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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Z Jun 17. 2024

사진이 영상이 될 때.

<원더풀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기억나시나요? 당신은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추억을 딱 하나만 선택하세요.
그 추억을 영상으로 재현해 드립니다.
영상을 보고 추억이 선명히 되살아나는 순간, 당신은 저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 곳에서는 추억과 함께 지내는 영원한 시간이 약속됩니다.


영화 <원더풀라이프>는 죽은 자들이 저승에 가기 직전,

일주일간 머무르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월요일, 죽은 자들은 대합실에 모이고

재현하여 평생 간직할 단 하나의 기억을, 수요일까지 선택해야 한다.


기억을 선택해 꺼내놓으면,

이내 기억 속의 디테일을 떠올리고 설명하며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생겼던 것 같아요. 이런 옷이었을 거에요.
오빠가 분홍색 원피스를 사줬어요.
여기에 자수가 들어가있고, 가슴팍에 주름이 있는 옷이었어요.
그날은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어요.
분홍색에 아이다운 옷이었어요. 부푼 반팔 소재였죠.”

결국 별 거 없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때 참 즐거웠어요.


세 살 쯤이었던 것 같아요.
여름이었고, 마당에는 하얀 빨래가 흔들리고 있었어요.
전 엄마 무릎에 누워 귀 청소를 받고 있었죠.
그때 엄마의 냄새와 뺨이 엄마 허벅지에 닿았던 느낌을 기억해요.

부드럽고 따뜻했어요. 아주 그리운 느낌이 들어요.



이렇듯 기억에 대한 구체화의 대부분은 객관적인 정보와 그 정확도보다는

그 당시에 느꼈던 감각, 그리고 그로 인해 떠오른 생각들에 의존한다.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 어떤 냄새, 어떤 촉감이 느껴졌는지.

그래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이렇게 자신의 감각을 더듬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가는 이들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당시의 현장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자신의 기억에 대한 설명이 끝을 향해갈 때면,

이들은 하나같이 예전의 바로 그 순간 자신이 느꼈던 감정에 도달하여 그때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뭐랄까. 좀 귀여워요.
꾸며서라도 잘 보이고 싶다는 게 사람의 본능이겠지만요.

기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이들은 가장 근사하고 화려한 기억을 찾으려 애쓴다.

인용한 대사처럼 그것이 사람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기억을 고르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인데,

자신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며

평범하기만 한 과거를 확인하고 이에 낙담하며 간직하고픈 기억을 고르지 못한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무렵이면 저는 당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겠죠.

당신은 아내 교코의 정혼자였죠.
당신의 이름과 5월 28일이라는 기일을 듣고 알았습니다.

교코의 기억 속 당신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희 부부는 그런 감정을 극복할 만큼 긴 세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니, 이곳에 와서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아내와의 추억을 선택할 수 있었겠죠.
저는 제 70년 인생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선택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기록한 비디오테이프가 제공된다.

자신의 과거 기록들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어쩌면 이제껏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나에게 중요한 것은 기록 속의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떻게 느꼈는지, 그것이 나의 인생에서 가지는 의미라는 것을 깨닫는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순간도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잃을 수 없는 마음이 담겨있다면,

죽어서도 간직해낼 유일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며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감정을 선물해준 순간을 단 하나의 기억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결정했다면, 그 후로는 기억을 재현하는 일이 필요하다.


빨간색 외에 다른 색을 없애고 나머지 배경을 모노톤으로 가면
빨간색이 두드러지겠네요.
빨간 구두, 빨간 원피스 이 두가지가 가장 중요해요.


날개가 구름을 이등분하며 날아가는 풍경이라든가
조종석에서 바라본 경치가 기억에 남았대요.
그 부분을 최대한 강조해서…

영상으론 온도를 표현하기 어려우니까
스프레이를 뿌려서 땀이 나는 것처럼 표현해보죠.


이들이 재현해야 하는 것은 기록이 아닌 기억이다.

기억은 당시의 실제를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해 만든 새로운 차원의 세계이다.

낙엽이 어디에 얼마나 있었는지, 손수건을 언제 어떻게 펼쳤는지와 같은

각각의 구체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때 나에게 강조되어 다가온 감각과 느낌,

그것을 아는 것은 자기자신 뿐이기에

스스로 영상의 감독이 되어 기억 속의 내가 느꼈던 것들을 재현하는 영상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기억은 영상이 되고,

영상을 통해 죽은 이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삶, 인간의 현재는
멈출 수도,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는 연속적인 영상의 형태에 가깝다.
인간의 기억, 인간의 과거는
효율적으로 압축되어 특정 사건 혹은 장면에 대한 사진의 형태로 저장된다고 한다.

내가 나 자신으로 느낀 감각과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그 때, 사진은 영상이 된다.

이전 04화 나의 감정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이 책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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