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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덜쌤 Nov 14. 2024

이제서야 희생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강아지똥 - 1학년 권장도서

너무나 유명해서 애니매이션도 나오고, 그 애니매이션을 아이들도 잘 봤던 작품. 3학년 교과서에 나왔었나?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이 책의 존재를 다 알고 있었고 감동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많았었다. 물론 그건 저학년때 이야기고.


고학년을 주로 했었던 나는 이 작품의 좋은 점을 잘 몰랐다. 큰 아이들은 딱히 시큰둥. 그런데 생각해 보면 교사도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아이들도 뻔하게 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잘 알고 있지만 해석은 달랐던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별거 아닌 강아지 똥이 참새로부터 자신의 별거없음을 확인 받는다. 흙덩이도 강아지 똥을 우습게 보지만 실은 자기도 보잘 것 없다고 강아지 똥을 위로한다. 그런데, 그런 흙덩이를 소중히 주워가는 주인이 나타나는 반전. 결국 강아지 똥은 혼자 남게 되고, 병아리와 닭한테도 본인의 가치가 떨어져 간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런데 민들레를 만나면서 자신의 쓸모를 깨닫는다. 그리고 실행한다. 비록 존재는 지워졌지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세상에 남긴다.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은 희생의 아름다움을 많이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혹은 무엇이든 이 세상에 사는 이유가 될 수 있겠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나 보다. 그런데 요즘 세태에는 희생이란 단어가 딱히 좋게 느껴지진 않는다.


 '내가 희생해서 세상이 좋아진다면? 그게 뭐! 내가 굳이?'


희생이라는 말이 좀 더 내 안에 다가오려면 내가 정말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을 때거나 내 마음이 아주 넉넉해져서 욕심을 다 버렸을 때가 아닐지. 전자는 있어서 알겠는데 후자는 아직 멀었다. 사랑하는 대상과 관계된 일에만 희생을 떠올릴 뿐 범위 밖으로 넘어갈 때에는 다시 냉냉해지는게 문제. 결국 내 안을 넉넉하게 채워야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


그럼 왜 내 안은 늘 부족하다고 느낄까?


누구나 있는 삶의 목표가 다른 이의 것과 비교되면서 혹은 비교하면서 불행은 시작되는 듯 하다. 그래서 경쟁 속에서 발전이 이뤄지는 지금 이 세상이 조금은 피곤하다.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서 그걸 이루고 사는 삶이 행복의 본질일텐데, 초연결사회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연결되는 걸 무시하기도 어렵고. 그런데 확실한 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인생에서는 쉽게 행복을 찾기가 어렵다.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이상적인 자아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 받기에는 우리네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지.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아무 경쟁도 하지 말고 살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나야 벌써 나이가 꽤나 지나버려서 새롭게 삶의 태도를 바꾸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만, 혹시나 더 나은 삶을 꿈꾼다면 지금은 노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희생일수도 있겠지. 현재라는 시간을 갈아넣는.




나이를 먹고 이 책을 보니 이렇게 다른 생각이 드는군. 역시나 좋은 책이 맞다. 스테디셀러인 이유가 있군.

아이들이랑 같이 읽는다면 해 줄 말이 많을 것 같다.


강아지똥은 행복했을까요?

- 어쩌면 존재 자체가 '쓸모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듯. 다만 어떤 존재라도 그 '쓸모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이야기하면 좋을 듯 하다.

-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니가 좋아하는 건 무얼까? 왜 그게 좋아? 어떤 걸 잘 하는 것 같아?'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 좋지 않을지.


민들레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 강아지똥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결국 민들레도 시들지 않겠느냐라는 대답에 씨앗이 널리 퍼져서 새로운 민들레들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시작의 의미가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 마치 부모는 언젠가 죽지만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괜히 눈물이 나네)


이제보니 강아지똥은 희생한게 아니라 본인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게 아닐까? 이걸 보고 '정신승리'라고 코웃음치는 사람들도 있겠지? 남의 행동을 낮춰서 이야기하고 깔보는 행동이 결코 나를 위로 올리는 행위는 아니다.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것조차도 그들이 말하는 '정신승리'일 뿐. 


같은 정신승리라면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행복함을 느끼는 편이 좀 더 낫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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