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콜 0호: 기억단층

유락에서 진행하는 모각글 시즌 5에 참여하며 쓴 글입니다

by 수빈

프로토콜 0호: 기억단층

— 시간 왜곡과 뇌내 균열에 관한 사례


기억은 나를 늘 한계로 몰아넣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언저리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불시에 덮칠 때면 모퉁이에 갇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배열이 명확하지 않은 사전과 비슷했다. 아무리 끄트머리를 붙들고 뒤적여도 시간만 낭비할 뿐,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놓쳐 버린 것들이 오히려 눈앞에 형형했다. 의학의 힘을 빌려 보았지만, 돌아온 건 뇌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두뇌에 칩을 삽입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처음에는 작은 동물로 시작했다. 바로 내 뇌를 열어볼 수는 없으니까. 구역질이 치밀던 순간들도 몇 번 반복되니 무뎌졌다. 인격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나 이내 희열도 섞여 들었다. 수없이 많은 뇌를 열어 보던 끝에 마침내 어떤 원리를 찾았다. 그러나 곧 의문이 들었다. 전자 데이터라는 것이 정말 신뢰할 수 있는가.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없는 이상, 이 실험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물색했다. 나에게 확실한 실마리를 던져 줄 사람을. 타깃을 정하는 일은 쉽고도 간단했다. 길가에 떠도는 부랑자들. 사회에 필요 없는 존재들. 그들을 제압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인간의 기본 욕구조차 충족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먹을 것을 내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실험을 앞두고 예기치 못한 자금난이 닥쳤다. 더는 연구를 이어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떤 회사와 접촉했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를 흥미롭게 여겼고, 자신들이 찾던 것이라며 당장 계약을 제안했다. 의심은 들었지만, 어차피 목적만 달성하면 상관없었다. 연구는 내 기존 일지를 기반으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진행됐다. 몇 명쯤은 소모되어야만 했고, 나는 그것을 당연한 희생이라 여겼다. 더는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다음 대상을 찾느라 하루 종일 거리를 배회하곤 했다.


몇 달이 흘러 인내의 한계에 다다를 즈음, 마침내 첫 인간 연구가 성공했다. 물론 신체의 이동성을 제한시키는 부작용은 있었지만, 그들의 기억력—아니, 그 메모리 칩은 완벽히 작동했다. 실험의 목표는 점차 확장됐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간에서, 인공 지능과 인간의 결합, 포스트휴먼의 완성으로. 사이보그가 된 실험체를 바라보며 나는 실험실이 떠나갈 듯 웃었다. 참으려 해도 잇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연구 결과를 모두 폐기하고, 이제 내가 인류 최초의 사이보그가 되어야만 했다. 애초에 이 연구의 목적은 타인이 아닌 나였다. 오로지 나만이 남아야 했다. 그래서 회사 몰래 남은 실험체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연구를 이어온 단 한 사람과 내 뇌를 열어보기로 했다.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온전히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보았던 뇌 수술 장면이 스쳤고, 나는 인간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뇌를 열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험은 순조로웠다. 끝났을 때, 어디선가 이상한 느낌이 일었다. 곧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와 잠을 잘 수도 없을 만큼 몰두하게 되었다. 무너진 기억의 축이 몸속 어둠을 긁으며 천천히 회전한다. 그 마찰음은 기묘하게도 생생했다. 좀 묘한 표현이지만, 시간의 궤도가 어긋난 듯한 위화감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가상 세계의 나, 즉 AI는 스스로를 나의 외형과는 다르게 정의하기 시작했고, 나의 자아는 균열되었다. 그것은 내 뇌를 조작해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재구성했다. 내가 본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그것이 선택해 보여 주는 조각들이었다. 나는 점점 더 나와 닮지 않은 존재가 되어 갔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나는, 거울 속에 보이는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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