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공에 대한 열의로 뜨겁게 달아오를 때 환희에 동참해 줄 이도 없고, 실망감에 시달릴 때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제 생각들을 종이에 적을 수야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소통하는 데는 썩 훌륭한 매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공감해 줄 사람이 동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라보면 눈빛으로 화답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프랑켄슈타인 p.23~24
감염취약계층 자가검사키트를 수령하라는 공문이 왔다. 오늘 2시 이후에 신속히 수령하여 배부하란다. 담당자가 차가 없어 곤란해하는 눈치길래, "내가 가져올게!" 하고 외쳤다. 직원은(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미안해한다. 난 굉장히 침착한 척했으니까.
' 오늘 본청 가서, 키트 수령해서, 돌아오는 총 1시간가량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다. 드라마를 들으며 다녀올까, 음악을 들으며 다녀올까,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마시며 다녀올까!' 신난다! 하지만 티 내지 말자!'
마음의 소리
직원이 다시 온다.
직원 : 아무래도, 저와 같이 가세요. 무거워서 못 드실 것 같아요.
나 : 아니? 나 들 수 있는데? 저 박스만 한 거잖아? 충분히 들 수 있어.
직원 : 그렇긴 한데, 저번에 들어보니까 엄청 무거워요. 못 드실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담당자인데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서요.
나 : 편한 대로 해~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혼자 가도 되고, 같이 가도 되고~.(웃음)
쿨한 척 대답한다. 그도 나이 훨씬 많은 팀장인 나랑 출장을 다녀오고 싶진 않을 텐데, 오죽하면 그러겠는가. 맘 편하게 해줄 수밖에. 좋다 말았다!
아무리 발이 넓은 사람이라도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람은 150명에 불과하다는 ‘던바의 법칙’이 있다. 그중에서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대뇌 영역 중 신피질이 담당한다고 하는데, 내 것은 평균보다 작지 않을까 싶다.
학창시절에 우루루 만들어진 그룹에 소속은 되어있었지만, 그 그룹과 별개로 단짝 친구가 한명씩 있었다. 그렇게 꼭 붙어 지냈던 친구들이 많지는 않다. 대학교 4학년까지 한 명 한 명 차곡 차곡 쌓이다 취업을 하거나 결혼하며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더 자주 얼굴을 보게 되는 직장 동료들과 나이 상관없이 친구가 되었다. 다른 부서로 발령받을 때마다 한 부서 당 한 명씩 친구가 되어 차근차근 모였다. 한두 달에 한 번 모이는 걸로 회칙을 정하고 모임 이름도 만들곤 한다.
<와인 모임>(소주를 마시는 모임.) , <이지더원>(이씨들 사이에 원씨 한 명 있는 모임), <짝사랑모임>(술을 짝사랑하는 여성들의 모임), <FM> (프런트라인 미팅의 약자로, 민원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모임) 등이 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수록 신경 쓸 사람들이 많아진다. 양쪽 부모님의 늘어나는 나이도 버거움에 한몫한다. 소중하게 모인 인연들에게 안부 연락도 못 하고 산다. 나의 던바의 수는 진작에 초과되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육아에 야근에 회식에 마음과 정신이 늘 북적북적했다. 혼자 있고 싶어서, 잠을 꾸역 구역 참아내며 아침이 다 될 때까지 깨어있곤 했다. 그 시절 친구들 역시 전국 각지에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외롭다고 하소연했다. 넌 왜 외롭지 않느냐며 신기해했다. 외로워보는 게 소원이라고 냉정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렇게 더 힘들다고 애써 표낸날은 한심해서 짜증이 난다.
이끌고, 주도하지만 않아도 된다면 북적북적한 곳에서 에너지를 얻는 스타일이다. 동료들을 만나고, 그 외 업무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기가 빨린다. 한편으로는 그 스트레스가 그럭저럭 최소한의 에너지 충족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아이 8살에 육아휴직을 들어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도, 친구들도, 아이 친구 엄마들도 이제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좋아했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복직이 다가올 때까지 코로나로 몇 번 만나지 못했거나,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어떤 날은 코로나 핑계를 댄 걸 수도 있겠다. 혼자 있을 때 가라앉고 우는 날도 많았지만, 외로움에 대한 결핍은 끝내 충족되지 못했다.
달력에 매주 약속이 잡히고 있다. 직원들을 비롯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 시작하자 신피질이 힘겨워하는 게 느껴진다. 사무실의 자리는 팀원들과 떨어져 있어 혼자 덩그러니 있다. 대화 상대 없이 앉아있으니 외로워 보이나 보다. 가끔 직원들이 "팀장님, 외로워 보이세요" 한다. "응, 외로운데.. 좋아! "라고 대답한다.
아이는 이제 많이 컸지만, 아직도 저녁이나 주말 약속은 부담스럽다. 아이 엄마라는 걸 내세워가며,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밤마실을 가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더 좋아하는 친구만 만나려 한다. 다른 곳에선 선택과 집중이 안 되는 사람인데, 인간관계에서는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틈이 나는 날이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마사지 받으러 간다... 사실은, 멍하니 방바닥에 누워있거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 또한 소중하다.
누군가에게 아이를 봐 달라고 말한 후 갖는 자유시간은 왜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남편에게 아이를 봐 달라고 말하는 일은 만 8년을 해도 성가신 일이다. 그래서인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나에게 전화하지 않는 시간이 간절하다.
코로나를 핑계로 슬쩍슬쩍 약속을 미룬다. 굳이 먼저 약속을 잡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아쉬울 게 없지만, 계속 이렇게 지내다 보면 노년에 '프랑켄슈타인'의 대사를 직접 치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외롭다고, 누군가의 눈빛이 그립다고' SNS에 글을 쓰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단 말이다.
아이 크고 나면 남편과 친구가 최고라는데, 당장 오늘만 본다. 그렇게 굳이 외로움을 찾아 헤맨다. 급한 일을 하거나,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진다. 오늘도 저녁에 공적인 저녁식사자리가 있어 빠져보려고 시도해 본다.
"제가 주말에 확진된 직원과 점심을 같이 먹었거든요. 지금 잠복기일지 몰라서, 빠질게요. "라고 말하자,
"주말이면 이미 잠복기는 끝났을 거에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따 아이 재운 후 잠시 갖는 자유도 사라진다. 아마 숙취에 시달리며 자기 바쁘겠지. 오늘은 이래나 저래나 외롭기는 그른 날이다. 내일 다시 외로움에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