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모임만 나가면(공식적인 회식 말고 친한 직원들과의 모임), 멤버가 바뀌어도 신기할 정도로 같은 제안이 들어온다. 엊그제 저녁 약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정 즈음이 되자, 누군가 말한다. 네 명이 차 한 대로 '강원도 인제군'에 다녀오자는 것이다.
아, 그 우크라이나?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자세히는 몰라도 눈치껏 알아듣는다. 인제에 러시아인인지, 우크라이나인인지 외국인께서 운영하시는 용하디 용한 집이 있다고 한다.(뭐가 용한지는 다들 알겠지?) 난 늘 함께하자는 제안을 거절해 왔다. 그 이유는,
첫째. 독실한 기독교인인 남편이 끔찍이 싫어하므로.
둘째. 궁금한 것이 없다. 그분께 물어볼 것이 없다.
첫 번째 이유를 제시하면 대부분 현모양처 코스프레한다며 웃고 말지만, (진짜 현모양처들은 웃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하면 인생의 쓴맛을 모르는 팔자 편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진짜(?) 이유가 있었으니, 나의 미래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재미나고 신나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삼십 대 후반부터 인생은 괴롭다는 걸 알아버렸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에 나오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란 가사를 마흔 즈음에나 이해하게 되고 만 것이다.
1일 1 암 소식 또는 1일 1 부고 또는 1일 1 힘들다는 소리들을 들으며 매일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이별하는 것이 힘에 겹다. 굳이 안 좋은 소식을 미리 추가하고 싶지 않다. 궁금한 게 없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지만, 듣기 싫은 소리가 무서워서 궁금해하지조차 않은 것이다. 미래엔 분명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재할 터이니 좋은 소리만 듣지 못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무속인 덕분에, 조기에 큰 병을 예방한 직원들도 있다고 하니 선택은 자유다.)
그 증거로, 그날 멤버 중 손금을 잘 보기로 유명한 분이 있었는데(편의상 palm의 p를 따서 p라고 쓰겠다) , p에게 그동안 내 손바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어릴 때 손금이 좋지 않다는 소리를 몇 번 들었기 때문에 듣기 싫었나 보다. 출산하자마자 아이 손금 때문에 다운증후군 검사를 받기도 했고, 이래 저래 손금에 관심 끄고 산지 오래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p에게 손금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날 함께 한 직원은 손금에 이혼수가 있다. 여러 점집에서조차 이혼수가 있다고 했으며, 심지어 아직 이혼 안 했냐고 말하는 곳도 있었다. 손금과 무속인이 같은 말을 했다니 신기하다! 순간 만취한 나 역시 손바닥을 쑥 내민다.
저 십 년 후에 이혼수 있나 봐주세요! 아이가 십 년 후에 성인이라 그전엔 안 되거든요!
손을 내미는 순간 p 외의 애들이 난리가 났다. 내 생명선이 마흔 언저리에서 끝이 난다는 것이다. 누나 몇 살이지? 마흔 얼마 안 남았나? 어머어머어머, 언니 벌써 끝나... p에게 몇 살까지 살 수 있는지, 꼬치꼬치 물었으나 갑자기 화제를 전환한다. 사실 본인은 '손금'이 아니라 '관상' 전문이라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하관이 브이라인이 아니어야 말년이 좋다. 코는 크기와 상관없이 둥글고 콧구멍이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눈은 눈의 크기와 상관없이 눈동자가 크고 까맣고 빛나야 한다. 그런 눈은 다른 사주를 이길 수 없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관상이라는 것이다. 돈도 많아질 거란다! 하필 이 조건들이 현재 미의 기준을 비껴가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뭐 어떤가. 연애할 것도 아니고, 예쁜 것보다 부자 되고 잘 사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나와 만나면서 왜 한 번도 그런 얘길 안 해주었는 지다. 같이 있는 자리에 관상이 안 좋은 사람이 있으면, 말 못 하신다고 한다. 그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서로 봐달라고 할 테고, 안 좋다는 말을 해 줄 수는 없으니까. 그날은 관상 안 좋은 사람이 없어서 얘기하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내 관상이 최고 좋다고 또 한 번 강조했다.
그날 우리는 업무 얘기도 거의 안 하고(고속버스터미널 이전 얘기는 조금 했다. 터미널 이전 문제는 우리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야기할 만 뜨거운 감자이므로 안 한 걸로 쳐주자.) 아내의 우울증으로 운 이야기,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자와 헤어진 이야기, 첫사랑과의 이별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인제에 함께 갈 이야기를 하며 늦게 귀가했다. 다음 날 아침, 네 명 다 피곤함에 후회를 했지만.
나: 기억나세요? 어제 제 관상 봐주신 거? p: 하...... 진짜 취해가지고. 관상 쥐뿔도 모르면서.. 미안. 나: 네??? 관상을 모르신다고요??? 제 짧은 손금은 기억나세요? p: 응 짧긴 짧았는데.. 뭐 재미로 보는 거지~
그렇다, 부유한 미래도 빛나는 눈동자도 다 3차(또는 4차) 술자리에서 이루어진 한낱 주사일 뿐이었다. 나의 짧은 생명선을 덮기 위하여 관상 전문가로 사기 쳐야 했던 그의 주사는 '배려'였다고 본다. 그의 고념을 고맙게 받아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을 위하여 오늘을 열심히 즐기자..................................................라고 말하고 싶다. 삶에 집착하지 않는 성인군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난 생명보험을 가입하는 대신 수명을 늘리고 말 테다. 요즘 밤 외출이 잦아서, 생명이 더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절주하고 운동하고 매일 슬픈 소식에도 스트레스 덜 받는 단단한 마음을 챙기는 8월 계획을 세울 것이다. 들린다. 생명 충전되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