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점심시간에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집에 다녀오는 날이 있었다. 유독 답답한 날, 점심시간이라도 업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그럴 때가 많았다. 이동시간을 빼면 남는 30분 정도를 남편도 아이도 없는 빈 고요한 거실에 앉아 빵을 씹고 커피를 마시면 숨통이 트였다.
1월에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사무실이 집에서 멀어졌다. 왕복 시간 빼면 집에서 커피 한잔 원샷 하기도 빠듯하다.
점심시간이라고 민원인이나 전화가 덜 오는 것도 아니니 책상에 앉아 책을 펼 수 없는 노릇이다.
커피 한 잔 마시러 나가고 싶어도, 직원들에게 선뜻 나가자 말할 입장이 아니다.
야근을 안 하기 위해 점심시간에도 일하는 직원이 있고, 팀장이랑 커피 마시는 게 노동으로 느껴질 직원들도 있을 수 있다고 나름 배려한 것이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나: 점심시간에 좀 쉬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혼자 카페 가서 커피 마실 수도 없고. 그러다 직원들이나 단체장님들 마주치면 좀 이상하지 않나?
남편: 제일 좋아하는 거 해. 카페 가서 책 읽어.
나: 그럴까? 그래도 될까?
남편: 그러다 직원들이나 누구 만나면..
나: 만나면?
남편: 와, 저 팀장 진짜 특이하다고 소문날 거야.
나: 솔직한 조언 고마워.
기가 차지만 현실이다. 온라인 속 지인들은 늘 카페에서 혼자 책 읽는 것이 일상이지만 나의 삶에선 특이한 거다.
얼마 전 본청에 있는 직원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다. 크림 커피가 맛있는 사무실 앞 카페엔 전문가가 오래 키운 듯한 특이한 화분이 많고, 테이블 위엔 두꺼운 원서들이 있다.
원서 제목을 함께 해석해 보다 다들 형편없는 실력을 확인하고는 한참을 웃었다. 늘 더 웃기고 싶은 욕심이 있는 나는 한 마디 보탰다. " 나 사실 원서 읽기 모임도 하는 사람인데.ㅋㅋㅋㅋ"
"뭐? 원서를 왜 읽어? 차라리 회화 공부를 해!"
내가 아는 블로거나 유튜버들은 대부분 원서 읽기를 노력하지만, 직장에선 신기한 이야기이다.
흔치 않게 나의 원서 읽기와 필사에 대한 노력도 이해해 주는, 후배가 있다. 며칠 전 메신저가 왔다.
후배: 팀장님! 우리 술 언제 마셔요? 애들이 보고 싶대요.
나: 요즘 약속은 없지만, 매주 zoom 모임이 있어서 좀 부담이 되네. 3월 중순 이후에 잡아줄래?
후배: zoom이요?? 우와. 팀장님도 참 특이하시네요!
남편과 서로의 진로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남편: 글을 쓰는 쪽으로 계속해봐.
나: 글도 잘 못 쓰는데, 왜??(기대 기대*_*)
남편: 글을 쓰려는 사람이 없잖아. 블루오션이야. 나: 도대체 뭔 소리야~ 내 주변 사람 열이면 열 다 글을 쓰는데!!!
남편: 그래??? 내 주변엔 온라인이고 오프라인이고 단톡방이고 아무 데도 그 누구도 글쓰기에 관심 없는데??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온도 차이는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니었다. 온라인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구독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서로이웃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소통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온라인 세상은 온통 책 읽고 줌으로 책 모임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지구인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든다.(나 빼고.)
본캐, 부캐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직장인으로서의 본캐, SNS 유저로서의 부캐로 요리조리 적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냉온욕을 하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일까?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를 오가며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 하며 내 속의 산과 알칼리 평행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도 통신을 단절하고 일상을 보낸 반나절과, 일상을 단절하고 이렇게 주절대며 보내는 몇 시간이 합쳐져 내가 버티는 미적지근한 하루가 완성되었다. 오늘 하루와도 잘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