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둘, 사람 둘을 싣고 늙은 차가 달린다
성실한 소비생활에 대한 보답으로 소복하게 쌓인 마일리지를 받았다. 추석 연휴를 붙였더니 열흘의 휴가도 마일리지 옆에 복스럽게 놓였다. 두 개의 보물을 호주머니에 넣고 앉아 나는 호기롭게 세계지도를 펼쳤다. 주머니가 두둑하니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미대륙 한 번은 밟아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패기가 생겼다. 역시 용기의 기반은 자본이다. 하지만 마일리지로 미국 내에 깃발을 꽂는 것은 영화 <Far and away>에서 이주자들이 말을 타고 출발선에 일렬로 대기했다가 출발! 신호에 맞춰 달려가 가장 멀리 달린 사람이 그만큼의 땅을 차지하는 것처럼 평등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것이었다. 미국행 티켓을 얻기까지 나의 여정은 이러했다.
항공사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날짜를 하루 앞, 하루 뒤로 옮겨가며 샌디에이고, 뉴욕, 시애틀, 뉴올리언스, 샌프란시스코 등 들어봤던 미국 내 지명을 하나씩 친다 → 수백 개의 경우의 수 사이에서 로딩 바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 어쩌다 빈자리를 발견하면 항공사에 득달같이 전화를 건다 → ARS라는 무서운 적을 단계별로 깨부순다 → 비로소 나타난 왕 아니 직원과 다시 지루한 밀당을 한다 → 거절당한다 (반복)
마침내 직장인의 근성으로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얻어냈다. 직장인의 쉬지 않는 손가락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에어비앤비였다. 회의를 마치고 난 후, 귀갓길 마을버스에서, 자기 전 침대맡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에어비앤비 앱을 들락날락 거리며 수십 개의 하트를 만들었다. 하트를 찍을 때의 기준은 하나였다.
한 번쯤 꼭 살아보고 싶지만 서울에서는 살지 못하는 집
같은 기준으로 다시 그 하트를 두 개로 줄이고 예약 완료 메시지를 받아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두 번째 하트의 주인공, 시애틀의 에어비앤비 호스트 라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방 하나를 빌릴 수 있는 돈으로 시애틀에서는 집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 있었다.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 집주인 라스가 기차역으로 픽업을 나와준다고 했다. 낡고 빨간 닛산 트럭에 하얀 곱슬머리에 낡은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내가 앉아야 할 조수석에는 찢어진 인형들과 개털이 가득했다. 라스는 여기가 개들이 주로 타는 자리라며 지저분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인간이 타는 건 오랜만이라고 한다. 10분 정도 달려서 라스의 집에 도착했다. 창 밖을 구경한 결과 시애틀은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미국 동네의 느낌이었다. 네모네모로 길이 난 동네에 지붕 있는 집들이 장난감처럼 줄지어 서있고 그 앞에는 작은 정원들, 그리고 그 정원 앞에는 큼직한 차들이 있었다. 정원을 가꾸는데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들도 정원에 이것저것을 자유롭게 심어뒀는데 이 도시 사람들은 확실히 꽃보다는 숲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라스의 집도 정원을 가장한 숲 너머에 있었다. 내가 3박 4일 동안 묵을 독채는 라스가 직접 차고를 리모델링한 집이었는데, 정원도 따로 있는 매우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때가 오후 5시였나. 라스가 별 계획이 없다면 동네 드라이브를 시켜준다고 제안했다. 해가 지기 전에 봐야 할 것들이 있는데 개들이랑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나야 너무 좋지"라고 대답할 때만 해도 앞으로 두 시간이 어떻게 꾸려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낡은 빨간 차에 라스의 커다란 개 두 마리, 맥과 맥캔지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내가 그 옆으로 "아 미안 미안. 같이 좀 타자"하면서 끼여 올라타자 개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밟고 올라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바람을 쐬었다. 내 두 허벅지 위에 개발이 여덟 개. 개들은 다행히도 자리를 뺏은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며 빨고 핥아주었다. 나도 질 수 없어서 조물조물 투닥투닥하며 서로 희롱하는 중에 라스가 뽕 맞은 사람처럼 엔진을 밟았다.
"자자자! 해질 때까지 시간이 별로 없어! 서둘러야 해!"
어느새 어느 언덕에 도착했다.
"내려내려! 가서 시애틀의 전경을 바라봐. 저기까지 더 올라가서 얼른 사진 찍어. 내가 개는 붙잡고 있을 테니까."
"저기 보이는 게 돌고래 등 같지? 돌고래랑 비슷한 Orca라는 동물의 등을 형상화한 아트야. 근데 저거 오래된 해군함을 리사이클한 거다!"
하지만 내가 가장 눈이 갔던 건 개 산책을 시키러 온 또 다른 사람들이었다. 개들이 짖고 달리고 주인들이 껄껄껄 웃는다. 파란 재킷의 아저씨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내년에 멕시코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런데 네 달 전인 지금부터 짐을 싸고 있다며 라스가 놀렸다. 이렇게 자유롭게 뛰어노는 개가 많다니 천국 같다고 생각하며 늘어지려는 찰나, 라스는 나를 다시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또 다른 공원에 도착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저게 레이니어 산(Mt. Rainier)이고 저게 만년설이야!"
"나는 개똥을 치울 테니까 너는 저기 가서 풍경을 봐."
"아. 그리고 저건 공장을 리사이클한 거다!"
시애틀이 재활용을 좋아하는지 라스가 재활용을 좋아하는지는 둘 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스는 어딜 가든 재활용을 강조했다. 다리 아래로 보이는 레이니어 산 그리고 재활용을 했다는 공장도 멋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이 마술처럼 아름다웠다.
시애틀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구나 하며 늘어지려는 찰나, 라스는 또 나를 태우고 엔진을 밟았다. 마치 포뮬러 원에서 피트에 머신이 들어오면 네 개의 타이어가 순식간에 새 타이어로 교체되는 그 움직임처럼 낡은 차에 라스, 나, 맥, 맥캔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끼워졌다. 착착착착! 착석을 하면 여덟 개의 발이 자연스럽게 나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차자자작 차자자착! 그러면 머신이 출발한다. 누구도 과속을 하지 않는 평화로운 도로 위에 이 낡은 차만이 미친 속도로 달린다. 다음 피트는 항구다.
"저게 하우스 보트고 사람들이 저기에 살고 저 멀리 있는 게 올림픽 공원이야."
"보이니? 해가 져서 잘 안 보이나?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 한 거다!"
보랏빛이 된 하늘 아래 최선을 다한 뿌듯함에 늘어지려는 찰나, 이미 라스는 맥과 맥캔지를 끌고 차를 향해 가고 있다. 그다음은? 착착착착! 차자자작 차자자작! 또 어딘가 호수에 도착해서 라스가 말했다. 레이크 유니온(Lake Union)이라 불리는 곳인데, 집들이 호수 위에 떠 있었다.
"시애틀의 잠 못 드는 밤이라고 톰 행크스가 나오는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를 저기서 찍었어. 톰 행크스가 하우스 보트(House Boat)에서 살잖아. 아, 너 근데 톰 행크스 아니?"
"우리네 한국사람들이 트럼프는 몰라도 톰 행크스는 알지."
"톰 행크스는 좋은 배우야. 그리고 좋은 사람이지."
라스는 베지테리언이고 개를 좋아하고 트럼프를 싫어한다. 와. 개 봐! 와. 석양 봐! 와. 산 봐! 와. 하우스보트 봐! 감탄을 하는 두 시간 동안 시애틀을 다 본 기분이었다. 60년 된 라스가 30년 된 차를 끌고 차선을 왔다 갔다 시애틀을 밟는 동안 맥과 맥캔지는 돌아가며 내 허벅지를 사정없이 밟았다. 우리가 이렇게 밟은 이유는 시애틀이 비의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같이 날이 좋은 날이 드무니까.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으니까. 내일은 이 경치가 다 사라지니까. 내일은 전혀 다른 시애틀이 될 테니까.
커다란 개들이 뛰고 싸고 구르고 안기고, 라스는 개줄을 잡았다 놓쳤다 같이 뛰고, 나는 석양을 본답시고 뛰고 구르고 웃고, 더러운 차에 다 같이 뛰어들어 낑겨타고. 정말 정신없이 신이 났다. 좌충우돌 미국 코미디 영화에 나온 미국인이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속성으로 시애틀을 가르쳐준 라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매드 맥스라는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데 너 오늘 운전 아주 매드 맥스였다고(극찬) 나 오늘 볼 거 다 봐서 내일 시애틀 떠나도 될 거 같다고 말했더니 라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날 밤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길고 깊게 잤다.
다음날엔 뒹굴대다가 느지막이 나가서 시티바이크를 빌렸다. 어제 라스가 시티바이크가 엄청 편리하니까 그걸 빌려 타고 돌아다니라고 할 때만 해도 '아, 시티바이크? 따릉이? 서울에도 있지. 나도 잘 알지'라고 생각했지만 시애틀의 시티바이크에는 충격적인 포인트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지하철역이나 유명 건물 앞이 시티바이크의 주차장이어서 자전거가 필요한 사람은 그 주차장을 찾아가서 대여를 하는데, 시애틀의 시티바이크는 주차장이 따로 없었고 도시 전체가 주차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킥보드가 이 방식과 똑같이 운영되고 있다.)
길을 가다가 보면 나무 밑에, 동네 어귀에, 공원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자전거가 서있었다. 누워있었다. 그냥 이렇게 자전거를 두면 길 가다 타고 싶은 사람들이 타는 것이다. 이 시스템에 감동해서 몇 번이나 자전거를 빌려 탔다. 보이면 타고 지치면 내리고 아무 데나 뒀다가 다시 보이면 올라탔다. 시티바이크는 기어도 변변치 않고 무겁기는 또 엄청 무거워서 도시가 아무리 평지여도 금방 지치는 것이 사실인데 아무데서나 타고 아무데서나 내린다는 이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즐기느라 몇 번이나 페달을 밟았다.
비가 올 것이라고 했던 날씨는 어제보다 더 좋아서 선글라스가 소용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고개를 돌리면 커다란 호수가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공기는 맑고 사람들은 느긋했다. 공원에는 각자의 스타일로 쉬고 노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매달고 광대처럼 그 줄을 타는 사람도 있었다.
브루어리 펍에서 맥주도 마시고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치즈 버거도 먹고 굴도 먹고 화이트 와인도 마시고 파이크 마켓 플레이스(Pike Market Place)에 가서 해산물 구경도 하고 스타벅스 1호점도 봤다. 그런데 내가 가장 해야 할 일은 쇼핑이었다. 9박 10일 여행을 하면서도 옷을 몇 벌 안 챙겨 왔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시에 온 기념으로 어제 하나 남은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는데 맥과 맥캔지랑 물고 빨고 하느라 개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시애틀에서 쇼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느냐 하면 진짜로 살 만한 옷이 없었다. 예쁜 옷이 진심으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산 것은 스테이크용 고기다. 시애틀에서 쇼핑 욕이 가장 자극되는 곳은 홀푸드마켓(Whole Food Market)이었기 때문이다.
고기 구워 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달랑달랑 걸어오는데 집 앞에 라스가 맥, 맥캔지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랑 서있었다. 고양이의 이름은 마식. 아. 너의 모두 M자 돌림이구나. 라스가 빨간 차에 기대서 궁금한 것이 너무 많다며 북한 이야기, 한국 이야기, 트럼프 이야기를 쏟아내길래 "그럼 이야기 좀 할래?"라고 했더니 너무 좋다며 맥주를 가지고 온다고 했다. 그렇게 내 정원에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한참을 떠들었다.
정원에는 갈색 페인트칠을 한 소화기 통이 인테리어처럼 놓여 있었다. 라스가 소화기를 납품하고 고치는 일을 하고 있어서 남는 소화기 통을 한번 꾸며봤다고 했다. 멋스럽네. 테이블 위에는 노란 꽃도 꽂아뒀는데 그 위로 매달린 빨간 물통에는 새들을 위한 설탕물이 들어있다고 했다. “설탕물? 새들이 설탕물을 좋아해?”라고 묻자 먹어보라고 했다.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라스가 진지하게 권해서 어쩔 수 없이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더니 정말 달았다. 라스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라스가 자신의 인생과 생각을 털어놓았다. 워싱턴 스튜핏과 평양 스튜핏의 이야기. 동물을 먹는 거보다 더 나쁜 건 동물을 고문하는 것이라는 이야기. 본인은 베지테리안이지만 본인의 개는 고기를 먹으니까 자신은 고기를 매일 산다는 이야기. 그래서 머릿속에서 두 가지의 가치가 싸운다는 이야기. 엄마는 고지식한 스웨덴 사람이고 아빠는 농담 밖에 할 줄 모르는 이탈리안이라서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아빠가 UN에 다녀서 유년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는 이야기. 삼성과 문선명의 이야기.
나도 생각이 나는 대로 나의 이야기를 떠들었다. 내가 겪은 무슬림 문화에 대한 이야기. 아시아를 여행하는 서양 남자들의 이야기.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차별과 문화 차이의 이야기. 우리 가족의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 설명이 안 되는 부분에서는 일어나서 두 손을 휘저었다. 몇 개의 단어들로 돌려 막는데도 라스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나는 어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라스는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기보다는 어른 얼굴을 한 젊은 사람 같았다. 청년처럼 분노하다가 소년처럼 웃고, 나에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말해주었다. 라스와 마지막에 나눴던 말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너희 나라도 문제가 많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문제 정말 많다니까."
"휴. 뭔가 다행이야."
"안심이야? 너희 나라만 문제 있는 게 아니라서?"
"응. 뭔가 안심이야."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변방에서 온 이방인에게 초강대국 시민이 위로까지 받아간다니 너무하네? 웃고 떠드는 사이에 허밍버드라는 새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라스는 새를 상처 없이 내보내려고 한참 동안 애를 쓰다가 손으로 새를 잡아서 내보냈다. 손님인 나를 의식해서 인지 갑자기 새가 집 안으로 들어간 거 보니 좋은 징조라고 하길래 동양에서도 그런 미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해줬다.
라스는 내일 내가 가봤으면 좋을 곳을 지도로 그려주고는 개밥을 주러 가야 된다며 일어섰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스테이크를 구우며 생각했다. 와. 이토록 퓨어한 자유당계의 60대를 만나다니. 라스는 알까. 이토록 젊고 자유로운 정신을 유지하며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를. 그리고 신념대로 살 수 있게 두는 나라에서 자란 소고기는 맛있었다.
다음 날엔 용기 내어 차를 렌트해서 라스가 꼭 가봐야 한다고 했던 위드비섬(Whidbey Island)에 가보기로 했다. 소형차를 예약했는데 렌터카 회사에서 그 차가 나갔다며 대신 거대한 승합차를 보여줬다. 정말 이것이 내 차냐고 물었더니 정말 미안하다면서 이것뿐이라고 답했다. Dodge라고 쓰여있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고 회사에서 단체로 미팅하러 갈 때 타는 9인용 카니발과 크기가 같았다.
덜컥 겁이 났지만 뭐든 큰 나라에서 큰 차를 타니 별로 큰 거 같지도 않았다. 미국 도로는 말로 들었던 것처럼 시원시원하고 차 간격이 널찍널찍해서 고속도로 진입하는 것이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만년 초보운전 주제에 차를 끌고 페리를 타고 섬에 도착했더니 상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섬에서의 운전은 매우 즐거웠다. 빼곡한 큰 나무들 사이에 잘 닦긴 2차선 도로가 나있는데 차가 거의 없었다. 창문을 열고 피톤치드를 마시면서 달리자 커다란 내 차가 종착지에 도착했다.
일단 밥을 먹고 근처 도서관에 가서 섬 지도를 얻어보기로 했다. 사실 나도 론리플래닛 미국 편을 가져온 사람인데 간밤에는 운전 걱정하느라 펴볼 생각을 못했고 그랬으면 책을 들고라도 왔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라스의 집 책상 위에 곱게 올려두고 왔다. 카운터의 친절한 도서관 사서 할머니는 섬 지도를 건네주며 가지라고 말했다. 내친김에, “여기 걷기 좋은 숲은 어디에 있어요?”라고 물어보자 사우스 위드비 커뮤니티 파크(South Whidbey Community Park)를 알려줬다.
차에 키를 꼽고 내비게이션에 장소를 찍고 이번 여정에는 조금 더 힘을 내서 음악도 틀어봤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울창하고 저 멀리 태양은 뜨겁고 내 카니발은 붕붕 잘도 달리네. 도착한 사우스 위드비 커뮤니티 파크는 내가 바라던 바로 그런 곳이었다. 잔디가 너무 부드럽길래 신발을 벗고 걸었다. 잔디가 끝도 없이 펼쳐지길래 달려봤다.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시각과 청각 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다. 움직인다는 것은 조심해야 된다는 말과 같아서 무언가 앞에 나타날까 조바심을 내며 살다가 이 사람이 어느 날, 런던에 가게 된다. 수화가 아닌 새로운 소통법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이 이 사람을 넓고 평평하고 아무것도 없는, 나무조차 없는 공원에 데려가는데 그때 아저씨한테 이렇게 말한다.
“뛰세요.”
선뜻 뛰지 못하는 아저씨한테 선생님이 다시 한번 말한다.
“아무것도 없고 무엇에도 걸려서 넘어지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뛰세요.”
망설이던 아저씨가 발을 내민다. 한발 두발 내밀다가 정말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고 믿게 됐는지, 어느 순간 갑자기 속도를 내며 뛴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른다. 환호처럼 터지는 어떤 소리.
“처음으로 뛰어봤어요. 처음으로 자유롭게 뛰어봤어요.”
아무것도 없는 잔디를 뛰면서 그 아저씨의 달리기를 생각했다. 뻥 뚫린 곳을 뛴다는 것은 이렇게 즐거운 일이지. 발바닥은 촉촉하고 푹신하고 앞으로 앞으로 뒤로 뒤로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 소리 조차 없다.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여전히 초보운전이기 때문에 깜깜해지기 전에 다시 페리 선착장에 돌아왔다. 페리에서 노을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애틀을 떠나는 날에는 환경보호와 리사이클링을 중요시하는 라스에게 분리수거가 무엇인지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병은 병대로 플라스틱 용기는 씻어서 한편에 엎어두고 종이는 깨끗하게 접어서 종이끼리 음식쓰레기는 봉지 하나에 담았다. 비닐도 분리할까 하다가 너무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것은 공용 봉투에 담았다. 우리가 얼마나 빡세게 환경을 보호하며 사는지 알아줄래. 이 작은 나라의 고군분투를 알아다오. 네 개의 분리수거 봉지와 라스가 추천했던 위드비섬에서 주워온 조개를 남기고 라스의 집을 떠났다.
아홉 달을 기다려온 아홉 날 간의 나의 미국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혼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혼자로 있는 것이 당연한 나라였고 혼자여서 즐거운 나라였다. 새로운 대륙을 밟아봤고 두 번, 세 번 더 밟아볼 대륙을 떠났다. 서울에 도착하니 라스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게 되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마을들이 있으니 연락을 하라고 했다. 나의 다음 여행지가 결정되었다.
광고대행사 AP.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남유럽에서 열여덟 명의 사람을 여행한 기록 <다정한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를 썼고, 책 이름과 동일한 코미디 팟캐스트를 진행합니다. 30분 방송에 3번 웃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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