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싶었던 이유와 망설였던 이유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대략 이렇다.
1. 나를 돌보는 시간
매일이 전쟁같이 바빴다. 이제야 깨닫지만 나는 요령을 부릴 줄도, 스스로를 돌볼 줄도 몰랐다. 언제부터 심어진 인식인 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늘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그 외의 것들엔 소홀했다. 그것을 대변하듯 2년 동안 호전과 재발을 반복하던 무릎은 점점 통증이 심해졌다. 걷는 매 순간마다 통증이 느껴지는 무릎을 끌고 온종일 외근을 다니던 어느 날, 눈물이 흘렀다.
뭘 위해 이렇게 사는 걸까.
그렇다고 일은 다 때려치우고 마냥 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적당한 시간 동안 노동을 하고 제 때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고 취미생활을 하는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나를 돌보는 시간이 확보되길 바랬다. 하루 6시간 정도 노동하면 시간에 쫓기는 것 없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하고 싶은 걸 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 직장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2. 여러 가능성을 탐험할 시간
회사원 말고, 영업 말고 다른 거
6년이나 당연한 듯 살아왔는데 언제부턴가 회사원의 삶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주 5일 하루 8~10시간 이상씩 일하고 그 외의 시간만 자유로운 삶. 대부분 회사 위치에 맞춰 사는 곳을 정하고, 회사 휴가에 맞춰 자기도 쉰다. 출산휴가나 병가 등 특별한 사유 없이 1달 이상의 휴가는 어렵다.(회사에 따라 가능한 곳도 있지만 매년 그러기는 힘들다) 근무시간이나 일의 양을 자기가 조정할 수는 없다.
일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작 6년 일해놓고 이런 마음이 드는데 평생 이렇게 노동할 수 있을까?
장기간 쉬고 싶을 때도 있고 여행을 가고 싶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퇴사를 해야 되나?
이 생활에 나의 의지가 없다면 내 삶이 아니라 그냥 회사원 아무개의 삶 아닐까?
뭔가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건가?
일하는 방식 외에 나의 직종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았다. 영업이 너무 좋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서 시작한 것도 아니고,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데 이걸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어디까지 나를 넓힐 수 있는 지도 궁금했다. 회사에서 영업사원 밖에 경험하지 않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영원히 이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다른 것에 도전하고 깨지고 데여 봐야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의 윤곽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니 grade에 맞는 사람이 돼라.
회사가 너에게 기대하는 것에 부응하고
그 기대를 받아들여.
이동 발령과 동시에 나를 승진시켜준 매니저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한마디를 다른 의미에서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회사에서 원하는 grade에 맞는 사람이 되는 걸 나는 목표로 삼은 적이 있었는가? 아니.. 없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무엇이 목표이며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몇 달을 생각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1. 경제적으로 자립된 자유로운 사람
2. 정신적으로 자립된 자유로운 사람
경제적/정신적으로 자유를 갖고 내가 생각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려면 회사 밖에서도 통용되는 인재가 돼야 하고 스스로 뭔가를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자립되려면 세상이나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나만의 가치관과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위해 지금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은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실천해보는 것이었다.
회사 밖에서 단돈 100원이라도 벌어보는 연습
시시하고 작은 거라도 내 것을 만들어보는 연습
생각한 대로 실천하고 나만의 경험과 생각을 갖는 연습
내 생각이 어리석다고 해도,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고 해도, 단 1년만이라도 내가 생각한 것에 직접 부딪쳐 보자.
그리고 나의 반응을 보고 무엇이 내 방향인지 확인해 보자. 이게 나의 결론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3가지 부류였다. 다음 직장이 있거나, 창업하거나, 집안 사업을 물려받거나.
이 와중에 나는 퇴사 후 이걸 하겠다는 구체적인 포부와 계획이 없었다. 그 흔한 세계여행도 지금처럼 고민이 정리되지 않은 시기라면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쉬면서 나에 대해 더 알아가고, 해 보고 싶었던 걸 해 보고, 그게 그냥 관심인지 내 적성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1년, 아니 그 이상 걸리겠지만 내가 회사 밖에서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지 실험하고 싶었다. 이 두루뭉술한 마음이 다였다. 그래서 대책 없어 보이고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퇴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친구가 말했다.
근데 꼭 뭔가 준비가 돼 있어야만 그만둘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네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수도 있는 거지.
엄마가 말했다.
회사 그만두고 생활비 여유분은 있니?
1년 쉬면 취업이 전혀 안 되니?
아무 문제없으면 조금 쉬면 되지
나는 늘 무언가를 할 때 명확한 이유나 성공 가능성을 보고 움직이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음이나 감정은 명확한 이유를 스스로 잘 모를 때도 있고, 새로운 시도는 늘 실패의 가능성이 더 큰 것이었다. 계속해서 행동의 명분이나 성공의 가능성만 고려한다면 퇴사는 물론, 내 마음을 따르는 일 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 무모하지만 준비하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듯 백수생활도 그냥 그렇게 맞이해 보기로 했다.
월급이 사라지는 것, 돈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고 그 시간 동안 돈까지 얻으려는 건 욕심이라는 걸 되새겼지만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몇 달 동안 가계부를 써서 내 평균 한 달 생활비를 체크했다.
그리고 2가지를 안심할 수 있었다. 일단, 일하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계산해 보니 다행히 몇 년은 문제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라도 밥은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내 생활에 큰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축은 힘들어도 하루 6-7시간씩 주 4일 정도 일하면 생활비는 벌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평생 백수로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눈을 낮추면 어디서든 생활비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내 두려움의 실체는 월급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 회사에서 받던 만큼 다시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남은 건 나의 선택이었다.
이 회사가 주는 금액을 선택하느냐, 돌아오지 않을 나의 이 시간을 선택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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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한 걸로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에 갔다. 회사원이 되어 돈은 벌었지만 하루하루 내가 어딜 향해 달려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가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마음이 외쳤다. 서른 하나, 그제야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자발적 방황기를 갖기로 결심한다. 잘 쉬고 잘 자라기라는 나만의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된 현재진행형 일본 백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