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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Aug 28. 2021

여행 중 비가 하는 말

너가 나 좋다니까, 나도 너가 좋아지는

여행 중에 갑자기 비가 오는가? 그렇다면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나도 여행 중일 것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소풍 갈 때마다 비가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 운동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린 저주인 줄만 알았다.(다른 초등학교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정이 되면 칼을 뽑는다는 전설이 있었을까?) 성인이 되고서는 당일 여행은 워낙 자주 가니까 늘 비가 오지는 않았다. 일박 이상의 여행을 가면 비가 왔다. 해마다 대학교 동창 몇 명과 다양한 지역에서 숙소를 잡아 모였는데 항상 비가 왔다. 비를 맞으며 수영장에서 놀고 실내 바비큐장에서 고기를 구웠다. 실외 일정은 다 빼고 방에 있었다. 계획이 줄어서 남아버린 에너지는 밤새 수다로 풀었다. 직장동료들과 여행을 갈 때도 비가 오면 엄마는 말씀하셨다. "너 어릴 때부터 그랬잖아. 그거 너 때문이야."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나 때문인 걸 아직 모른다.


 아이가 태어나고는 강릉을 주로 갔는데 아이가 모래놀이를 하던 중에 비가 왔다. 아기 때는 비를 맞으며 모래놀이를 더 하겠다고 울었고 조금 더 크자 몰려오는 먹구름을 힐끔 꺼리며 비가 내리는 그 순간까지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이가 된 아들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강릉이란 원래 비가 오는 도시인 줄 알고 있었다고.


 3박 이상으로 계획한 제주도 여행 중에 적어도 하루는 태풍을 동반한 비가 내렸다. 제주도는 원래 삼다도니까 바람이 많고, 바람이 많으니 비도 당연히 오는지 알았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해도 비가 오지 않았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상해버린 마음은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을 하지 않으면? 국지성 소나기가 찾아온다. 어딘가로 이동할 때 와이퍼가 최고 속도로 일을 할 정도의 소나기가 내린다. 차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잠깐 내리고,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정확하게 그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쨍하고 맑은 날씨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 엄마는 딸을 생각하신다. ‘얘가 또 어디 이동하다 비를 맞았겠구나.’


 햇살 좋은 날 춘천 출장을 가던 날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소나기가 심하게 내리쳤다. 일기예보를 철저히 보고 출장 일정을 잡고 운전을 한 남자 직원은 비가 그치자 실은 너무 무서웠다는 심경을 고백했다. 나 때문에 내린 비라는 것은 고백하지 못했다. 그래도 걸어서 조사 다닐 때 비가 안 와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세상 긍정적인 직원의 이미지를 비가 쫓아다니는 이미지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을 떠올리면 비에 젖은 나무 냄새가 난다. 자동차 천장에 부딪히는 요란한 빗소리와 우산에 떨어지는 가벼운 빗소리는 각기 다른 근사함이 있다. 소음에 유난히 취약한 나도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공기, 다리에 튀는 차가운 물방울이 동시에 느껴진다. 여행이 끝날 무렵 비가 그치고 투명해진 하늘, 적당히 내리쬐는 햇살, 그런 날 집으로 돌아가기는 아쉽다.



 아이 어릴 때는 비가 오면 초미세먼지 걱정이 없어서 비 냄새를 반겼고, 코비드 19 이후에는 비 오면 사람들 별로 없겠다며 무조건 나가고 본다. ‘가서 놀다 보면 그치겠지, 하루 종일 오진 않겠지, 다음날은 그치겠지, 반나절은 놀 수 있겠지, 반나절은 최선을 다해서 놀자.’라고 이야기한다. 이제는 주말 아침 비가 내리고 있다면 아이는 늦잠 자는 아빠를 깨운다. 우리 드라이브 가야 한다고. 이제는 아이가 좀 컸기 때문에 비를 맞으며 산책을 하고, 때론 자전거도 타며, 해수욕을 하기도 한다. 20대에도 안 하던 비 맞고 놀기를 하게 될 줄이야.


 어제는 남편이 걱정스레 말한다. 다음 주에 바다에 가기로 예약된 날, 비가 많이 올 것 같다는 것이다. 일기예보가 잘 맞던 시절에 살아본 적 없는 아들은 예보를 믿지 말라며 아빠를 혼낸다. 사실 예보를 보고 숙소 예약을 해도 비가 온 적이 태반이기 때문에 예보를 보지도 않고 숙소 예약을 했다. 비 오는 게 뭐 대수냐는 듯 무시한다. 그러자 남편이 말한다. "그래~ 비 오는 날 여행이 또 운치가 있지. "


 운치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아이 출산 이후  손목터널 증후군과 팔꿈치 엘보우가 생긴 사람이 아기띠를 메고 우산을 들고 걷던 과거를 떠올리니 왼쪽 팔이 갑자기 시큰거린다. 이제는 아이가 커서 짐도 거의 없고, 아이 감기 걱정에 쫓아다니며 옷을 여며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힘없는 나의 반곱슬 머리는 아무리 드라이를 하고 나가도 습해지면 찹찹 달라붙고 꼬불꼬불해지는데 고상과 우아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이번 여행도 내 인생 제일 어린 날의 여행인데, 인생 샷 하나 건져야 하지 않을까.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애정도 중요하지만(그래서 남편이 찍어준 사진은 늘 실패다. 너무 실물과 똑같이 찍어준다.) 그에 못지않게 빛이 중요하다. 날씨가 맑아야 햇빛과 함께 인생 샷을 건질 수 있다. 사진마다 가득한 강풍에 뒤집히는 머리카락도, 습기에 꼬여버린 머리카락도 싫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실내 일정으로 바꾸기도 찝찝하다. 남편과 아들 앞에서는 쿨한 척하였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몰래 기청제(날이 맑기를 기도하는 제사)라도 지내고 싶다. 일단 감사 인사 먼저 드릴게요. 비가 올 때마다 여행들을 먼저 추억하는 덕분에 매년 길어지는 장마철에도 우울해할 겨를이 없어요. 특히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장마 우울증을 많이 겪는다고 하는데, 비가 오기도 전부터 찌부등해진 몸을 일으켜 우산 들고나가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장마 우울증은 일반 우울증과 달리 식욕이 증가한다고 하는데, 비가 와도 전과 막걸리가 당기지 않는 강한 멘털도 가지고 있어요. 그건 그거고, 다음 주 여행은 비 좀 안 내려주면 안 되나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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