


점점 어깨랑 가슴을 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자세가 완성되고, 승모근이 굳었을 때 나는 턱 관절 소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 자신 뿐 아니라 가만히 주위를 살피다가 내가
걸음마 할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생각나서 옆 사람도 돕게 된다. 열심히 자세를 만드려는 옆 사람을 보며 나의 초심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런 삶의 자세가 좋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걸 숨기면서 사는 점심밥, 바라는 게 있어 주고 받는 선물,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 나름 자신의 최대치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내 욕하는 걸 빤히 아는 그 사람과는 제발 안 엮이고 싶다. 하지만 이전 같았으면 몇 년 묵은 것들을 협상의 카드로 들고 나왔을 그녀에게, 이전처럼 뭉개지지 않고 방어를 잘 해낸 내게 보상하듯, 2시간의 수련 후  요가 선생님의 지나가는 한 마디.


"아일린은 점점 강해지고 있어요."

 
나는 살고 싶다. 강하게. 내 목소리를 내면서.

오죽 사람이 내뿜는 기가 악하고 나쁘면
"경이로운 소문" 같은 드라마가 나오나.
사람에게 악귀가 씌여 원래 영혼이 피폐한 것이라면 이해되지만, 악한 사람이 초록 동색처럼 악귀의 표적이 된다는 발상은 조금 슬플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드라마 속 빌런들에게는 타인의 상처에 감응하는 공감대 자체가 없다.


"사람이.어떻게 그래요?" 라고 소리치는 소문의 마음에 땅이 흔들려 공명하듯이, 착한 마음들에 공감해 주지 않으면,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무지개빛 시너지는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우리는 자본의 노예가 되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쫓아서 살고 있나.지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나는 종종 그걸 잊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려면 내 안의 내가 충분히 쉬고 작은 행복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도 있다. 특히나 마음이 힘든 날에.

나를 비우고, 좋은 것들로 채우자고 다짐해본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그렇지만 이제는 제발 만만해 보이지 말고 내 의견을 말하자. 옳다고 믿는 걸 행하며 살자. 그렇게 살다보면 '나'라는 덩어리도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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