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폐쇄병동 입원생활

네 번째 입원

by 별새꽃



1월에 퇴원하고 나서 혼자 외출도 가끔 가능해서 외래로 상담 치료를 받으며 지냈다.

딸을 기숙사에 보내고 짐 정리까지 해줄 정도로 나아진 상태였다. 집안 살림도 스스로 했고, 누구의 도움 없이 잘 살았다. 적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딸이 대학에 들어가고 처음 집에 왔을 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다음 날 시외가 결혼식이 있었다. 딸은 친구들과 미리 약속을 잡고 올라온 상태였다. 학원을 다니던 친구들과 함께 집들이 겸 만남을 가지기로 하고 온 것이다.

집안 행사가 있는 줄도 모른 채, 남편은 늘 가족 행사를 우선시하는 사람이다. 신혼 때부터 경조사가 있으면 어디든 함께 다녔다. 내가 아픈 상황에서도 자신만 가도 되는데 꼭 가족이 다 참석하길 바라는 사람이다.

작은 딸과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 친척 결혼식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약속이 잡혀 있다고 하니 난리가 났다. 남편은 숟가락을 던지고 딸을 쥐 잡듯이 잡았다. 그 순간 나는 스트레스로 인해 쓰러지고 말았다.

다 큰 성인에게 강조할 일이 따로 있지, 가까운 친척도 아니다. 외사촌 형의 딸 결혼식, 굳이 가야 하냐는 것이다.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깊은 늪에 빠지고 말았다. 난리가 났다. 소파에서 떨어지고 거실을 기어 다니고, 사람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더 화를 내는 남편. 화난 아빠가 무서워 벌벌 떠는 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너 때문에 엄마가 아프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딸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셈이다.
딸은 울면서 축 늘어진 날을 힘들게 안고 안방으로 데려와 뉘었다. 마음 약한 딸은 나로 인해 엄마가 진짜 아픈가 싶어 심하게 울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었다.

큰딸은 라식 수술 예약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아빠의 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수술을 하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작은딸은 상처를 받고 친구들과의 약속에 가게 되었다.

그 계기로 나의 상태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안방에서 거실까지 쓰러져 악을 쓰며 기어 다니고, 소파에서 떨어지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다가 쓰러지고, 일상생활이 무너져서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이벤트를 계기로 난 심각한 환자로 돌아갔다. 하루 반 이상을 마비로 싸웠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꽃 피는 계절을 병동에서 보냈다
폐쇄병동에서 봄이 지나고 있을 때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정신없는 시간 속에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다 세월호 사건에서 살아남은 학생이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환자들은 조심스러워 TV도 보지 않고 사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지내야 했다. 모든 의사들이 전부 세월호 사고에 매달리다 보니 입원한 환자들은 뒷전으로 밀렸다.

매일 브리핑이 이어지고 중계차가 진을 치고 있었다. 입원한 학생은 너무도 태연했다.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너무 밝은 모습이라 믿기지 않았다. 큰 사고를 당하고도 밝을 수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작 입원해야 할 학생은 입원하지 않고, 입김이 센 부모를 가진 아이가 입원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장애인 부모를 둔 학생은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며 자살 소동까지 있었지만 끝까지 집중 치료는 받지 못했다. 매일 추모 물결이 가득한 공원을 창 너머로 보아야 했다. 정말 아픈 아이는 제대로 케어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

폐쇄병동에 있던 여학생은 또래 남자아이와 너무도 잘 지냈다. 2인실에서 편안하게 먹고 자고 놀며, 죽음에서 살아온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회의 혼란과 함께 나의 병도 힘든 시간과 함께했고, 세월호 사건이 병원에서 어느 정도 진정되는 상황에서 나도 5월에 퇴원을 했다. 앞선 입원 때와 별다른 점 없이 힘들게 지내다 조금 나아진 상태에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