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한 여름밤의 산책

스몰 스텝 스케치 #19.

늘 그렇듯 저녁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아차 하는 마음에 시계를 보니 밤 12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약간의 갈등이 일었다. 이 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내일 아침 역시 허무하게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여름 무더위에 산책할 시간을 내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반대로 산책이 가능한 시간은 다른 할 일도 많았다. '플래너'를 보니 요 2주간 산책을 나선 날은 고작 이틀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산책만큼은 빼먹지 않던 나 스스로에 대한 위기감이 나를 집 밖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여느때처럼 이어폰을 끼고 팟캐스트를 고른 후 애플워치의 빠른 시작을 눌렀다. 오늘은 한동안 듣지 않았던 '청춘 라디오'를 틀었다. 중앙일보 현직 기자들이 현안과 이슈를 두고 고급진 수다를 떠는 팟캐스트였다. 빙산의 일각인 기사보다는 그 이면의 숨은 이야기들을 전문가의 알기 쉬운 수다로 듣는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카카오 뱅크', 역시나 신문 기사에서는 읽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혹이라도 빗줄기가 쏟아질까 싶어 집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익숙한 골목길을 돌아 30분을 걸었다. 빗방울이 맺힌 애플워치의 조그만 모니터 위로 개미인간 하나가 열심히 뛰고 있었다. 막 3km를 알리는 알람이 뜰 무렵 나는 어느새 집 앞에 다다라 있었다.


행여 오해는 마시길. 나는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 뿐 아니라 강박에 사로잡힌 운동광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하루에 최소 30분은 걷기로 나 스스로에게 약속한 사람일 뿐이다. 한 때는 새벽 6시에 일어나 동네 소공원의 운동장을 헉헉 대며 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 못해 하는 숙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속했다면 분명 나는 건강해졌겠지만 그 지속가능한 체력도 의지도 내게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선택했다. 하루 30분 이상 걷는 산책은은 퇴근길에 버스를 타지 않는 노력만으로도 가능했다. 사색을 좋아하는 나는 그 시간을 별도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어느 샌가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를 듣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특히 운동(비슷한 것을) 하면서도 혼자만의 사색이 아닌 지적인 수다의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데는 팟캐스트만한게 없었다.


그날 선택한 팟캐스트 '청춘 라디오'의 기자들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꼭대기 어느 쯤엔가 위치해 있을 그들의 직업이 주는 피로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육두품, 하급 사무라이 정도로 여기는 유쾌한 자기 비하는 이 팟캐스트가 가진 일종의 차별화 요소이자 유니크함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번뜩이는 직업 정신은 영화 한편도 이슈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 날의 팟캐스트를 듣지 않았다면 카카오 뱅크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 그러니까 산은분리 정책으로 인해 회사 지분의 10퍼센트 이상을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IT기업이 금융계에 일으킬 변화에만 골몰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한여름밤 짧은 산책은 이렇게도 의도치 않은 생산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땀도 제대로 나기 힘든 30분의 산책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그것도 운동이냐고 내 친구처럼 투덜대실 수도 있겠지만...


산책은 내게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는 묘한 변주의 즐거움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어, 어' 하는 동안에 날은 어두워지고 해놓은 일 없이 밤을 맞는다. 주말이라면 그 조바심은 몇 배가 된다.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늦은 밤 단 10분이라도 산책을 권하고 싶다. 그 일상의 정해진 길을 벗어나 잠깐의 생각의 외도를 경험하는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일상의 궤도를 벗어난 일탈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걸으면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코 짧지 않은 스물 네 시간 중 나 스스로를, 그리고 그 날의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그렇게 바쁘게 달리는 나를 제 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묻게 된다. '뭣이 중헌디...'라고. 내가 그토록 바쁘게 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된다. 하루에 단 10분, 조금 여유가 된다만 30분 동안의 이런 성찰이 만들어내는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와 명예와 심지어 건강까지 거머쥔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검색해보라. 그들 중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이나 명상, 혹은 그 비슷한 시간들을 오늘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을 테니까.


밤 12시에 산책을 마친 후 샤워까지 하고 나오니 시간은 벌써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날 새벽 6시에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새벽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나와의 약속 하나를 더 지킬 수 있었다. 카카오 뱅크가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일말의 장점과 가능성은 무엇인가. 약점은 무엇인가. 그 약점을 기회로 만들기 위해 내일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글쓰기'라고 생각했고, '브랜드'에 관한 것이라 생각했고, '소통'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의 그 산책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대단치 않은 글은 결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소하고 소박하고 가벼운 글들도 1년이 쌓이면 때로는 한 번씩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기도 한다. 누군가의 칭찬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출판사의 연락을 받기도 한다. 언제나 변화는 아주 작은 하찮은 시도로부터 시작하게 마련이다.


앞 집 아저씨가 흥에 겨워 아침부터 노래를 한다. 다른 쪽에선 서툰 기타 소리가 간간히 내리는 빗소리를 뚫고 나지막히 들려온다. 평소 같으면 짜증이 났을 텐데 오늘 아침은 함께 그 흥에 빠지고 싶어진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일 것이다. 삶이란 이 작고 소중한 순간들의 합이다. 한 여름밤의 산책도 그런 순간들의 한 조각이다. 그 한 조각이 이 고단한 인생의 행복을 완성하는 아주 작은 퍼즐의 한 조각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오늘 밤도 산책을 나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월요일 저녁의 불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