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자유롭게, 걸림없이

나의 성장과정

by 강롸롸

나는 수능을 썩 잘 보지 못했다.

재수는 없다고 못 박은 아빠가 못내 야속했지만

결국 내가 선택 한 곳은 경남대학교 경영학부였다.

뭐에 이끌리듯이 한참 내려서 넣은 곳이기도 하다.

내 선택이었기 때문에 후회한 적은 없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같이 OT를 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 둘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수강 신청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은 동아리도 가입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세트처럼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내 대학 생활은 정말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동아리 MT에서 술에 엄청 강한 선배 언니하고 맞붙었다.

하도 세다고 해서 내가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국 져서 남자 동기의 등에 업혀 기절했던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해서 내가 핸드폰만 찾아댔다는 것이 아직도 부끄러운 추억의 한 페이지다.


학교 잔디 광장에서 술도 많이 먹고,

공강 때 동아리방에서 과제도 하고,

선배들이랑 농담도 했던 추억이 많았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영어 선생님이 동아리 선배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놀랐다.

나중에 졸업 후에 가보니 20년 넘게 역사가 이어졌던 그 동아리는 이제 없었다.

내 기억과 책에만 존재하는 동아리가 되어 섭섭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자매결연 학교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학과사무실에서 접수하고, 외국인 교수와 면접을 보았다.

다행히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합격했고, 부모님의 은행 잔액 확인서와 각종 서류를 준비했다.

화룡점정으로 서울의 미국 대사관에 가서 영어 인터뷰가 남았다.


30명의 면접을 통과한 학생들이 섞여 40인승 학교 버스를 탔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사관에 줄을 섰다.

부스별로 한 명씩 미국인과 각각 3~4가지 영어 질문을 받고 답변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 PC방을 3군데 운영하고 계셨다.

근데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나에게 각 PC방마다 컴퓨터가 몇 개나 있느냐고까지 물어봤었다.

약간 놀랐지만, PC방마다 50대 정도 있다고 대답했다.


나머지 질문은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나질 않는다.

식은땀 나는 외국인과의 인터뷰는 솔직히 너무 허무했다.

4시간이나 걸려서 올라간 것을 생각하면 5분 남짓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는 대형 버스를 탈 때, 수군 수군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학생 한 명이 인터뷰를 통해서 탈락했다는 것을 들었다.

이유는 그녀의 부모님이 골프용품과 액세서리를 판매한다는 것 때문이라고 추측됐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6월의 화창한 어느 날, 드디어 연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부모님과 약 1달간 떨어져 있는 적이 처음이었다. 여러 가지 약과 옷가지로 캐리어는 빵빵했다.

디트로이트를 경유하는 일정이었고 18시간 정도를 비행기에서 보냈다.

가는 내내 다행히 고등학교 동창이 있어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가 지쳐서 잤다가 반복했다.


드디어 자매결연 학교인 뉴저지의 페어리디킨슨 대학에 도착했다.

우리는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3개의 반을 나눴고 나는 중간 반이었다.

우리 반은 이제 막 선생님이 되어 보이는 20대의 쾌활한 여자 선생님이었다.

매일 바르고 오는 붉은 색의 화려한 네일과 패디가 우리의 시선을 늘 사로잡았다.


전날 뉴욕까지 버스를 2시간 타고 가서 격렬하게 조별로 관광했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수업에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영어 회화 수업에 부담 없이 즐겁게 했던 기억이 남는다.

학교 급식을 먹으러 가는 길에 엄청 커다란 오리와 백조가 호수 주변에 많고 응가를 많이 싸놨다.

그걸 지뢰처럼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미국식 급식은 우리가 호텔 조식으로 먹는 것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바싹 익혀서 바스라질 것 같은 베이컨, 해시포테이토, 야채와 모닝빵 정도였다.


점심으로 랩이나 포일에 싼 샌드위치를 주는데

그걸 받아 들고 바로 시외버스를 타러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우리 조는 너무 고생스럽게 많이 돌아다녔다.

다리가 너덜너덜 할 때까지 맨하튼 중심에서 맨 밑까지,

다음날에는 맨하튼 중심에서 맨 위까지 이런식으로 다녔다.


그 중, 브라이언트 파크와 센트럴 파크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광야같이 넓은 평원의 평화로움이란 내 인생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우리는 센트럴파크에서 그 당시 대유행이던 꼭지점 댄스를

외국인들 앞에서 추면서 우리끼리 웃음이 터졌다.

그랬더니, 낯선 사람들이 우릴 보고 박수를 쳐주고 칭찬과 격려를 해줬다.

남을 의식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서 인지 그런 유머와 여유가 너무 좋았다.


마지막 일주일은 미동부 아이비리그 탐방, 유명 박물관과 전시장을 찾았다.

45인승 버스를 타고서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자고 자도 끝이 없는 넓은 이 대륙은 미지의 세계가 맞았다.

왠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고, 갈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처음 다녀왔다.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수십 년간 배운 것을

미국에 간 이 참에 써먹어 봤다는 것도 의미 있었고,

다른 과의 유쾌한 선후배들도 알게 되었고,

내가 뭘 더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더 알게 된 것 같았다.


한 번은 어렵지만 그다음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영어 스터디를 하며 알게 된 영문과 친구가 캐나다 연수를 준비한다고 했다.

나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했다.

대학생이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주와 필리핀, 캐나다와 뉴질랜드 등 한창 워킹홀리데이가 대유행이었다.


어학원에 가서 계속 견적을 받고 내가 몇 달 동안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아야 하는지 계산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인 홈플러스에서 행사 알바를 구했다.

나는 제과 파트에서 홍보 알바를 했다.

가판대 끝에 서서 새로 나온 과자 시식을 했다.

빼빼로 데이에 하트모양의 빼빼로 선물세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추석에는 주류 코너에서 위스키와 와인도 팔았다.

나중에는 커피 시음도 하고, 인삼 주스 홍보도 했다.

알바비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아빠는 항공권 비용을 대주셨다.

어학원 등록비와 체류비는 내가 마련했다.

커다란 3단짜리 이민 가방을 준비했다.

가면 여름이기 때문에 반팔옷을 잔뜩 넣었다.

이것저것 집어 넣고 준비를 마치니 1년간 부모님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김해공항에서 부모님과 같이 있었는데,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 와서 걱정과 염려를 뚝뚝 흘리며 나를 배웅해 줬다.

약 8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공항은 화창했다.


어학원부터 찾아갔고 홈스테이를 1달 하기로 했다.

시내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주택가에 있는 집으로 안내해주셨다.

그리고 JOYCE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바이올린을 취미로 하시며,

문화센터에서 정기적으로 오케스트라를 하셨다.

뮤지컬 ‘CATS’를 거기서 보는 영광도 할머니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여유 넘치고 친절했고, 동양 여학생 홈스테이를 받은 경험이 많았다.

아침마다 샌드위치도 싸주셨다.


자전거를 타고 3달 동안 어학원에 다녔다.

마지막 1달은 상급반에서 마쳤다.

평일에는 라군이라는 야외 풀장에 가서 자유롭게 수영도 하고

학원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도 하고 울창한 숲이 있는 교외로 렌트카를 빌려 놀러 가기도 했다.


이제 홈스테이를 마치고 4인용 쉐어로 이사를 했고,

학원을 졸업하고 호텔이 많은 시티 내에서 일을 시작했다.

근처에는 크고 작은 호텔이 많아 이력서를 뿌리고 하우스키핑 일부터 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선배를 만나서 오래 일을 하진 못했고 매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선배 언니가 하던 일을 이어받게 되었는데,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누들박스에서 주문 접수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일을 찾아 농장으로 간다는 무리가 있어 합류 하기로 했다.


떠나기 전에 내가 하고 싶던 스카이다이빙과 번지점프에 도전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염없이 올라가서 귀가 먹먹하다 못해 아파올 때쯤,

내 뒤에 찰싹 달라 붙은 외국 아조씨가 오케이? 했다.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플라잉 롸롸. ‘라라올라’가 되었다.


날다람쥐가 된 느낌이기도 하고,

내돈내산으로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너무 놀라 입을 열면 펄럭거리는 입술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은 아직 저 위의 경비행기에 두고 내려왔는데, 현기증도 났다.

내 뒤에서 조종하는 아조씨가 경치 봐라, 바다 봐라 외치길래 정신이 좀 돌아왔다.


이제 낙하산이 펼쳐지고 왠지 두둥실 가벼워졌다.

갑자기 아조씨가 손잡이를 잡아보라고 했다.

오른쪽으로 당기자 오른쪽으로 서서히 돌았다.

왼쪽 손잡이를 당기니 왼쪽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너무 신기했다.

이제야 태평양 바다가 보이고 길쭉하게 늘어선 모래사장도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사는 지구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구나.

사람은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구나.

여러 가지 감정이 왔다갔다 했다.

아조씨는 나에게 재밋냐고 물어봤다.

내가 쌍따봉을 날리며 판타스틱을 외쳤다.

그랬더니 운전을 더욱 격렬하게 해댔다.

으악으악! 정신없이 내려왔더니 이젠 착륙이다.


하나, 둘, 셋! 엉덩방아 콩.


다행히 안전하게 끝냈고, 같이 갔던 여자 후배도 내려왔다.

돌아오는 내내 경험담을 나누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비록 비싸서 풀영상으로 담아오진 못했지만

수료증 같은걸 줘서 그걸 품에 꼭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어느 날, 열대우림 숲속에 30m 짜리 번지점프를 하러 가자고 학원 친구들이 나를 꼬아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때의 나는 사양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올라가는 계단만 해도 수십 개를 타야 했고,

내 두 다리에 단단히 묶인 로프를 보니 실감이 났다.


스탭이 준비됐냐고 물어봤는데 머리로는 된 것 같은데 몸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각각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아, 이건 아닌데. 못 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이런 두려움을 떨쳐 내는데 몇 분이 흐르고 한번 더 해보려고 하는데,

점프대 위에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시간을 충분히 갖고 이제 도전했다.

결의에 찬 내 눈빛을 보더니 스태프는 하나. 둘. 셋! 하더니 나를 슬쩍 밀어줬다.

나는 으아아아아아악! 하면서 떨어져 내렸다.

호수 속으로 죽으러 간다는 느낌만 들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배우 이동건 동생이 총에 맞았다는 기사가 한국에 크게 나게 되었고,

같이 가기로 했던 후배들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서울 깍쟁이 오빠 한명만 나랑 같이 농장으로 가게 되었다.

8인 여자방에 배정되었고 일주일에 5-6일 정도 봉고차를 타고

거대한 애호박, 가지, 칠리 등을 따는 농장으로 갔다.


의외로 유럽권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온 친구들과 알게 되었다.

평일에는 2~3군데 농장에 번갈아 가며 7~10시간 정도 일을 했다.

뙤약볕에서 하는 날들이 많아서 구제 의류를 몇 벌 사서 일할 때 입는 옷으로 삼았다.


애호박이나 칠리, 가지를 딸 때면 옷이 더러워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녹초가 되어 집으로 와서 씻고 저녁을 만들어 먹을 때면

농장에서 한 두개 가져온 갖가지 야채에 라면이나 파스타면을 넣고

요리를 해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곤 했다.


일이 없는 날이나 주말에는 조용하고 시원한 도서관을 가곤 했다.

한글로 된 책을 찾아보기도 했고 사진이 많이 들어간 책을 찾아서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두어 장 보다가 잠들곤 했다.

잠에서 깨면 그냥 어기적 거리다가 집으로 가곤 했다.


도서관 옆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전화 부스가 있었는데,

온 김에 부모님께 전화를 하곤 했다.

국제전화 070 어쩌구 하는 번호로 전화가 가면 부모님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반겨 주신다.

잘 지내냐고 걱정도 많이 하시고 공부는 잘 되는지 아픈데는 없는지.

아무 문제도 없다고 그랬다.

대신 용돈이 부족하니 50만원만 더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해준 음식 중에 진미채무침이랑 멸치 볶음 좀 택배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약 1달 뒤에 택배는 도착했지만 세관에서 음식물이 밀봉되지 않은채로 보내져서

전부 폐기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퍼백에 그냥 넣어서 보내주셔서 그렇게 되었는데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그렇게 농장과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부에는 가지 않았고, 내가 시작한 북쪽에서 국내선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서

12사도와 남극 펭귄을 보고 세상의 배꼽이라는 커다란 바윗돌을 바라보며

야외 취침도 하고 악어고기와 캥거루고기도 먹어봤다.


한국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이런 재미있고 신나는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카메라가 고장이 나 더 많은 사진을 남기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만하면 충분했다.


돌아와서는 본격적으로 졸업과 동시에 취직에 집중해야했다.

중앙도서관 지하에 있는 공무원준비반을 신청해서 독서실 한 칸을 확보했다.

마지막 학기까지 최소한 학점만 하고 최대 학점을 받기 위해 벼락치기를 열심히 했다.


졸업 전에 취업캠프나 진로탐색에도 노력했고,

계속해서 토익 점수 높이려고 애썼다.

850점이 최대 점수였던 것 같다.

한 학기 늦게 졸업하는 바람에 같이 졸업한 친구는 3명 정도였던 것 같다.

드디어 정들었던 이 학교를 떠나는구나.


졸업 전에 48곳 정도 온라인으로 구직서류를 제출했다.

그런데 긍정적인 답변이 온 곳은 한 두곳 정도 뿐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우연히 경상남도청에서 인턴을 대규모 채용한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경남은행에서 인턴을 했는데 은행은 왠지 나랑 맞지 않았다.

나는 숫자에 대한 울렁증이 있었다.

회계학 부전공을 하면서 알게된 것이 나는 차변 대변이 맞지 않는 일이 많다는 점이었다.

은행 업무는 나랑 안 맞을 거라고 확신했다.


인턴을 하게 된 부서는 예산을 편성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한창 작업일 때여서 매일 야근을 하시는 직원분들을 보며

나는 6시 땡 퇴근하려니 눈치가 보이긴 했다.

그렇지만 막내라서 잘 봐주셔서 편하게 다녔다.


하루는 나에게 경상남도 출연기관에서 채용을 한다하니 알아보라고 알려주셨다.

그 회사가 바로 내가 아직까지 근무하고 있는 (재)경남테크노파크다.


졸업 후 2개월 후부터 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김해 주촌에 있는 사무실이었고

그 주변에는 산업단지가 들어온다고 해서 바닥 다지기부터 하고 있었다.

흙먼지가 매일 날리고 트럭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분위기였다.

거기서부터 첫 근무가 시작되었다.


차가 없던 나는 같은 사무실 연구원님 찬스로 아침에 같이 통근하게 되었다.

나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고 편하게 해주셨다.

다음 해에 늦은 결혼을 하셨다.


그 사무실에는 임대료를 부과하고,

장비의 가동률을 확인하는 등 운영 전반에 대한 자료를 취합해서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1년 반이 흐른 뒤, 중리에 있는 센터로 발령이 났다.

거기서도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다.

광려천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후 산책하는 것이 나에게 힐링이었다.


입주기업 중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임대료를 내지 못하는 중소기업이 있었다.

나는 마치 사채업자처럼 채권추심을 하고 경고장을 붙이고 내용증명을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도 사장님들하고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나를 철부지 없는 여대생 정도로 생각하셨다.


여기에서 세금계산서 발행, 납부독촉, 채권추심 이런 일을 하며,

‘정년까지 내가 여기에 있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발령받아 여기에서 탈출해야겠다.

그런데 마침, 메일이 와있었다.


인재개발팀에서 유능한 팀원을 모집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팀장에게 찾으시는 그 팀원이 바로 여기 있다고 회신했다.

2달 뒤, 나는 발령을 받아 새롭게 시작했다.

그러나 순탄치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팀은 한번 경고 조치를 받은 곳이어서 재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신과 새로운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했다.

이 팀을 좋게 보는 내부 직원이 별로 없어서인지,

갑질과 성희롱으로 물들어 결국 재편되었다.


그 후부터 내가 차석이 되어 팀장을 보조하고 웬만한 일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한층 넓어졌다.

이 시기에 소개팅도 많이 하고 데이트도 많이 했는데

주말마다 남은 일을 해야 해서 둘 다 잘하기가 쉽지 않았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의 이상형은 키 175cm에

나보다는 술을 잘 마셔서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담배는 안된다. 자상하고 유쾌한 사람이 좋았다.


의외로 다 만족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키가 작고 돈이 많은 사람, 술과 담배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

내가 아니더라도 애정이 고팠던 사람.


결론은 많이 만나 봐야 진짜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될 수 있으면

많이 만나봐야 데이터가 쌓이고 분별력이 생긴다고 조언한다.


약 2년 뒤, 부서를 또 옮겼다.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중소기업에 지원금을 보조하는 사업,

그리고 청년 고용에 대한 일자리 보조금 지원사업이었다.

이 지역에서 농업과 농산물 가공식품 제조하는 곳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 팀을 옮겨 과학기술진흥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팀장님과 팀원들 모두 좋은 분들이었지만

나는 배려도 많이 받고 고민도 같이 해주셔서 참 좋았다.

가끔 그때가 그립기도 하고 또 지나고 보니 아쉬운 마음도 든다.


어느 날 문득, ‘이제 곧 40인데 내가 이뤄 놓은 것이 하나도 없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40살이 되기 전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이때 바디프로필을 찍어 보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전국에 참 많았던 시기였다.


우선 회사와 집 사이에 있는 여성 전용 헬스장에 가서 개인 PT를 끊었다.

한창 할인과 이벤트가 많아서 거기 선택했고 여자 선생님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먹은걸 사진으로 찍어 보내고,

닭가슴살, 방울토마토, 샐러드 등 같은 것들만 먹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정해진 것만 먹을 수 있다는 생각만 했다.


그렇게 매일 운동하는 생활을 100일간 계속했다.

100일 후에 프로필 사진을 예약했다.

목표가 있어야 움직일것 같아서였다.

5번 정도 태닝했고 그 사이에 염색도 3번 했다.

그땐 왠지 지금껏 못해본걸 다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운동하고 식단 하는 사이 점점 살이 빠지고 근육이 붙었다.

하체 운동은 이미 근육과 지방이 많아서 열심히 안해도 됐지만

어깨랑 팔운동을 집중적으로 했다.

솔직히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엄마아빠가 약간 걱정하셔서 치팅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프로필 사진을 찍은 이후에 가능할 것 같았다.


마침내 프로필 사진 찍는 날이 왔다.

아침에 단수를 해야해서 약간 지쳤는데

스튜디오 가서 근력운동 좀 하고 기름도 좀 바르니까

진짜 초콜릿되다만 복근과 근육선이 잘 보였다.


그렇게 무사히 사진촬영이 끝나고 선생님과 짜장면을 먹었다.

그 이후에 동생들 만나러 서울 갔을 때는

빵에 미쳐서 빵지순례를 열심히 다니고

그동안 못먹었던 탄수화물을 미친듯이 먹었다.


신기한 것이 3개월 열심히 운동했더니 딱 3개월 뒤까지만 유지되고

바로 원래의 내 모습대로 돌아왔다.

다른 경험자들도 6개월 열심히 운동하면 딱 6개월 뒤까지만 유지된단다

그래서 유지어터가 다이어터보다 훨씬 힘들고 위대한 것이구나 깨달았다.


그래도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첫째,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둘째, 목표를 설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 과정이 힘들지만 아름답다.

셋째, 무엇이든 성취하려면 돈과 시간과 노력, 집중이 필요하다.


어느날 ‘띵동’ 내가 평소 존경하던 김미경 강사님의 동영상이

새롭게 업데이트되었다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몇 개의 또 다른 김미경 강사님의 동영상이 알고리즘으로 연결되었다.

자연스럽게 한 시간 정도 훌쩍 지나갈 만큼 나에게 감동과 울림을 남겼다.

앞으로는 여기 이 상황에 안주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아주 빠르게 변화할 것이라고 했다.


강사님은 MKYU(MK&You University)라는 온라인 대학을 열었고

학장이 되겠다고 1년 전 쯤 이야기하셨다.

나는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당장 2만 원을 내고 그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일주일 후 MKYU 웰컴 박스를 택배로 받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거기에는 노트, 펜, 메모지 등이 들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뭐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MKYU 홈페이지의 안내에 따라 아침마다 미라클 모닝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장님은 라이브를 켜고 같은 시간에

보이는 라디오같이 친근하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신다.

요즘 트렌드와 여러 가지 변화를 공유해주시고

그 사이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스스로 그걸 가질 능력을 기르자고 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약 1만 명에 달했다.

전국에 잠이 들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수가.

학장님의 팬클럽 이름은 ‘짹짹이’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참새같이 짹짹거리고 라이브를 켤 때마다

짹짹거리면서 인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쾌한 흥겨움에 나는 아침마다 설레었다.


매일 비슷한 맥락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일맥상통했다.

앞으로의 세계가 순식간에 달라지고,

그 변화의 속도에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고 했다.


돈 내고도 못 듣는 이런 강의를 언제 또 들어보겠나 싶은 생각에

100일 동안은 빠짐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사실 살짝 마음이 풀렸다.

학장님 혼자 약 1만 명의 짹짹이를 케어하려니 학장님 혼자 힘들어졌다.

1천 명 정도 수용 가능한 오픈 채팅방을 10개 만들어서

10조까지 랜덤으로 채팅방을 배정받게 되었다.


학장님 말씀 30분 하시고 그 뒤부터 30분은 미라클 모닝을 통해서

각자 하고 싶은 활동을 조용히 수행한다.

나는 주로 독서도 하고 스케줄 관리도 했다.

때로는 음악감상을 하기도 하고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속한 9번째 오픈채팅방의 사람들 중에서 줌을 켜고 점검하고,

배경음악을 틀고 하는 관리자를 20명 뽑았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겠다고 하신 분들 모두 책임감 있게 잘 해주셨다.

리더들은 인생에 대해 굉장히 열정적이고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었다.

여전히 소중한 인연으로 남아, 가끔 안부를 묻고

그 지역에 가면 연락해서 얼굴을 보며 커피 한잔 하고 싶어 지는 분들이다.


나는 독서그룹에서 리더를 맡았는데,

독서그룹에는 5~60대 분들의 참여가 많아서 나는 비교적 어린 편이었다.

처음에는 책을 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안 읽어본 책을 처음 읽고 이야기 나눠 본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사내 독서동호회의 회원이어서

그룹별로 독서토론회를 하는 것에 익숙했다.

대부분은 자기 혼자 읽고 말고 끝까지 못 읽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리더라 정해진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서 공유해서 책이 없는 분들은 참고했다.

돌아가면서 1페이지씩 육성으로 읽고 각각 감동적인 부분,

기억에 남는 부분을 돌아가며 짧게 감상평을 남기고 마무리했다.

뭐니뭐니해도 매일 빼먹지 않고 참석해야

책 내용이 오롯이 전달되는지라 네트워크를 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근데 나도 만약 리더가 아니었더라면 매일 기상과 출석도 힘들었을 것 같다.


그렇게 미라클 모닝 시즌이 종료되고 나서도

계속 그걸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미라클 모닝 포에버(미모포)’를 운영하게 되었다.

나도 용기를 내어 20명의 리더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학교나 회사가 아닌 곳에서 이렇게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된 것이

나한테는 큰 힘이고 자산이 되었다.


나의 활동명은 ‘강롸롸’였고, 한번 들으면 잘 기억나는 강렬한 별명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애칭으로 ‘라라’라고 불러 주신다.

약간 외국 발음처럼 혀를 꼬아 소리를 내면 강롸롸 소리가 난다.

전국에서 모인 20명의 리더가 오픈카톡방을 운영하고,

미라클 모닝을 계속 이어가다 보니 조금 더 내적 친밀함도 쌓이게 되었다.


이번에는 리더들이 주제를 정해서 운영해 보는 방식이었다.

나는 얼마 전 지옥의 PT를 마치고 보디 프로필을 찍은 경험이 있다고 했더니,

나에게 ‘홈트그룹’을 운영하라고 그랬다.

각자 집에서 건강을 챙길 수 있도록 저녁 식사 후 7시에 모여서

땅끄부부, 빅씨스, 심으뜸, 소미핏 등의 홈트 영상을 하나씩 틀어서 따라 해보는 것이었다.


나는 전문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리더라는 책임감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노트북을 켜고 시간이 허락하는 분들을 모아서 홈트를 했다.

몰래 회의실에 들어가서 동작을 따라하다 동료가 들어와서 민망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는 힘들지만, 먼 곳에 사는 사람끼리

같은 시간에 같은 동작을 하는 이런 코로나 시대에 적응한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거실이나 방에서 줌을 켜고 가벼운 운동을 하는 모습에

서로 웃겨서 진행하기가 어려웠던 적도 있었고,

중간에 들어오거나 참여 못 한 분들도 많아져서 기운이 빠질 때도 있었다.


한 달 정도 하고 나니 나중에는 괜히 보고 싶고 안부를 묻고 싶어져서 더 잘 참석하게 되었다.

어린 자녀와 함께 하기도 하고 가끔 남편이 지나가다가 보고는 같이하기도 하고 참 소소하게 즐거웠다.

그중 60대 할아버님이 계셨는데 건강에 관심이 많으시고 요가도 했었다고 말씀하셨다.

늘 긍정적이고 잘 못해도 늘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는 겸손하신 분이었는데 많은 짹짹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아직 다양한 분야에서 모임도 참여하시고 특강도 잘 참여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놀랐다.


친목이 강화된 리더들이 서울 홍대에 있는 MKYU 카페를 찾아가

김미경 학장님을 만나 사진도 찍고 근황과 조언도 얻기도 했다.

홍지민 배우의 뮤지컬을 관람하며 응원하는 이벤트도 했다.

회사에서 대전으로 출장 갈 일이 생겨서 리더를 만나 저녁을 함께 먹기도 했다.

부산에 있는 김해공항에서 만나기도 했다.

양평에 가서 유명한 분들도 만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전부 내가 MKYU를 하고자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중 몇몇은 미라클 모닝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책을 내신 분도 있었다.

매일 아침 새벽, 가장 먼저 감사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고 그것이 모여 기적을 만들었다고 책에 썼다.

그때 나도 어렴풋이 나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사이트와 기적을 책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온라인에서 다양한 강의도 많이 들었다.

AI와 메타버스가 대두되던 시기에 지역에서 메타버스와 관련된 강의를 섭외해서

과학 페스티벌 행사를 기획할 때 초청한 강사님과 인연이 되어서 메타버스 전시회도 열게 되었다.


메타버스를 활용해 광복절 테마로 꾸민 공간을 창조하고

그 경험을 글로 남겨서 공저 책을 썼던 적이 있다.

지금은 그 책이 어디에 돌아다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때가 공식적으로 나의 첫 글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삶의 해학이 담겨있고 동시에 깨달음을 주는 그런 재치 있는 강사가 어느새 나의 꿈이 되었다.

김미경 학장님이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다며 늘 말씀하셨는데

AI나 메타버스, 모바일 등 디지털 세상으로의 변화가 새로운 강의 기회로 다가왔다.


때로는 부모님같이 사용법을 모르고 서툰 분들을 위해

핸드폰이나 온라인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강사가 되어 배움을 나누고 싶다.


먼저 배워서 가르쳐 주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했다.

내가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먼저 배워서 지식과 감동을 전달한다면 훌륭한 강사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온라인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친목을 쌓는 동안 정작 나의 반쪽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30대 초반부터 열심히 소개도 받고 일부러 단체미팅도 나가보고 했다.

그러나 늘 마음에 드는 사람은 더 나은 조건의 여성과 매칭되곤 했다.

현실은 그렇다는 것을 계속 느끼고 나는 점점 작아졌다.


어느 날, 아빠가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며 만나라도 보라고 했다.

나는 누굴 만나기 귀찮고 혼자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터라 소개팅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이 갑자기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회사도 바쁘고 정신없는데 남자는 무슨.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아빠는 먼저 연락을 해보라고 나를 압박했다.

한 번만 만나면 아빠의 잔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겠지 생각했다.

먼저 연락해서 안부를 묻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제 퇴원해도 괜찮을 정도라니 회복이 잘 된 것 같다.

식당 예약도 해주고 와인도 신경써서 주문하며 섬세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내 눈엔 지금껏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제일 잘생겼다.

나는 얼빠인거 인정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첫만남을 회상해서 이야기할 때면,

그에게서 후광이 비추고 왠지 이 남자와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 갑자기 확 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왠지 결혼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고 했을 때 내 친구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만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를 보러 제주도에 다녀왔다.

2주 뒤에 우리 아빠 생신이어서 같이 식사를 하고,

그 다음주에 시아버님 생신이어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게 거의 상견례가 되었다.


남편과 나는 연애를 남편 가게에서 했다.

내가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게가 있다.

우리는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인 싱어게인을 나란히 앉아서 봤다.

그냥 TV를 보면서 노래를 들으면서 서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데이트라고 부르기도 소소한 만남이었다.


남편은 나 몰래 프로포즈를 준비했다.

이벤트룸에서 우리는 그 상황이 코믹하기도 하고 어설프지만, 서로에 대한 진심이 쌓여갔다.

남편이 시를 영상으로 띄우면서 한줄 한줄 읽었다.

결혼해달라고 얘기하는 그 모습이 감동이었다.

용기 내줘서 너무나 고마웠고,

그렇게 결혼 준비를 서둘러 일사천리로 1년도 안 되어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날 남편이 나에게 적어준 편지에 쓰인 시였다.


[ 너를 위하여 ] - 김 남 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가만히 눈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남편과 신혼여행은 싱가포르와 몰디브였다.

우리는 바다와 수영을 사랑한다.

싱가포르에서 경유하며 2일을 아주 큰 풀장이 있는 곳에서 비가 와도 수영했다.

야경도 너무 아름답고 황홀했다.

몰디브에서는 푹 쉬면서 밥도 잘 챙겨 먹고 수영도 미련 없이 했다.

대학원 논문 때문에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싱가포르를 배경으로 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여유를 만끽했다.


어쩌면 다시 가기 힘든 곳일지도 모르니 후회 없이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세부, 보홀, 괌, 발리 등 수영하러 많이 갔다.

남편은 물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돌고래, 거북, 고래상어, 만타가오리, 열대어, 정어리 등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바다생물들과 만났다.


남편은 7년 전부터 한식을 주로 하는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전에는 제조회사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아버님이 사기를 당했고 가세가 기울어

어머님의 손맛과 남편의 성실함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고 했다.

우리 형님도 운영에 있어 아주 베테랑이시다. 가족기업인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빠가 자영업을 해오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자녀들이 이렇게 두 팔 걷고 가게를 운영해오는 모습을 보니 대단해 보였다.

나와 동생들은 가업을 잇거나 할 생각보다는 직장인으로 살아남길 택했다.

그걸 부모님이 원했기 때문이다.


신혼집은 나의 직장과 남편 가게에서 가까이 자리 잡았다.

친정 부모님께 자주 가고 싶은 마음도 포함되었다.

1년 뒤, 남편은 직장인들이 많은 상가에 2호점을 냈다.

시어머님이 요리하시고 남편은 1호점과 2호점을 왔다 갔다 하면서 관리했다.


결혼 이후 양가에서 기다리던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나는 난임 전문병원을 다녔다.

회사에 다니며 병원에 오가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휴직을 내고 본격적으로 진료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나의 상태를 검사했을 때,

나는 나이에 비해 난자가 젊다고 했고 남편도 보통이라고 했다.

처음 난자 채취와 이식할 때 어찌나 떨리고 생경했던지.

남자 선생님 앞에서 쩍벌한 채 수면마취 되는 것은 참 민망한 일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에 우리는 성공했다.

상대적으로 빨리 성공되었음에 기쁨과 환희,

그리고 얼떨떨한 마음이 공존했다.

비슷한 시기에 둘째를 임신한 여동생과 여러 가지 공감되는 부분도 많아서 좋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임신 중기가 되자 알리고 축하도 받고 준비도 하나씩 하고 있었다.


남동생 결혼식을 위해 서울에 다녀왔는데 이게 스트레스 였던 것일까?

며칠 뒤, 배가 마구 아프더니 화장실에 가서 앉아 있다가

너무 아파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다니던 산부인과를 갔는데, 대학병원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의사는 대학병원으로 가보라며 전화를 해주겠다고 했다.


배가 너무 아파서 119를 불렀고,

타고 가는 중에 그 대학병원에서 자리도 없고 수술이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차에 누워 있었는데 겨우 가게 된 곳은 경북대학병원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고 나는 죽은 아이를 낳았다.


너무 슬프고 힘들고 정신도 없었다.

부모님은 남편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대구로 오셨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기다리던 손주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은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엄마, 아빠, 우리 앙꼬가 먼저 가버렸어.”


글로 쓸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과 상실감이

나와 우리 남편, 그리고 가족들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3개월 정도는 그 무게에 이기지 못해서 집에서 요양을 계속했다.


야속하게도 내 몸은 유선이 발달해서

모유가 나와서 얼음찜질을 하다가 급히 마사지사를 부르기도 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바람이 통했다.

나중에는 골반과 장요근이 아파서 고생도 꽤 했다.


여동생이 가장 먼저 달려와서 유산의 경험을 공유하고 깊게 위로해줬다.

2달 정도 지나서 마음이 좀 안정이 된 후에 주변 친구들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너도나도 경험이 있다고 얘기했다.

정말이지 엄마가 되는 길은 내 생각 보다 훨씬 멀고 험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난임병원에 찾아가서

몸 상태를 확인하고 될 때까지 노력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시어머님과 대구 팔공산에 가서 기도하고,

강원도 깊은 숲속에 스님께 가서 불공드렸다.

강릉에 아들바위도 찾아가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이제 곧 마지막 시술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 마음먹었다.

복직하기 전에, 임신 성공하고 긴 난임 기간에서 졸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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