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의 일화를 태생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태생이 그런 것 같다. 태생적으로 불안함과 은근히 예민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먹는 것도 그다지 잘 먹지 못하는 편이었다. 한창 클 나이에는 잘 먹는다고 하던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먹는 것 자체가 너무나 귀찮고 흥미롭지 않은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먹는 것이 너무나 귀찮고 벅찼다. 항상 ‘ 한 알만 먹어도 배부른 알약’을 원했다. 지금이야 먹는 것에 애착을 느끼지만, 어린 시기에는 짜장면, 라면 하나를 다 먹지 못했고, 항상 한 끼를 다 먹는 것이 어려웠다. (어느 순간 한 그릇을 다 먹었을 때,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으니 하나를 다 먹는 것은 운동선수들이 매번 도전해야 하는 목표 같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못 먹는다는 소리와 사내답지 못하다는 말은 항상 들어오던 큰 벽이었다. 먹는 것 하나로 내 모든 것이 평가되는 것이 너무나 스트레스였다. 그저 좀 덜 먹을 뿐이고, 누구에게 해가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부정적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먹는 것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한 모습이 어른들에게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한 풍조는 지금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를 닮아 못 먹는다, 여자애도 아니고, 사내자식이….'
열받지만 항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을 바꿀 자신이 없어서 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먹는 것에 대한 평가와 ~답지 못하다 라는 말에 대해 배타적이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이런 것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래서 나는 잘 먹어서 보기 좋다 라는 말은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그 말을 칭찬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잘 먹는 사람에게 칭찬하는 것은 좋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먹는 사람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못 먹는 것일 뿐인데 어째서 비아냥을 들어야 할까?
이러한 환경도 내 불안함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못 먹는다는 뒤떨어짐이 불안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지금도 배부른 상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배가 부르고 포만감이 가득해지면 기분이 좋기보단 안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