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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27. 2020

57.  꽃을 줘.

‘꽃을 줘. 너무 꽃을 안 주잖아. 나도 꽃 받고 싶어’

여자친구의 볼멘소리를 가끔 듣는다.

나는 그 말대로 꽃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연애하면서 꽃을 사준 횟수가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요즘 들어서는 점점 더 명확하게 꽃을 바라 이전에 비하면 자주 사주지만, 여전히 꽃에 손이 잘 안 간다.


어머니가 플로리스트여서 웬만한 꽃집의 꽃의 질이 어떤지 알게 된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의미를 잘 모르겠어서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안다. 색색이 알록달록한 꽃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하지만 장식을 위해 아름답게 하는 것 말고, 꺾인 꽃을 선물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와 닿지 않았다.


수많은 꽃말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도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에 어떤 소중한 것이 담긴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꽃은 바스러지듯 생기를 잃을 것이고, 다시는 원래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잠시의 아름다움만을 주기 위해 꽃을 선물하는 것이 다른 선물에 비해 좋을 것이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이런 곳에서는 감정이 말라버린 듯 무미건조해졌다.


여자친구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길게 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왜 그렇게 꽃을 가지고 싶냐고 물었다.

그녀는 간단하지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다른 의미가 없어. 내가 가지고 싶고, 네가 주는 게 좋아.’


그녀는 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물론 꽃이어서도 좋았겠지만, 그냥 꽃을 받는 게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준 것이 좋았다. 참 당연한 일이라 이렇게 쓰는 것도 부끄러운 깨달음이다.

왜 이렇게 당연한 것을 느끼지 못했을까. 왜 꽃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것일까.


지금까지 나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 무의식 중에 믿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이뤄야 할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었고, 사람들의 모든 몸짓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살아있는 세계관을 좋아했다.

모든 것에 전후 사정이 있고, 모든 인물들에 삶에는 의미가 있으니까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인생이 아름다웠다.


그에 반해서 현실은 의미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의미 없는 폭력, 의미 없는 증오. 의미 없는 인생들을 보고 잇자면 모든 것이 낭비되는 듯했다.

매일 수많은 시간 동안 의미 없는 인간의 흐름 가운데 섞여있자면 나마저 내가 믿는 목표와 의미가 사라질 듯했다.

그래서 더욱 모든 것에 의미를 찾았다.

‘분명 이 물건을 고른 데는 의미가 있을 거야’ , ‘분명 이 일에는 의미가 있을 거야.’


하지만 의미를 찾아 헤매다 보면 왜 의미를 찾았는지 잊게 되는 때가 있다.

선물을 고르는 데는 그만한 의미와 사용처가 있어야만 한다.

내가 오늘 쉬는 데는 그만한 의미와 내일부터의 대책이 있어야만 한다.

강박이다. 의미는 강박적으로 나를 몰아붙인다. 그리고 이내 의미를 찾지 않으면 행동을 멈추거나 계속하지 않는다.


꽃을 줘야만 하는 의미를 찾지 못하니 꽃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맞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을 받는 행위 자체가 좋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한테 받는 꽃이 좋은 것이다.

어쩌면 그런 단순하지만 명확한 좋고 싫음이 사람과 그 마음을 움직이는 첫 단추일지도 모른다.


하고 싶을 때 한다. 주고 싶을 때 준다.

의미를 찾는 건 그 뒤에도 괜찮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고 나서 비로소 의미가 생길 수 있다.

아직 어색하지만 의미를 찾는다고 멈추어 지금 아니면 안 될 찬스를 잃는 건 싫다.


꽃을 받고 싶은 사람에게 그 순간 꽃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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