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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13. 2020

43. 나를 속였다. 뻔뻔하게

대학 신입생 시절, 필수로 들어야 하는 교양 수업으로 ‘인문학적 글쓰기’라는 수업이 있었다.

워낙 글을 써보지 못한 신입생들이 리포트나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보이는 수업이었다.

짧은 리포트를 쓰는 법, 논문을 쓰는 법, 생활에서 쓸 수 있는 여러 작문 기술을 알려주는 수업이어서 배울 것도 많고 재밌었던 수업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수업은 자기소개서를 쓰는 수업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수업이었으니 당연하게도 과제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것이었고, 과제의 마무리로 그 자기소개서를 토대로 자신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내가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썼는지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제목을 이렇게 적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못 보던 세상을 창조하는 크리에이터, 아인입니다.’


무슨 자신이었을까,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신입생이 쓰기엔 참 도발적인 내용의 자기소개서였다.

지금껏 한 것이라곤 도망 다니고 포기한 것 밖에 없던 나는, 그 날 자기소개서에 이미 수많은 것을 도전하고 성공시킨 패기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전부 반쪽짜리 소개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제대로 결과를 낸 것은 열 중 하나가 될까. 다른 건 다 실패였거나 내가 도망쳤으니까.

난 리더십도, 제대로 된 성과도 없는 빈 깡통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나이 스물 먹어놓고 뭔가 제대로 한 사람이면 대학에서 이런 수업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좀 뻔뻔하게 속여도 되지 않을까. 다 그렇게 자신을 파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를 솔직하게 소개해봤자, ‘인간실격’의 화자처럼 짧은 한 줄 밖에 쓸 수 없었다.

참 부끄러운 생애를 살았습니다.’라고.


하지만 그렇게 쓴다는 것은 명백한 패배 선언이었다. 대학 신입생이 돼서 처음 맞는 과제에서 바로 백기를 든다는 것은 아무리 부끄러운 인생을 산 나라도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히도 부끄럽고, 이렇게 나를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것이 너무 미안했지만, 그 이상으로 대학에 올라와 첫 과제는 성공하고 싶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이미 된 척하고 제목을 적었다. 해냈어야 했던 부끄러운 기억을 해냈다는 승리의 기억으로 덧씌웠다.

다 써놓고 보니 참, 멋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란 사람의 10대가 멋진 한 편의 청춘물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는 참 다른 그린 듯한 내 모습이 있었다. 내가 질투가 날 정도로.


자기소개서는 대호평이었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자기가 본 것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잘 쓴 자기소개서’라고 말하며 다른 수업에서 예시로 사용되기도 했다.

글쓰기 수업에선 그 자기소개서 덕인지 A+ 성적을 받았다.

정작 그렇게 칭찬을 받은 나는 별로 개운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랑스러운 크리에이터인 이력서 속 내가 부러웠다. 글을 쓸 땐 일단 나를 속이고 그렇게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를 속인 이력서가 마지막까지 나를 속이진 않을까?

어정쩡한 나를 잊고 이대로 나 자신에게 속은 채로 계속 ‘난 사실은 대단해’라며 위안을 하며 살지 않을까?

그대로 크리에이터는커녕 그 언저리도 못된 채 살게 되지 않을까?


물음에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나를 속이고 있었다. 방법만 달랐을 뿐이다.

평가받는 게 두려워 도망치면서도 ‘다음에는 다를 거야’

뭐 하나 진중하게 붙들지도 못하면서 ‘다른 건 분명히 잘할 거야’.

죄책감과 무력감이 커 내가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도 못했을 뿐이지, 계속된 내 실패의 뒤에는 최면 같은 자기기만이 있었다.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나를 속였다.

그리고 교수도 속였다.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

나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뻔뻔하게도 자신과 사람들을 잘 속이는 사람이다.


속이지 않은 내가 자랑할만한 사람이 되는 날은 언제일까.

과연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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