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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06. 2020

36. 지금 이 곳에 있어도 될까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내가 살면서 소속된 공동체는 여러 이유로 내가 빠지면 곤란한 상황이 많았다.

단순히 내가 없으면 일의 인수인계가 귀찮다던가 그런 정도를 넘어서 내가 없으면 아예 공동체가 멈추거나 무산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런 상황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내가 없어서는 안 되는 부담감도, 모두가 바라보는 기대 가득한 눈빛도 나에게는 되려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도망가고 싶을 만큼 지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모두의 기억에 남는 성과를 내고 싶은 맘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열심히 몇 년이고 지속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지치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더군다나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체계가 없다는 소리가 된다.

체계가 없이 구성원들의 열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마치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시기도 있지만, 열심이라는 연료가 떨어지면,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철 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러면 체계를 만들면 되지.’

나도 그런 꿈을 꾸던 때가 있었다. 이만큼 기대를 받고 있고, 이런저런 성과도 만들어왔으니, 체계까지 내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틀을 다져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동의하던 사람들도 막상 체계의 기틀을 만들다 보면 몇 달 되지 않아 지친 얼굴로 말하고 만다.

지금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것까지는 신경을 못 쓰겠어.’

그렇다. 목적이 있는 공동체라면, 언제나 성과를 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성과를 내야 하는 기한이 체계를 만드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각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하는 만큼, 체계를 잡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일에 사람들이 잡아먹히고 만다.

결국 여러 번의 의견 교환 끝에 체계를 잡는 것을 뒤로 미루고 만다. 공동체는 다시 성과를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체계를 잡지 않은 일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적응하기 쉬울 리가 만무하다.

1년, 2년이 지나다 보면 누군가는 결국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고 만다.

그게 다른 이들일 때도 있고, 나일 때도 있다.


언제까지고 같은 일을 향해 꾸준히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절실하게 휴식을 원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알고 있다. 자신이 일을 쉬게 되면 이 공동체는 멈추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말을 못 하고 꾹 참고 몇 개월인가 더 해본다. 그 일을 좋아하니까. 그래도 성과 내는 것이 재밌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쉬고 싶다는 말을 참고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나, 이 곳에서 내 인생을 보내고 있어도 되는 걸까?’


쉬고 돌아오고자 하는 기력조차 남지 않게 된다.

그저 그만두고 사라지고 싶은 생각만이 절실해진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지금 옆에 있는 이들이 더 힘들어지고, 어쩌면 모두가 길을 잃고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만큼 몸도 지쳐 움직이지 않게 된다.


말없이 사라지는 이들도 생기고, 깊은 대화 끝에 짐을 정리하는 이들도 생긴다.

이 공동체가 존속되기 힘들다 하더라도, 또는 다른 이들이 너무 힘들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 곳에서 지쳐 쓰러진다면 더 이상은 나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떠난 곳이 몇 곳, 그렇게 떠나보내고 공동체가 어그러진 곳이 몇 곳, 아직 힘겹게 붙들고 있는 곳이 몇 곳 있다.

이상하게도 떠나고 다시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도 형태가 어떻든 나에게 대체하기 힘든 역할을 주는 곳을 찾아가게 된다.

취직을 해도, 취미를 위한 동아리를 찾아도, 종교생활을 해도 언제나 그렇다.

이제는 언젠가 이 곳에서도 누군가를 보내거나, 내가 지쳐서 떠나게 될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일종의 데자뷔다.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그러다 보니 이 물음이 조금 더 빨리 찾아오게 된다.

지치는 게 싫고, 누군가를 보내는 게 싫고, 공동체가 스러지는 것이 싫다. 그 모든 경험이 피곤하다.

그냥 조금은 안정적으로 내가 필수적인 곳이 아니더라도 같이 오랫동안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다.

피곤해지다 보니 가끔은 ‘내가 잘못해서 공동체가 이렇게 변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내가 필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내가 자초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말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오늘도 묻는다. 내가 없으면 참 곤란하다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곤란하다. 나도. 저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잘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럼에도 오늘도 체계를 잡지 못하고, 앞에 닥친 일만 하게 될 것을 알아 한숨이 나온다.

정말, 이 곳에 있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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