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줌파 라히리의 '일시적인 문제'를 읽고
2014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편혜영의 '몬순'을 읽었습니다.
문학의 문외한이긴 하지만
80년 대 이후 문학상 작품들을 꾸준히 읽어온 제게는
두 작품이 가진 구성, 정서, 메시지의 유사성을 외면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같은 책에 실린 조해진의 '빛의 호위'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놀랍도록 착하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작품이네요.
사람을 향한 아주 작은 호의 하나가
그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음을 가슴 먹먹하게 보여줍니다.
이 시대에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도 고민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는 저는 문장들이 좋네요.
몇몇 문장은 필사를 하고 싶을 정도로.
작가 조해진, 기억해야겠습니다. :)


감각은 왔던 순서대로 떠났다.
멜로디가 옅어지면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도 지워져갔고
권은이 서 있던 거리 풍경도 점점이 뒤로 물러났다.
남은 건 아스팔트 바닥에, 권은의 코트깃에,
그리고 그녀의 신발 위에 내려앉던 하얀 눈송이뿐이었다.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 안에서 휙 지나가는 빛이 있거든.
그런 게 있어? 어디에서 온 빛인데?
평소에는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숨어 있겠지.
어떤 데?
장롱 뒤나 책상서랍 속이나 아니면 빈 병 같은 데...


그런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뭐랄까,
나에겐 천진한 기만 같아 보였죠.
알려 했다면 알았을 것들을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야 자신은 몰랐음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 조해진, '빛의 호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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