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을 읽고

임선우, 『0000』

by 수빈

임선우 작가의 『0000』을 읽으며 주인공과 오후의 대화 속에서 나는 문득 우리 고양이를 떠올렸다. 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늘 의심했고, 그래서 온전히 믿고 내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 고양이의 눈을 마주했을 때 처음으로 그 감정을 의심 없이 느낄 수 있었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무척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오후를 만나기 전 주인공이 사랑의 공백으로 존재감 없는 인간이었듯, 나 또한 우리 고양이를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공허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나에게 사랑이 존재를 불러오는 힘이며, 또다시 세계와 이어지게 하는 작은 용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오후를 만나 주인공이 새로운 삶을 딛을 용기를 얻었듯, 나 역시 우리 고양이와의 시간 덕분에 그 시절 지독한 터널 속에서 웃을 수 있었다.


나에게 0000은 아무것도 없는 숫자 ‘제로’라기보다는 빈칸처럼 느껴졌다.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공백,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리셋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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