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나씨 Jul 30. 2019

백수를 지지해준 단 한 사람

엄마, 고마워요


 딸이 일본에 산 지 6년이 넘었는데 엄마와 일본 여행을 한 것은 퇴사 후 마음의 여유를 찾고 나서였다.


 사실 우리 모녀는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가끔 안부전화를 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가까워진 것은 내가 변하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힘들다 하소연하거나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레 흔드는 사람이었다. 특히 가족에게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말을 더 아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고립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평일 내내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 가는데 돌이켜보면 전부 일 이야기뿐. 내 이야기는 그저 내 안에서 삭아서 사라지거나 쌓이고 있었다. 거기에 우울하기라도 한 날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때 제일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이 엄마였다.



 집 앞의 벚꽃을 구경하면서 사진 찍고 왔다고. 단풍을 보고 왔다고. 반찬을 만들었는데 맛이 없다고.

뭔가 이야기하고 싶으면 어김없이 엄마에게 카톡을 날렸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날은 펑펑 울면서 전화를 했다. 더 잘하려고 그랬던 건데, 이런 것쯤 별 거 아니라고 잊어버리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혼자 고민할 땐 세상 큰 일인 거 같았는데 그런 거 큰 문제도 아니고, 누구나 다 겪는 일이야. 엄마도 겪었어.라는 말을 들으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사소하지만 그 사소한 일상에 반응하고 엄마와 나눌 때 색은 더 진해지고 무게는 더 가벼워졌다.  




 

옷 좀 따뜻하게 입지. 머리 많이 길었네, 긴 게 더 예쁘다.


 어떤 사진을 보내도 엄마의 시선은 항상 나였다. 벚꽃보다도, 단풍보다도. 어떤 때는 좀 억지스럽게도 내 편이었고 언제든 이야기를 들어줬다. 살아온 시대, 직업도 달라서 나를 이해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퇴사를 고민하던 나를 단번에 이해해주었다.

그래, 그냥 너는 너를 찾고 싶은 거잖아.

하고 싶은 거 해 보고 좋아하는 걸 찾고 싶은 거잖아.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나와 엄마의 과거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는 피아노를 참 좋아했다. 대회에서 상도 몇 번 탔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땐 교수님 레슨을 받아야 할 레벨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우리 집 형편에 그게 될까?

피아노로 성공하는 건 피아니스트만이 전부라는 편협한 정보만 있던, 인터넷이 막 보급된 시골의 그 시절.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어린 나는 예술은 부잣집 애들이나 하는 거라 믿어버리고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피아노를 포기했다. 엄마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했었는지.  



 내가 되돌아보지 않던 시간 속에 잊힌 과거의 나를, 엄마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가 말해주길 애기 땐 오빠가 하는 건 다 따라 하려고 하는 아이였다. 일어나라 하면 곧잘 일어나고, 시키지 않아도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아이였다. TV전설의 고향에서 주인을 위해 불타는 집에서 죽어가는 개의 이야기 편을 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아이였다. 초등학생 땐 부반장, 청소 부장, 무슨 부장, 무슨 부장, 몇 개의 역할을 맡던 욕심 많은 아이였다. 연극제가 있던 때엔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전지에 혼자 그림을 그려 배경을 완성하던 아이였다. 매일 B사감처럼 철저하게 청소 검사를 하던 호랑이 선생님께 깨지고 혼나서 울면서도 시키는 건 120% 해 내고 결국 칭찬을 듣는 아이였다. 그렇게 일본어를 전공했으니 한 번쯤은 직접 살아봐야 한다며 일본으로 건너간 성인이 되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과거의 나는 참 두려울 것 없고  의사결정이 분명하며 하고 싶은 건 그냥 해 버리는 아이였다. 지금의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선뜻 실행하지 못하고, 선택을 위한 고민이 점점 길어지고 결국 선택을 미루기도 했다. 돈 때문에, 불안정한 미래가 무서워서, 나를 믿지 못해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며 스스로 느끼는 책임감도 있었겠지.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정형편이 기울어 공부보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동대문 시장을 들락날락하며 장사를 배우던 중에  노래를 잘하던 엄마를 눈여겨보던 분이 1년만 연습해서 가수로 데뷔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해 보고 싶었지만 당장 돈 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어른이 된 후엔 보험회사에서 일하다 선을 보고 아빠와 결혼해 전업주부가 되었다. 나와 오빠를 낳아 아이를 키우고, 식당, 옷집, 화장품 판매 등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50대 후반이 된 요즘, 몸은 예전 같지 않고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게 아깝다고 했다. TV를 보고 있으면 이 나이 되도록 해보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때는 먹고사는 게 바빠서 아무 생각 없이 돈만 벌며 살아왔지만, 만약 가수 준비를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뭔가 하나에 미쳐 열심히 했다면 지금 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고 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젊고 건강할 때 하고 싶은 걸 많이 해보라고 했다. 당장 생계에 문제가 있다면 돈을 버는 게 맞지만 괜찮다면 잠시 쉬고 때론 도전하고 그런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고 했다. 결국 그러려고 살아가는 게 아니냐고. 그 끝에 아무것도 얻는 게 없었다고 한들, 그냥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돈을 벌면 되고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나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말해주었다.



내게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준 사람.

내게 멈추는 용기를 준 사람.

나도 잊어버린 나를 기억하는 사람.

가장 가까운 인생선배.

먼저 인생을 산 사람으로서

50대 후반이 되면 어떤 걸 느끼는지 들려준 사람.







This story

 공부한 걸로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에 갔다. 회사원이 되어 돈은 벌었지만 하루하루 내가 어딜 향해 달려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가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마음이 외쳤다. 서른 하나, 그제야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자발적 방황기를 갖기로 결심한다. 잘 쉬고 잘 자라기라는 나만의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된 현재진행형 일본 백수의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하자마자 수술을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